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우헌(八友軒)
팔우헌(八友軒)은 경상북도 예천군 감천면 돈산리에 있는 팔우헌(八友軒) 조보양(趙普陽, 1709~1788)의 종택 별당 편액이다. ‘팔우’는 여덟 가지를 벗한다는 뜻인데, 조보양이 만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산[山]·물[水]·바람[風]·달[月]·소나무[松]·대나무[竹]·매화[梅]·국화[菊]를 벗 삼아 제자들을 기른 데서 비롯되었으며, 스스로 호를 팔우헌이라 하였다. 조보양은 여덟 벗에 대해 각각 6언(言)으로 아래와 같은 시를 지었다.
「산」밀어도 가지 않고 불러도 오지 않는데기상 깊고 온온하며 자태 높고 웅장하네가을 날 단풍이나 봄철 꽃 가릴 것 없니자연스러운 참 모습을 사랑할만 하구나
推不去呼不來氣深穩態偃蹇不關秋葉春花可愛天然眞面
「물」흘러가다보면 언젠가 바다에 이르려고잔잔하게 밤낮으로 그침 없이 흐르네여울 물 움켜다가 얼굴을 씻어보니맑은 소리 다시금 귀에 가득해지네
去去何時到海潺潺日夜不已旣浥餘波濯面更得淸音盈耳
「바람」어디로 갔다 어디서 오는지 모르지만때때로 추녀와 방안에 가득 불어오네바람 불면 소나무 대밭을 가르더니만바람 자면 거문고와 책장 조용해지더라
不知何去何來有時盈軒滿室來看松竹分披去認琴書靜寂
「달」하늘 아래 뉘 집인들 비추지 않으랴만내 집을 가장 좋아해 밝게 비추어주네백발이 분명히 난 것 두려워하지 않고홀로 명아주 걸상에 누워 책을 보네
天下誰家不照最是得意吾廬不怕白髮分明獨臥藜牀看書
「소나무」처음엔 털끝 같은 작은 싹이 돋아나더니마침내 구름을 뚫고 하늘을 떠받치네명당을 지탱하는 기둥 되지 않는다면구름 학이 찾아와 머물 곳이 되리라
始從毫末微妙終得拂雲干霄若不支了明堂便要雲鶴來巢
「대」위수 가의 대숲은 바라지 않고정원의 몇 그루라도 사랑스럽네세모에도 그 빛깔 변하지 않아백이숙제의 맑은 풍모 지니고 있네
不須渭上千畝自愛園中數叢歲暮不改顔色留帶采薇淸風
「매화」그윽한 집 가까이 너를 심었으니어느 곳 풀인들 향기 품지 않으랴해마다 한 차례 봄비가 내리면처마 따라 거닐며 함께 웃자하네
栽汝故近幽軒何所獨無芳草年年一番春雨要我巡簷共笑
「국화」굴원의 저녁상 도연명의 술잔 속에 띄운 건지취를 취한 것이지 먹으려는 것이 아니네그러니 그저 입과 배를 채우려고 한다면명아주 몇 가지와 콩 몇 이랑이나 심게나
屈餐英陶汎杯取其趣非爲食若使只爲口腹合種數畝藜藿
편액의 글씨는 해서로 쓰였다.
예천 한양조씨 팔우헌종택(醴泉 漢陽趙氏 八友軒宗宅) 소개
팔우정이 있는 돈산리는 예천군의 동북쪽 끝으로 영주시 장수면 성곡리와 마주하며 시·군 경계를 이룬다. 돈산리는 원래 안동부 감천현 지역이었는데, 1895년 지방관제 개정 때 예천군 감천면에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합 때 돈답동, 산동, 유동 일부를 병합하여 돈산리라 하였다. 돈산리는 돈답, 산골 등의 자연촌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조보양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천곡서당(泉谷書堂)이 위치한 곳은 산골마을이다. 산골[山谷]은 산동(山東)이라고도 불린다. 영조 때 조보양이 유동에서 고방산(高芳山)[주마산走馬山] 동쪽에 터를 잡아 임천(林泉)을 즐기던 곳이라 하였다. 입구에 있는 마을은 조보양의 문도(門徒)가 천곡서당을 창건했었다하여 독서동(讀書洞)이라 하였는데, 조선말에 마을 중간으로 옮겼다.돈답(敦畓)은 돈닷, 돛단, 돈전(敦田)이라고도 불린다. 300여 년 전 김해김씨가 터를 잡은 마을로 10여 가구가 살며 마을 가운데의 지형이 낮아서 물이 고인 형국이다. 또 마을이 마치 돛단배의 형국이라고 하여 돛단이라 했다. 한양조씨(漢陽趙氏)는 고려 후기 첨의중찬을 지낸 조지수(趙之壽)를 시조로 한다. 대대로 관료를 배출하여 서울에서 가문이 번창하였는데, 중종 때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한양조씨 가문은 화를 입을까 우려해 전국으로 흩어졌다. 이때 조지수의 9세손 조종(趙琮)은 처가가 있던 영주로 이거하였다. 조보경은 조종의 8세손으로, 자가 인경(仁卿), 호는 팔우헌, 본관은 한양이고, 예천군 감천면 돈산리에서 태어나 성장하였다. 증조부 조명한(趙鳴漢)은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에게 수학하였고, 조부 조봉징(趙鳳徵)은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에게 수학하였다. 부친은 조원익(趙元益)이고, 모친은 선성이씨(宣城李氏) 이기만(李基晩)의 딸이다. 조보양은 소은(小隱) 이경익(李景翼), 나졸재(懶拙齋) 이산두(李山斗), 청대(淸臺) 권상일(權相一)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747년 39세에 생원·진사시에 입격하고, 1773년 65세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조보양은 5형제 가운데 4형제 조규양(趙葵陽, 1707~1776)·조보양·조의양(趙宜陽, 1719~1808)·조몽양(趙夢陽, 1722~1790)과 조규양의 아들 조석회(趙錫晦, 1727~1802)가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조보양과 조석회는 또 문과에 급제하여 오련쌍계(五蓮雙桂)로 영남에 이름을 떨쳤다. 1773년 예조좌랑에 제수되었는데, 권신 정후겸(鄭厚謙)이 예조참판으로 있었다. 정후겸은 조보양이 기영례(祇迎禮 하관이 상관의 행차를 나가서 맞이하던 예식)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조보양의 하인을 매질하였다. 이에 조보양은 “이 사람의 위세가 하늘을 불태우겠구나! 사류를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것이 이와 같도다. 이것이 군자는 기미를 보는 때이다. 또 백발의 낭관이 젖비린내 나는 어린아이에게 욕을 당했는데, 다시 몹시 구차하여 녹을 생각한다면 남에게 종처럼 굽실거리며 비굴하게 알랑거리는 부류가 될 뿐이다.”라고 분개하며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이후 1781년 병조 좌랑에 제수되었으나 6일 만에 낙향하고는 다시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조보양은 고향에서 부모를 봉양하는 한편 물·바람·달·소나무·대나무·매화·국화 이 여덟 가지를 묶어서 팔우(八友)라 부르며 자신의 당호로 삼았다. 조보양의 부인은 파평윤씨(坡平尹氏) 윤덕기(尹德基)의 딸이다. 3남 1녀를 두었다. 저술로 7권 4책의 『팔우헌집八友軒集』이 있다.팔우헌종택은 안채, 천고서당, 팔우헌의 3구역으로 나눌 수 있다. 솟을대문으로 들어가면 동편에 천곡서당이 있다. 천곡서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팔작지붕 기와집이다. 평면은 어간의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둔 중당협실형이다. 전면에는 반 칸의 툇간을 두었고, 전면 기둥의 하부에는 하층주를 세워 누마루를 이루었다. 구조는 오량가(五樑架)의 홑처마집이다. 안채는 솟을대문과 대칭으로 있으면서 천곡서당의 서북쪽에 있다. 5칸 규모의 팔작지붕 기와집이다. 팔우헌은 1970년에 천곡서당의 동북쪽에 중건했으며,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기와집이다.
참고문헌- 조보양, 『팔우헌집八友軒集』.
- 안동민속박물관, 『안동의 명현당호』, 안동민속박물관, 2000.
- 예천문화원, 『예천누정록』, 예천문화원, 2010.
- 황동권, 「팔우헌 조보양의 골동록 연구」, 대동한문학회 하계학술대회 발표요지집, 2013.
- 안동대학교 퇴계학연구소, 『퇴계학자료총서해제』(제5차분) : 임노직 저, 『팔우헌집 해제』, 2004.
-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 목판아카이브(http://mokpan.ugyo.net/hyunp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