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정의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경문(景文), 호는 대산(大山)이다. 증조는 이효제(李孝濟)이고, 조부는 이석관(李碩觀)이며, 아버지는 관가재(觀稼齋) 이태화(李泰和)이고, 어머니 재령이씨(載寧李氏)는 밀암(密菴) 이재(李栽)의 딸이다. 7세에 『십구사략十九史略』을 배웠는데 지칠 줄 모르고 글을 읽었으며 12~13세에 벌써 『사서』를 다 읽었다. 『연보』에 의하면 14세 때 외조부인 밀암 이재 밑에서 『소학』과 『맹자』를 수업하였다. 이재가 세상을 떠나자 어느 날 홀연히 탄식하여 말하기를 “문장은 한낱 조그마한 재주일 뿐이니, 기수(器數) 예기(禮器)와 예수(禮數) 등의 의문(儀文)의 말단이요 도(道)의 지극한 바가 아니다.”라고 하고는 『병명팔첩屛銘八帖』을 지었는데 독서(讀書), 독지(篤志), 신사(愼思), 사고(師古), 근독(謹獨), 성신(省身), 일신(日新), 역행(力行)의 여덟 가지였다. 소호리 북쪽에 있는 대석산(일명 일개산) 아래에 대석서당을 지어놓고 자제들을 교육하였는데, 이때 지은 시가 있어 소개하기로 한다.
처마에는 후둑후둑 비 내리고창문은 머나먼 바람 머금었네오랜 나무는 온몸이 젖어들고메마른 연못에도 물이 고였네허공 밖의 산그늘이 드리우고연꽃 향기 은은하게 풍겨오네벼슬길에서 두 다리가 지쳐서이 즐거움 그대들과 함께하리
簷瀉泠泠雨窓含遠遠風全身老樹濕一水小塘空山影來虛外荷香得暗中名途兩脚倦此樂擬君同
이상정은 평소 벼슬에 대한 집착이 없었다. 1751년(영조 27)에 예조낭관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1753년(영조 29)에 연일현감에 제수되었는데 1년이 못 되어서 치적이 크게 드러났다. 그런데 1755년(영조 31)에 옥사에 연좌되어 파직되어 돌아왔다. 1758년(영조 34)에는 상이 특별히 명하여 사간원정언에 제수되었으며 1762년(영조 38)에는 다시 사헌부감찰에 제수되었다. 이상정은 조령(鳥嶺) 밑에 이르러서 병을 이유로 정장(呈狀)하고는, “갈매기는 사람의 일에 관심이 없고, 일만 리 물결 위를 자유로이 노니누나. [白鷗不關人間事 萬里波長自在遊].”라는 시를 남겼다. 그 뒤 1771년(영조 47)에 강령현감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였으며, 1777년(정조 1)에 정언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1780년(정조 4)에는 병조의 낭관에 제수되었다. 이때 상이 대산에 대해 관심을 갖고 등용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마침 대신들이 합사(合辭)하여 대산을 천거하였으므로 대산을 통정대부의 품계로 승진시켜서 병조참지에 제수하였다. 대산이 상소하여 이를 사양하자 다시 예조참의로 옮기었으며, 이듬해인 1781년(정조 5)에는 형조참의에 전보되었다. 정조는 기필코 대산을 불러들이고자 하여 대신(大臣)의 논계(論啓)를 따라서 대산을 무겁게 추고(推考)할 것을 명하였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길을 나서게 되었는데, 충주에 이르러서 글을 올리고 돌아가고자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다시 풍기까지 가서 병을 이유로 사퇴하였으나 역시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임금의 덕에 대해서 진달하는 아홉 가지 소를 올렸는데, 뜻을 세우고[立志], 이치를 밝히고[明理], 공경을 생활화하고[居敬], 하늘의 도리를 체득하고[體天], 간언을 받아들이고[納諫], 학문을 일으키고[興學], 사람을 잘 쓰고[用人], 백성을 사랑하고[愛民], 검박을 숭상하는 것[尙儉] 등이었다. 1781년 10월 병이 들어서 그가 자리에 누웠을 때 대산에게 글을 배우러 온 선비들로 인해 문 밖에는 항상 신발이 가득하였으며, 대산은 여전히 이들에 대한 응대를 게을리 하는 일이 없었다. 고종(考終)시의 상황은 김종섭(金宗燮)과 류범휴(柳範休)가 기록한 『고종일기考終日記』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병이 심해지자 대산의 아우 소산 이광정이 울면서 가르침을 청하였다. 그러자 대산이 말하기를 “분수에 따라서 장례를 치르도록 하라. 그리고 후학들의 향상에 노력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그러고는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서 웃옷을 입히고 띠를 두르게 한 다음 말하기를 “평소에 강의하여 논의한 것들을 부디 착실히 공부하여 연마하기 바란다.”라고 하였으며 이어 “이와 같은 일들은 다만 일상적인 것들일 뿐이다. 그러나 본래 이와 같은 일상적인 생활 속에 오묘한 이치가 들어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시중드는 이에게 명하여 요와 이불을 깨끗이 새로 깔게 하고는 붙들어 일으켜서 자리를 바꾸어 눕히게 하였다. 그런 뒤 이튿날 조용히 숨을 거두니 12월 9일(정축)이었다. 이듬해 3월 을축일에 안동부의 북쪽에 있는 학가산의 사향 언덕에 안장하였다.이상정은 18세기 영남 남인을 대표하는 성리학자로 백불암(百弗庵) 최흥원(崔興遠), 남야(南野) 박손경(朴孫慶)과 함께 영남삼로(嶺南三老)로 일컬어진 인물이다. 그는 퇴계(退溪) 이황(李滉) →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 →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 →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 밀암(密菴) 이재(李栽)로 이어지는 퇴계학을 집대성하여 소퇴계(小退溪)로 불리었다. 이상정에 의해 집대성된 퇴계학은 손재(損齋) 남한조(南漢朝) →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 →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으로 이어지는 계통과 성리학적 사유체계에 있어서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 →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으로 이어졌다.이돈우의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시능(始能), 호는 긍암(肯庵)이다.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의 고손으로, 아버지는 이수응(李秀應, 1789~1864)이고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 생원 권의도(權義度)의 딸이다. 안동부 일직현 소호리(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망호리) 가정세제(柯亭世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남다른 재질과 기골이 빼어났는데, 증숙조인 면암(俛庵) 이우(李㙖, 1739~1811)는 이돈우의 손금을 보고는 “이 아이는 반드시 문필로 세상에 이름을 떨칠 것이다.”라고 하였다. 10세 때 『소학』을 배우고 12세 때 『대학』을 배웠으며, 14세 때 『맹자』를 통독하는 등 사대부 집안의 교육 과정을 차근차근 밟아갔다. 24세 때 정시 대과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여 이듬해 조부 면재(俛齋) 이병운(李秉運, 1766~1841)의 명으로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의 문하에 들어갔다. 35세 때 숙조인 소암(所庵) 이병원(李秉遠)이 사복관에 복귀되었을 때 곁에서 4~5개월을 모시면서 교제와 출입을 삼가니 지우(知友)들이 모두 공경하고 각별하게 생각하였다. 41세 때 고산서원에서 『대산선생실기大山先生實紀』 간행을 감독하였다. 44세 때인 1850년(철종 1) 2월 증광시에 급제하여 5월에 가주서가 되었고 8월 권지승문원부정자가 되었다. 이듬해 병으로 고향에 돌아왔다. 48세에는 『주자연보朱子年譜』를 가려 뽑았고 『가학집요家學輯要』를 편찬하였다. 50세인 1855년 류치명이 호남의 지도에 유배되었는데 천리 먼 길을 따라갔다가 되돌아올 때 류치명이 절구 3수를 지어 주자 이돈우는 창설재(蒼雪齋) 권두경(權斗經)이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이 유배 갈 때 지은 「만하滿河」 4장에 차운하였다. 1860년에 사간원정언에 제수되었고 이듬해엔 홍문관수찬에서 교리로 옮겨졌다. 1867년 지평, 헌납, 장령, 사간, 응교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1870년에 남학교수에 제수되었는데, 이전에 제수받은 모든 명을 받들지 않는 것은 신하된 직분이 아니라고 여겨 어쩔 수 없이 나아가 사은숙배하였다. 이에 부수찬으로 경연이 입시하니 왕이 “먼 지방의 유신(儒臣)이 노구를 이끌고 대궐에 오셨으니 진실로 귀한 일이오.”라고 하고서는 특별히 형조참의에 제수하였다. 1874년 동부승지에 제수되었으나 지방에 있었기에 체직되었다. 1877년 응지로 「삼강구목소三綱九目疏」를 올렸는데 무릇 1만여 자에 달하였다. 1882년에 이조참판에 제수되었으나 직분에 넘치는 은혜라고 여겨 사직소를 올려 체직되었다. 1883년 용담사에서 『정재집定齋集』 간행을 지켜보았고 1884년 귀담서당에서 『태극도설太極圖說』을 강론하였다. 그해 여름 병이 나 11월에 세상을 떠났다. 이돈우는 후학 양성에도 관심을 가져 73세에는 고산서당, 74세에는 고운사, 75세에는 임천서원 등 여러 곳에서 후학들을 가르쳤다. 문집으로 『긍암집肯庵集』 20권 1책, 부록 2권 1책이 전한다. 문집 중 58세 무렵 쓴 편지 「여강란형서與姜蘭馨書」는 인의예지가 성(性) 가운데에서 나온다는 의심을 논한 것이고, 「답윤사선최식答尹士善最植」은 태극의 의심난 뜻을 논한 것이다. 59세에 태극도설(太極圖說), 음양오행(陰陽五行), 사칠동이변(四七同異辨) 등에 관련하여 『호상문답湖上問答』을 저술하였다. 기타 『용학이동조변庸學異同條辨』, 『예의변답禮疑辨答』, 『이기무한량설理氣無限量說』, 『이기체용설理氣體用說』 등의 저술이 있다.대산종택이 위치한 소호리는 망호리로도 불리는데, 마을 앞에 커다란 호수가 있고 고려 때 시랑 벼슬을 지낸 소씨(蘇氏) 성을 가진 이가 이곳에 살 때 마을 앞에 커다란 호수가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러나 조선시대 이후로는 한산이씨(韓山李氏)와 대구서씨(大邱徐氏)의 동성마을로, 북쪽으로 향한 음지마을과 남쪽으로 향한 양지마을이 있다. 여기에는 이상정의 5대조인 수은(睡隱) 이홍조(李弘祚)가 살았던 수은종택이 있다. 이홍조는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10대손으로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외손자다. 병자호란 때는 안동의 의병장이 되어 남한산성으로 출발하였으나 이미 강화한 소식을 듣고 돌아왔다. 그는 안동 입향조이기 때문에 수은종택을 한산이씨 안동종택이라고도 한다. 이 종택 사랑채에 관가당(觀稼堂)이란 당호가 걸려 있는데, 수은의 증손자이자 대산의 아버지 이태화(李泰和)의 호이다. 종택 뒤에는 수은의 불천위 사당이 있다. 수옥정은 1953년 지은 것으로, 이홍조가 당시 후학들을 강학하던 곳에 그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정자다.대산종택은 넓은 마당을 앞에 두고 뒤쪽에 안채를 배치하였으며, 안채 우측에 방형의 담을 둘러 사당 공간을 따로 마련하여 종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5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실의 구성은 정면 2칸, 측면 2칸의 대청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안방을 들이고 그 앞에 부엌을 두었다. 대청 우측에는 세로 3칸에 3개의 방이 연이어 있는데 위쪽의 방을 태실(胎室)이라 부르며 중사랑방으로 사용하였고 나머지 2칸은 제례시에 사용하는 방(빈소)이라 하였다.
참고문헌- 『긍암집肯庵集』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대산집』
- 『자치통감강목』
- 『안동오면 뵈줄게』
- 『안동의 문화유산』
- 『안동의 지명유래』
- 『안동의 명현당호 2』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 유교역사관(http://www.ugy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