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주메뉴 바로가기
  • 공간과 편액
  • 주거공간

영양남씨 영해 광계정

의견달기 URL
목록
  • 공간명 영양남씨 영해 광계정
  • 주소 경북 영덕군 영해면 원구리
e019_1_1_001.jpg
영양남씨 영해 광계정
관련편액 광계정(光溪亭 )

영양남씨 영해 광계정

남상소(南尙召, 1634~1709)의 자는 유보(幼輔)이고, 호가 광계(光溪)이다. 본관은 영양(英陽)이고, 거주지는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이다. 조부는 난고(蘭皐) 남경훈(南慶薰, 1572~1612)이고, 부친은 남길(南佶)이다. 남길의 2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형은 남상주(南尙周)이다.
1654년(효종 5) 부친상을 당하여 3년상을 치렀으며, 1657년(효종 8) 향시에 합격하였다. 1660년(현종 1) 식년시 진사 3등 34위로 합격하여 성균관에 몇 년 동안 거처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어머니 단양신씨(丹陽申氏)를 봉양하고 선친의 제사를 정성껏 받들었다. 1674년(현종 15) 모친상을 당하여 정성을 다해 상을 치렀으며, 이후로는 과거에 대한 마음을 접고 후진 양성에 매진하였다. 청렴한 절개로 지조를 지키고 온화한 후덕함으로 남들을 대하였으며, 후생들을 잘 가르쳐 인도해서 성취하는 바가 많았다. 아들은 남하명(南夏明)·남한명(南漢明)·남진명(南晉明)·남송명(南宋明)을 두었다.
남상소의 10세손인 남붕(南鵬, 1870~1933)은 1923년 8월에 경주에 와서 머무는 동안 그곳에 사는 여러 족인을 모아 놓고 남상소를 기리는 계회(契會)에 새로 가입하는 사람들의 명단을 추가로 기입한 「광계정추입계첩(光溪亭追入契帖)」을 만들었다. 그 후 남붕은 광계정 계회의 운영 자금을 관리하는 일에도 신경을 썼다. 9월 12일에는 경주시 암곡동에 사는 족인을 모아 놓고 「광계정추입계첩」을 수정하고 유사(有司) 남걸조(南杰朝)에게 보문·암곡·구어동의 여러 족인의 명전(名錢)을 합한 80여 금을 주었다. 그중에는 돈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도 있어 남붕이 대신 빌려주고 차후 다시 받기로 하고 내어주기도 했다. 남붕은 남걸조에게 명전을 그냥 갖고만 있지 말고,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계책으로 삼으라고 일렀다.
1924년 1월 초에 다시 경주에 와서 머물고 있던 남붕은 2월 5일 여러 족조를 만나 해조(海朝) 족조의 집에 가서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광계정 계전(光溪亭契錢)을 거두었는데, 미처 거두지 못한 것은 교숙(敎淑) 족조가 모아서 차후에 남붕에게 가지고 오기로 약속을 하였다. 2월 9일 외동읍 구어리에 사는 남의조(南宜朝)가 광계정 계전을 거두어 모아 왔는데, 모두 17원 18냥이었다. 나머지 6명이 내지 않은 6냥은 남의조에게 위임하였다. 11일에는 머물고 있던 사상재에서 행장을 꾸려 나와 경주 읍내로 나왔다. 13일에는 집으로 돌아갈 계획을 세웠는데 가기 전에 몇 명을 더 만나고 가야 해서 미리 나온 것이다. 그런데 계전이 잘 모이지 않았다고 하여 아무래도 집으로 돌아갈 날을 며칠 더 미뤄야 할 것 같았다. 12일 저녁에 남붕은 공낙중(孔洛中)의 집에 가서 며칠 전에 도착했다는 옥금의 족조 남효구가 보낸 편지와 경주시 암곡동의 남교태가 보낸 편지를 전해 받아 보았다. 그런데 암곡동에 사는 남교태의 편지에서 광계정 계전을 아직 거두지 못했으니 남붕에게 직접 한 번 와주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다음 날 남붕은 암곡동으로 향했는데, 경주시 안강읍 청령리에서 천북면 덕산리·물천리·손곡리의 산길과 눈 내린 고개를 넘어 온갖 어려움을 겪으며 도착하였다. 날이 이미 저물어서 초곡(草谷)의 집에 들어가 잤다. 2월 14일 아침에 남붕은 족인인 남걸조에게 내일 모여서 회의하기로 정하고 대략 술과 안주를 준비하게 하였다. 약속 시간에 계정(溪亭)에 모여 광계정계(光溪亭契)의 문기(文記)를 작성하였다. 암곡의 명전(名錢)은 26냥이고, 보문의 명전은 이자와 함께 37냥 1전 5푼이며, 구어동의 명전은 19냥이니 합이 82냥 6전 5푼이었다. 4냥 7전을 술과 안주 값으로 기록하였다. 실제 남은 돈 77냥 9전 5푼은 남교원(南敎源)에게 넘겨주었다. 2월 15일 아침을 먹은 뒤에 여러 족인이 와서 모였다. 이에 광계정 계전 77냥 9전 5푼을 거두어 모아서 새로 유사가 된 남교원에게 넘겨주고, 내년 2월 15일에 다시 거두어들일 것을 약속하였다. 일을 마친 남붕은 다시 길을 나서 밤늦게 보문동에 이르러 잤다. 2월 16일 남붕은 보문동에서도 아직 거두지 못한 계전을 거두었는데 겨우 3냥이었다. 그 나머지는 족조인 남교일(南敎一)에게 부탁하고서 집으로 돌아왔다.

참고문헌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유교넷(www.ugyo.net)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