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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애(蘆厓)

전주류씨 수곡파 용와종택(全州柳氏 水谷派 慵窩宗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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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노애(蘆厓)
  • 글자체 예서(隸書)
  • 크기 21.0x39.5x1.6
  • 건물명 노애(蘆厓)
  • 공간명 전주류씨 수곡파 용와종택(全州柳氏 水谷派 慵窩宗宅)
  • 서예가
  • 위치정보 박곡리-구미 해평면 일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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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애(蘆厓)

노애(蘆厓)


노애(蘆厓)는 1784년 경상북도 안동시 임동면 박곡리에 류도원(柳道源, 1721~1791)이 기거하던 집의 편액으로, 1987년 임하댐 건설로 구미시 해평면 일선리로 옮겼다. 류도원이 지은 「노애토실기蘆厓土室記」에 이에 대한 설명이 자세하여 소개하기로 한다. “죽은 벗 난곡(蘭谷) 김탁이(金濯以, 강한(江漢)가 번번이 나에게 말하곤 하였다. ‘평소 토담집 하나를 지어 책 수천 권을 소장하고 그 가운데 거처하면서 여생을 보내고자 하지만 힘이 미치지 못합니다.’ 내가 이를 듣고 기뻐하여 그렇게 해보고자 하였으나 또한 겨를을 내지 못하였다. 지난 갑진년(1784) 겨울 시골사람들이 풍수설에 휘둘려 종종 집을 옮기는 이가 있었는데, 나 또한 시끄러운 곳을 피하여 조용한 곳으로 들어갈 생각이 있었다. 노봉(蘆峯) 아래 집터를 정하고 모임을 만들어 몇 년간 기거할 계획을 세웠다. 약간의 서책도 의당 가져가야 하는데, 초가집에 책을 소장하면 실로 자칫 화재가 일어날지 모른다는 우려가 있었다. 이에 토담집 둘을 지어, 하나는 서실(書室)로 삼고 하나는 식솔이 거처하게 하였다. …… 그곳에 거처한 지 두 해가 지났는데, 대체로 겨울은 따뜻하고 여름은 시원하였으며, 낮에는 조용하고 밤에는 적막하였다. 이에 노인은 요양하는 곳으로, 젊은이들은 독서하는 곳으로 삼기에 꼭 맞았다. 아, 사람들은 제각기 좋아하는 바가 있고 제각기 뜻하는 바가 있다. 뜻이 번화한 데 있는 자는 반드시 조용하고 궁벽한 곳을 좋아하지 않고, 뜻이 큰 누대에 있는 자는 반드시 누추한 방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의 뜻을 생각해보면 반드시 번화한 것을 사모하는 것은 아니라서 끝내 조용하고 궁벽한 곳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니, 이는 정황이 몰고 간 것이라 하겠다. 또 반드시 큰 누대에 뜻을 둔 것은 아니어서 갑작스럽게 누추한 방으로 나아가게 된 것이니, 이는 가난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정황으로 인해 그렇게 몰리고 가난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이에 순응하여 이를 편안하게 여긴다면, 여기가 곧 몸을 편안히 하고 천명을 받들면서 살 땅이요, 그 가운데 절로 하나의 편안한 집이 있게 되는 것이다. 저 토담집이 좋고 나쁜 것이나 거처하기에 편하고 불편한 것을 또 어찌 따질 만하겠는가? 내가 옛 성현들을 보면 현재 지내는 자리에 나아가 평범하게 일상을 즐기는 것이었다. 이윤(伊尹)이 시골에 거처하면서도 그 즐거워한 바는 요순(堯舜)의 도였고, 안연(顔淵)이 누추한 골목에 살면서도 그 즐거워한 바는 박약(博約)을 잘하는 일이었다. 나는 젊어서 문장을 일삼고 과거공부에 빠져서 명예를 이룬 바가 없었다. 백발이 이미 어지럽게 되어서야 비로소 머리를 돌리고 발길을 돌려 화려함을 물리치고 실질로 나아가게 되었다. 스스로 황량하고 적막한 물가에 나아가는 것을 가지고 노년을 잘 마무리할 계책으로 삼았으니, 감히 옛사람의 즐거움에 빗대어 망령되이 떠들 수는 없지만 또한 그 가운데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는 또 “동네 이름이 상박곡(上朴谷)이었으나 초목(樵牧)하는 이들이 노애(蘆厓)라 별칭하였다.”고 하였다. 편액의 글씨는 작자 미상의 예서체이다.

예서 두 자로 쓴 아름다운 편액이다. 글귀도 이쁜 노애(蘆厓) ‘갈꽃이 있는 언저리’ 정도로 풀이할 수 있다. 성근 듯 긴밀하지 못한 구성이 오히려 운치 있다. 졸박(拙朴)이라 한다. 졸함이 운치 있을 때 우리는 대교약졸을 상상해볼 수 있다. 긴밀함이 극에 달하면 성글게 되는 경지, 긴밀함 보다 더 운이 있는 경지, 그것이 바로 拙이다. 농묵을 머금은 붓이 한지를 따라가며 두툼한 필획을 만들어낸다. 형태의 의미보다 먹빛에 마음을 빼앗긴다. 작은 편액이 먹으로 가득하다.

(서예가 恒白 박덕준)

전주류씨 수곡파 용와종택(全州柳氏 水谷派 慵窩宗宅) 소개


류도원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숙문(叔文), 호는 노애(蘆厓)이다. 생부는 양파(陽坡) 류관현(柳觀鉉, 1692~1764)이었으나, 뒷날 백부 류승현(柳升鉉, 1680~1746)에게 입양되었다.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의 문인으로, 재주가 뛰어나 네 살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동생과도 우애가 매우 돈독하였다. 일찍이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더는 과거를 보지 않았다. 학행이 널리 알려져 감사의 추천으로 명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한 지 3일 만에 병을 이유로 사직한 뒤 고향에 돌아가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1790년(정조 14) 노인직으로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존심과 함양의 실천적 수행으로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전념하였다. 성격이 매우 청백하여 평소 남들과 함부로 어울리기를 꺼려하였다고 한다. 생활이 매우 규범적이어서 십계(十戒), 삼잠(三箴) 등의 경구를 벽에 붙여 놓고 항상 애송하며 마음을 닦는 데 주력하였다. 주석학에 밝았으며 많은 저술을 남겼다. 저서로는 『퇴계선생문집고증退溪先生文集攷證』, 『사례편고四禮便考』, 『일경록日警錄』, 『동헌집록東獻輯錄』, 『노애집蘆厓集』이 전한다.

전주류씨 무실파는 시조 류습(柳濕)의 후손으로, 6세손 류윤선(柳潤善, 1500~1557)이 세거지인 서울 묵사동에서 처가인 영주(榮州)로 이거하였고, 장남 류성(柳城, 1533~1560)이 안동 천전리에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청계(靑溪) 김진(金璡)의 사위가 되면서 영주에서 무실로 이거하여 이곳에 터전을 형성하기 시작하였으며, 이후 조선 후기까지 학문‧덕행‧충효 등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문집을 남긴 인물만 120여 명에 이른다. 불천위(不遷位)가 5명(백졸암 류직, 용와 류승현, 삼산 류정원, 호고와 류휘문, 정재 류치명), 문과급제자가 10명, 무과급제제가 5명, 생원진사 33명, 음사로 벼슬한 인물이 39명이었다. 특히 류경시(柳敬時)와 류승현(柳升鉉)은 청백리에 선정되었고 류관현과 류정원은 『목민심서』에 수록될 만큼 치적이 있었다. 류성은 류복기(柳復起)와 류복립(柳復立) 두 아들을 두었는데, 류복기는 학봉 김성일과 함께 진주성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순국하였다. 류복기는 우잠(友潛)‧득잠(得潛)‧지잠(知潛)‧수잠(守潛)‧의잠(宜潛)‧희잠(希潛)‧시잠(時潛) 등 일곱 아들을 두었는데, 류우잠의 증손인 류봉시(柳奉時, 1654~1709)가 무실에서 분가하여 근처 위동에 터전을 잡았으며 그의 두 아들인 용와(慵窩) 류승현(柳升鉉)과 양파(陽坡) 류관현(柳觀鉉, 1692∼1764) 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함에 따라 재지기반이 확고해졌다. 류승현은 박실[朴谷]에 터를 잡아 박실의 파조가 되었고, 류관현은 한들[大坪]에 터를 잡아 한들의 파조가 되었다. 그리고 류승현의 아들 노애(蘆厓) 류도원(柳道源)과 호곡(壺谷) 류범휴(柳範休), 그리고 수정재(壽靜齋) 류정문(柳鼎文) 3대(代)가 학문과 덕행으로 천거됨으로써 영남의 명문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전주류씨 세거지였던 무실과 박실 마을은 안동시 임동면에 위치해 있으며, 임동면은 원래 임하현에 속한 땅으로 1895년 임동면으로 명칭을 바꾸어 안동군에 편입되었다. 지명은 임하(臨河)의 동쪽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1914년 3개의 동리가 분리되어 임하면이 되었다. 이후 1974년 일부 행정구역의 개편이 있었으며 1995년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아기산의 지맥을 등에 지고 임동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무실과 박실 마을은 영남을 대표하는 반촌이었으나, 임하댐 건설로 인하여 400여 년 동안 지켜온 삶의 터전이 물속에 잠기게 되어 부득이 1987년을 전후하여 구미시 해평면 일선리로 이거하게 되었다.

현재 노애 편액은 용와 편액 옆에 걸려 있다. 용와종택은 안채와 사랑채, 광채 및 사각문으로 구성된 ㅁ자형 집이다.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2칸 반의 ㅡ자형 집으로 폐쇄형의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측에 2칸 온돌방을 두고 1칸 반의 부엌을 연결시켰다. 안동 지방의 양반 가옥 대부분이 ㅁ자 형인데 반해 여기서는 튼 ㅁ자형 배치여서 광채가 별도로 마련되었다. 사랑채는 2칸 온돌방과 폐쇄형 마루방을 두었으며 앞쪽으로 툇마루를 두었다. 침간정은 별당 또는 사당 제청의 기능을 수행하는 용도의 3칸 겹집이다. 용와종택 및 침간정은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8호로 지정되어 있다.

참고문헌
  • 柳道源, 「蘆厓土室記」, 『蘆厓集』 卷7.
  • 송지향, 『안동향토지』(대성문화사, 1983)
  • 『안동의 문화유산』 (안동문화원, 1999)
  • 서주석, 『안동문화산책』(이화문화출판사, 2001)
  • 한국학중앙연구원 – 디지털안동문화전자대전
  • 안동민속박물관, 『安東의 懸板』Ⅰ, Ⅱ, 2009.
  •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 Ⅱ, 2015.
  •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 유교역사관(http://www.ugy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