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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수당(慶壽堂)

인동장씨 흥해파 칠인정문중(仁同張氏 興海派 七印亭門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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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경수당(慶壽堂)
  • 글자체 행서(行書)
  • 크기 54.0x123.0x6.9
  • 건물명 경수당(慶壽堂)
  • 공간명 인동장씨 흥해파 칠인정문중(仁同張氏 興海派 七印亭門中)
  • 서예가
  • 위치정보 포항시 흥해읍 초곡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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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수당(慶壽堂)

경수당(慶壽堂)


경수당(慶壽堂)은 경상북도 포항시 흥해읍 초곡리에 있는 칠인정(七印亭) 좌측방에 걸린 편액이다. 이 편액은 칠인정 건립 당시 붙인 이름이 아니라 1797년(정조 21) 칠인정을 중수했을 때 명명한 것이다. 이때 칠인정이라는 정자 이름은 그대로 두고 좌측방을 경수당, 우측방을 효우재(孝友齋)라 하였다. ‘경수’는 『주역』, 「곤괘 문언坤卦文言」에 “선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남은 경사가 있다.[積善之家 必有餘慶]”고 한데서 ‘경(慶)’자를, 『서경』 「홍범洪範」의 “오복의 첫째는 장수함이다.[五福 一曰壽]”라고 한데서 ‘수(壽)’자를 취하였다. 치암(癡庵) 남경희(南景羲, 1748~1812)의 「칠인정기七印亭記」에 따르면 정자의 주인인 장표(張彪)의 회갑 때 아들 네 명과 사위 세 명이 모두 참석하여 한 쌍의 회화나무에 인수(印綬)를 걸었는데, 이때 아들인 을제(乙濟)는 봉화현감에, 을하(乙河)는 운봉현감에, 을해(乙海)는 중림역찰방에, 을포(乙浦)는 청하현감에 재직하였고 사위인 류연봉(柳延鳳)은 봉상시소윤에, 이읍(李浥)은 강진현감에, 이현실(李玄實)은 예빈시주부령동정에 재직 중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정자 주인이던 장표의 장수와 그 자손의 현달을 기리는 의미에서 정자 좌측방에 경수당이라 편액한 것으로 보인다.

행서의 흐름을 살짝 살짝 이용한 운치 있는 편액 글씨다. 그러나 행서의 리듬에도 불구하고 필획의 시작과 마무리에 붓끝의 뾰족함은 감추었고 이어지는 필획에서도 필봉이 드러나지 않게 하였다. 무겁게 처리하면서도 리듬을 타는 필획의 상반되는 면모라 할까. 그 결과 큰 공간에 의한 적막함이 필세를 위축시킬 수도 있는 상황을 묘하게 반전시킨다. 마치 고요한 연못 속에서 유영하는 물오리가 파문을 내듯 울림이 있는 그런 멋진 공간이 되었다. 

(서예가 恒白 박덕준)

인동장씨 흥해파 칠인정문중(仁同張氏 興海派 七印亭門中) 소개


인동장씨(仁同張氏) 칠인정 문중은 고려 때 벽상공신에 책록된 신호위 상장군 장금용(張金用)의 후손이다. 이 집안이 흥해읍 초곡리에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고려말 조선 초기의 인물인 장표가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고려에 충절을 지키기 위해 가족을 이끌고 흥해군 도음산(禱陰山)에 은거하면서부터이다. 장표는 이곳에 초막을 짓고 농사지으며 평생 동구 밖을 나가지 않았다. 다만 고려 왕조의 국기일이 되면 산에 올라가 통곡하고 개성 쪽을 바라보며 네 번 절을 하였고, 또 항상 곡강에 이르면 고려봉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다가 슬픔을 참지 못하고 바다를 바라보며 통곡하고 돌아왔다.

아들 네 명은 모두 부친의 명에 따라 조선의 조정에 출사했으나, 새 조정에서 주는 녹봉으로 부친을 봉양하지 못하였다. 1409년(태종 9) 가을 장표의 회갑일에 네 명의 아들과 세 명의 사위는 술잔을 올리며 축수(祝壽)하였다. 그러자 장표가 정색하며 “내가 태어난 때는 고려시대였는데, 지금은 나라가 멸망하고 임금은 돌아가셨다. 왕촉의 죽음을 본받지는 못할망정 구차하게 목숨을 연장하고 있으니, 오늘의 비통한 마음은 어버이가 돌아가시던 날보다 곱절은 더한데 무엇하러 축수하느냐!”라고 하고는 눈물을 흘리며 옷깃을 적시자 모든 사람들이 감동하며 슬퍼하였다. 왕촉은 전국시대 제나라 현인으로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정숙한 여인은 지아비를 두 번 바꾸지 않는 법이다.”라고 한 뒤에 스스로 나무에 목을 매어 죽은 인물이다. 또 장표는 죽기 직전에 공복을 갖추어 입고 자손들에게 “나는 옛 복장으로 지하에서 선왕을 알현해야 한다. 너희들은 이미 새 왕조에 출사했으니 지극정성으로 임금을 섬겨 가문의 명성을 실추시키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후세 사람들은 장표가 살던 곳을 초막동, 그 마을을 사일촌이라 불렀다. 장표의 회갑일에 그의 네 명의 아들과 세 명의 사위가 술잔을 올리며 축수할 때 일곱 명 모두 인수를 차고 와서 정자 앞 한 쌍의 회화나무에 걸어 정자 이름을 칠인정이라 하였다. 인수를 걸었던 회화나무는 유허지(遺虛址)에 홀로 우뚝 서 있다가 1745년(영조 21) 비바람에 쓰러지고 말았다. 이에 13세손 장운한(張雲翰)·장유한(張有翰), 14세손 장호(張鎬)·장익(張釴)이 다시 나무를 심었다. 이후 1797년(정조 21)에 칠인정을 중수하고 좌측방을 경수당, 우측방을 효우재라 하였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69호 지정된 칠인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양쪽에 온돌방을 두고 가운데에 마루를 두었으며 앞과 양쪽에 툇마루를 두고 계자각 난간을 둘렀다. 건물은 구릉 위에 지어져 출입구에 계단을 설치하였으며 정자는 누각 형태로 건축되었다. 아래층에는 양쪽 방에 불을 지피는 함실을 마련하였고 나머지 공간은 개방되었다. 자연석으로 쌓은 외벌대 기단 위에 기둥을 세웠는데, 1층에는 두리기둥을, 2층 대청 오른쪽 기둥 2본 중 앞쪽은 팔각기둥으로, 뒤쪽은 네모기둥으로 세웠다. 나머지는 두리기둥으로 설치하였다. 온돌방 전면에는 양쪽 여닫이 세살문을, 측면에는 외짝 여닫이 세살문을 달았다. 왼쪽 방과 대청 사이에는 외짝 들어열개문과 외짝 여닫이문이, 오른쪽 방과 대청 사이에는 2분합문과 외짝 들어열개문이 설치되어 있다. 정자 내부에는 ‘칠인정기(七印亭記)’, ‘칠인정중수기(七印亭重修記)’ 등이 걸려 있다. 정자 앞에는 나지막한 구릉이 엎드려 바람을 막아 주고 구릉 앞으로 쌍계라는 계곡물이 흐른다. 쌍계수를 끌어다 연못을 만들어 소담축이라 부르며 물고기를 길렀다. 또 정자 앞에 오래된 느티나무 두 그루가 하늘 높이 치솟아 있는데, 건축 당시 심은 한 쌍의 회화나무가 1745년(영조 21) 비바람에 의해 쓰러져 고사하자 다시 심은 것이다.

참고문헌
  • 남경희, 「칠인정기」 『치암집』, 권6.
  • 장심학張心學, 「흥의위보승랑장청시계장興義衛保勝郞將請諡啓狀」 『강해집江海集』 권5.
  • 김동완, 「9. 포항 초곡리 칠인정」, 경북일보,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