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주메뉴 바로가기
  • 편액
  • 공간별 보기

양정당(養正堂)

광산김씨 양정당종가(光山金氏 養正堂宗家)

52.7x85.2x6.3 / 해서(楷書)MORE

의견달기 URL
목록 이전 기사 다음 기사
  • 자료명 양정당(養正堂)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52.7x85.2x6.3
  • 건물명 양정당(養正堂)
  • 공간명 광산김씨 양정당종가(光山金氏 養正堂宗家)
  • 서예가
  • 위치정보 도생서당
  •  
r0076_1.jpg
양정당(養正堂)

양정당(養正堂)


양정당(養正堂)은 김부신(金富信, 1523∼1566)이 건립한 정자의 현판이다. 이 정자는 광산김씨(光山金氏)의 유적들이 모여 있는 오천군자리 유적지 내에 있다. 원래는 낙동강에 인접한 오천리(외내)에 있었으나 안동댐 건설로 인해 1974년 지금의 위치로 이건했다. ‘양정’이란 『주역』, 「몽괘蒙卦」의 “몽(蒙)의 도(道)로써 바른 덕성을 기르는 것이 곧 성인(聖人)의 길에 들어가게 하는 공(功)이 된다. [蒙以養正 聖功也]”라고 한 것에서 따왔다. 편액의 글씨는 김부신의 스승인 퇴계 이황이 당호를 지어 주고 직접 해서체로 써 주었다.

해서(楷書)란 문자의 법(法), 표준을 뜻한다. 문자의 법에 따라 분명하고 확연하게 쓴 서체다. 흔히 정자체라 하며 글씨쓰기를 배우는 교본이 대게 이런 정자체이다. 이 편액은 바로 그 시기 표준과 법을 보여주는 반듯한 정자체의 전형이다. 그러나 세 글자간의 대소 관계를 형성하였고 필획에는 젊은이의 귀티가 있다. 교본을 충실히 따른다 하더라도 이처럼 서사자의 면모는 부지불식간에 드러난다. 

(서예가 恒白 박덕준)

광산김씨 양정당종가(光山金氏 養正堂宗家) 소개


양정당이 자리 잡은 오천리는 구한말 예안군 읍내면 지역으로 외내, 오천(烏川)이라 하였다. 외내는 마을 앞을 흐르는 시내가 ‘한줄기로 맑은 개울’이었다는 의미이다. 혹은 물이 맑을 때 물 밑에 깔린 돌을 멀리서 보면 검게 보인다고 하여 오천이라 한다. 1914년 무양동 일부와 안동군 북선면의 외감애동 일부, 동후면의 나소곡리 일부를 병합하여 오천동·오천리라 하여 예안면에 편입되었다가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오천리는 3개 리로 구분되어 있다. 오천 1리는 군자리와 방잠의 일부, 오천 2리는 조마리, 이사, 우무실마을이고, 오천 3리는 양정, 신역, 당고개, 지삼마을로 되어 있다. 군자리는 근래에 조성된 광산김씨오천유적지가 있는 곳이다. 광산김씨 예안파의 600년 전통 마을이 1974년 안동댐 건설로 수몰되자 2km 위인 현 위치로 종택, 묘우, 정자, 강당 등의 중요 건물들만 이건하였다.

광산김씨는 원래 전라도 광산에서 고려 후기에 중앙에 진출하였는데, 그 한 파가 경상도 안동으로 와서 풍천의 구담, 와룡의 가구, 예안의 오천 등 세 곳에 뿌리를 내렸다. 오천의 입향 시조는 농수(聾叟) 김효로(金孝盧, 1454~1534)로 풍산 도양골에 살다가 연산군 때 이곳으로 옮겨 정착하였다. 그의 아들 운암(雲巖) 김연(金緣, 1487~1544)과 탁청정(濯淸亭) 김유(金綏, 1491~1555)는 중종 때 명신으로 가문이 융성해지는 데 기틀을 마련하였다. 군자리로 불리게 된 것은 안동부사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가 “오천마을은 주민들 모두가 군자 아닌 사람이 없구나.”라고 말한 데서 유래하였다. 특히 오천칠군자는 김연의 아들인 후조당(後彫堂) 김부필(金富弼), 읍청정(挹淸亭) 김부의(金富儀), 김유의 아들인 산남(山南) 김부인(金富仁), 양정당(養正堂) 김부신(金富信), 설월당(雪月堂) 김부륜(金富倫), 김효로의 외손인 봉화금씨(奉化琴氏) 일휴당(日休堂) 금응협(琴應夾), 면진재(勉進齋) 금응훈(琴應壎) 등의 7인을 가리키는 말로, 모두 김효로의 친손과 외손들이다.

양정당의 주인 김부신은 자가 가행(可行), 호는 양정당(養正堂),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부친 김유와 순천김씨(順天金氏) 김수홍(金粹洪)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1558년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김부신의 3형제가 이황에게 상례(喪禮)에 대해 질의하고 이황이 답한 내용이 류장원(柳長源)의 『상변통고常變通攷』에 수록되어 영남의 예의 행용에 준거가 되었다. 이황은 김부신의 병을 걱정하며 편지를 보내 위로하기도 했다.

명성은 형제와 사마시를 합격했건만
세상을 살아간 건 사십사년 뿐이네
재주 감추고 살아가길 꺼리지 않으면서
오래도록 병석에서 견뎌왔었네
꽃다운 형제들 길이 즐거움 버렸고
사제 간의 향기는 인연 다 못 마쳤네
가장 가슴 아픈 일은 영결하는 말을
분명하게 어떤 사람이 전해준 것이네

名薦芙蓉榜
人間卌四年
不嫌身晦約
叵耐病纏綿
棣萼長辭樂
芝蘭未畢緣
最傷終訣語
歷歷在人傳

이 시는 44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김부신을 애도하는 이황의 만시이다. 형제와 나란히 사마방목에 이름을 올렸지만 벼슬살이를 하지 않고 초야에서 지낸 김부신의 일생을 서술하고, 그의 죽음이 형제들은 물론 사제 간에도 인연을 오래 잇지 못한 것에 깊은 슬픔을 표현하였다. 아들은 설애(雪厓) 김강(金堈)과 극재(克齋) 김평(金坪)이다. 김부신의 묘소는 안동시 와룡면 나소리 한천산에 있다.

양정당은 정면 4칸, 측면 1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집으로 약 1m 높이의 기단 위에 자연석 주추를 놓고 각주를 세웠다. 공간 구성은 마루와 방으로 구분하여 중앙 2칸은 마루를 놓았고, 좌우의 2칸은 방을 꾸몄다. 마루는 바닥을 우물마루로 깔고 천장은 연등천장으로 구성하였다. 마루와 양쪽 방 사이에는 벽을 만들지 않고 불발기창이 있는 들어열개 4분합문을 달아 필요시에 모두 들어 올려 사용할 수 있다. 마루 전면의 각 칸은 벽을 만들지 않고 들어열개띠살 4분합문을 달았으며, 뒷벽은 각각 판벽에 여닫이골판문을 달았다. 좌우의 방은 전면에 쌍여닫이 띠살문을, 측면에 여닫이 띠살문을 달았다. 둘레는 담을 둘렀고, 일각 대문을 통해 출입한다.

참고문헌
  • 이황, 『퇴계집』.
  • 광김예안파숭원회, 『안동 외내 군자리』, 토우, 2000.
  • 안동민속박물관, 『안동의 현판』, 2004.
  • 권오영, 「오천 7군자의 학문활동과 사상」, 『국학연구』 제30집, 한국국학진흥원,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