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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김씨 봉화 구전종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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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간명 안동김씨 봉화 구전종택
  • 주소 경북 봉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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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김씨 봉화 구전종택

안동김씨 봉화 구전종택

김중청(金中淸, 1567~1629)의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이화(而和), 호는 만퇴헌(晩退軒)·구전(苟全)·초려자(草廬子)·반천자(槃泉子)이다.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의 5대손으로 할아버지는 김정헌(金廷憲)이고, 아버지는 중추부첨지사(中樞府僉知事)를 지낸 김몽호(金夢虎)이며, 어머니는 반남박씨로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 1517~1586)의 형 박승인(朴承仁)의 딸이다. 부인은 영천이씨로 이영승(李永承)의 딸이다. 아들은 김주우(金柱宇)이다.
김중청은 1567년 12월 20일 봉화현 만퇴리에서 태어났다. 태어났을 때 조부(祖父)는 “반드시 이 아이가 우리 문호(門戶)를 부지(扶持)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부친은 김중청이 여덟 살이 되자 소고 박승임의 문하에 보내어 수업을 받게 하였다. 김중청은 나이가 어렸으나 부친의 마음을 잘 알아서 착실하게 공부하여 날로 진척이 있자, 박승임이 기특하게 여겨 말하기를 “이 아이는 재주와 기량이 있으니 큰일을 맡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월천(月川) 조목(趙穆)이 봉화현감으로 부임하였을 때 나이가 11세였는데, 부친의 명으로 가르침을 받게 되었다. 처음에 『대학(大學)』 한 책을 수업받았는데, 하루 만에 『대학』 한 권을 모두 암송하여 한 글자도 틀리지 않았고 글의 뜻을 모두 풀이한 뒤 조목에게 나아가서 말하기를 “군자의 무궁한 사업이 이 책에 있습니까?”라고 하였다. 조목이 크게 인정하며 말하기를 “이 책은 실질적인 학문이니 익숙하게 읽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하였다. 조목이 봉화현감의 임기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자 책 상자를 짊어지고 따라가서 배웠다. 또한 틈틈이 소고의 문하를 왕래하며 경전과 제자(諸子)와 사기(史記)에 두루 통달하여 오묘한 뜻을 찾아 깊은 맛을 보았고, 은미한 말과 심오한 뜻을 신묘하게 이해하고 두루 통달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공은 류종개(柳宗介)와 함께 의병을 일으켰는데, 공이 항상 군사 책략을 맡아 해로(海路)를 통하여 침입한 왜적에게 대항하였다. 하루는 공이 부모를 뵈러 간 사이에 류종개 공이 갑자기 왜적을 만나 싸우다가 사망하자 군사들이 흩어졌다. 공이 정성을 다하여 불러 모으고 다시 임흘(任屹)을 주장(主將)으로 삼아 군무(軍務)를 경영하였다. 비록 힘이 적어 공을 이루지 못했으나 당시 사람들이 모두 공의 충성과 근면에 감복하였다. 왜적이 물러가자 반천(槃泉) 골짜기에 서실(書室)을 짓고 책을 읽으면서 도(道)를 강론하니, 학생들이 많이 와서 배웠다. 경적(經籍)을 토론하다가 틈틈이 문장(文章)을 지었는데, 정밀하고 깊이가 있으면서 건실(健實)하고 오묘하였다. 일찍이 과거 공부에 뜻을 두지 않았고 자신을 낮추어 남을 따른 것이 또한 전아하고 순수하여 본보기가 되었다.
1607년(선조 40) 안동부사로 와 있던 한강(寒岡) 정구(鄭逑)를 찾아가 『심경(心經)』을 배웠다. 1608년(선조 41) 봉화현감 임혁(任奕)의 사람됨이 못마땅하다며 이를 피하여 예안(禮安)의 남양리(南陽里)로 이사하여 살면서 초려자(草廬子)라 자칭하였고, 뒤에 또 구전거사(苟全居士)라고 칭하였다. 1610년(광해군 2)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1613년(광해군 5) 성균관전적·예조좌랑·정랑을 역임하였고, 이듬해에는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15년(광해군 7) 세자시강원문학이 되었으며, 사간원정언으로 폐모론에 반대하는 이원익(李元翼)을 탄핵하라는 대북파(大北派) 정인홍(鄭仁弘)의 부탁을 거절하자 파면되었다. 1616년(광해군 8) 신안현감(新安縣監)으로 있을 때 한강 정구를 자주 찾아뵈었다. 이때 정인홍이 정구를 해치기 위해 이창조(李昌朝)의 사건으로 한강을 무고하여 고변(告變)하는 문안(文案)을 만들고자 한강의 조카 정담(鄭澹)을 보내 협박하여 순영(巡營)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정인홍의 계교를 저지하였다. 1619년(광해군 11) 대신(臺臣)이 다른 사람의 사주를 받아 관아의 면포(綿布)를 남용(濫用)하였다고 그를 모함하여 아뢰자, 곧바로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621년(광해군 13) 승정원승지로 선유사(宣諭使)가 되어 영남을 순행하였다. 이후 산직(散職)에 머물렀으며 인조반정 후에는 조정에 나아가지 않았다. 1629년(인조 7) 향년 63세로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는 『구전집(苟全集)』 8권 4책이 있으며,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갈 때 김상헌(金尙憲)을 비롯한 여러 사람이 지은 시문을 모아 놓은 『부경별장(赴京別章)』을 2004년 한국국학진흥원에서 영인, 번역하여 간행하였다. 묘소는 경상북도 봉화군 재산면 남면리 태자산(太子山)에 있다.
교유 인물로는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1563~1633), 창석(蒼石) 이준(李埈, 1560~1635),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 1561~1637),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1570~1652), 소암(疎庵) 임숙영(任叔英, 1576~1623), 계암(溪巖) 김령(金坽, 1577~1641), 운천(雲川) 김용(金涌, 1557~1620), 호양(湖陽) 권익창(權益昌, 1562~1645),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1554~1637), 인재(訒齋) 최현(崔晛, 1563~1640), 석담(石潭) 이윤우(李潤雨, 1569~1634) 등이었다.
김중청은 장가를 두 번 갔는데, 첫째 부인은 장수황씨(長水黃氏)로 사과(司果) 황하(黃賀)의 딸이자 익성공(翼成公) 황희(黃喜)의 현손(玄孫)이다. 2남 1녀를 낳았는데, 장남 김주민(金柱旻)은 생원(生員)이고, 차남 김주국(金柱國)은 생원이다. 딸은 수찬(修撰) 이모(李慕)에게 출가하였다. 둘째 부인은 영천이씨(永川李氏)로 봉사(奉事) 이영승(李永承)의 딸이다. 2남 1녀를 낳았는데, 첫째 김주우(金柱宇)는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지평을 지냈고, 둘째 김주한(金柱漢)은 생원이다. 딸은 사인(士人) 박흔(朴昕)에게 출가하였다. 측실(側室)은 2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김주연(金柱衍)과 김주미(金柱美)이고, 딸들은 각각 김박(金珀)과 신석망(申碩望)의 아내가 되었다.

참고문헌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이광정(李光庭), 「구전선생문집서(苟全先生文集序)」
조목(趙穆), 『월천집(月川集)』
유교넷(www.ugyo.net)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