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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벽당(雙碧堂)

광산김씨 쌍벽당종택(光山金氏 雙碧堂宗宅)

44.6x106.6x8.2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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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쌍벽당(雙碧堂)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44.6x106.6x8.2
  • 건물명 쌍벽당(雙碧堂)
  • 공간명 광산김씨 쌍벽당종택(光山金氏 雙碧堂宗宅)
  • 서예가
  • 위치정보 봉화읍 거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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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벽당(雙碧堂)

쌍벽당(雙碧堂)


쌍벽당(雙碧堂)은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거촌리 쌍벽당 김언구(金彦球)의 종가의 별당 현판이다. 광산김씨(光山金氏) 김균(金筠, 1482~?)이 거촌리에 입향하면서 이곳 황무지에 나무 심는 것을 중시하였다. 그의 아들 김언구(金彦球)도 선조의 유지를 계승하여 뜰에 반송과 대나무를 심어 놓고 지냈는데 ‘항상 푸른빛[碧]을 지니며 그 절개를 바꾸지 않는 두 가지[雙] 나무’인 소나무와 대나무에 의탁하여 ‘쌍벽’이라 호를 지었다. 박선장(朴善長, 1555~1616)은 쌍벽당에 대한 시를 지어 김언구의 지향에 대해 칭송하였다.

쌍벽당을 읊는다
그대에게 묻노니 쌍벽에서
무엇 취해 이곳에 머무셨나
낭간의 골격을 사랑했으니
금석 같은 의표 볼 수 있네
겨울눈이 눌러도 기상 솟구쳤고
밤 서리가 말려도 빛깔 빼어났네
보통 사람들 근접치 못하게 하니
속인의 칼에 베일까 걱정해서네

題雙碧堂
問君雙碧上
何取此逍遙
爲愛琅玕骨
要看鐵錫標
氣凌冬雪壓
色秀夜霜凋
勿許凡眸近
恐逢俗子刀

쌍벽당에는 박선장의 이 시판도 걸려 있다. 쌍벽당 편액 글씨는 홍사제(洪思悌, 1539~?)가 해서로 썼다.

자체는 반듯하고 필획은 굳세다. 내부필획의 간격도 균일 엄정하고 외부 자간 공간도 평담하다. 맑은 기운이 글자 속 행간에 가득 서려있다. 시작하는 기필 부분에 과장된 듯한 형태는 당시 편액 글씨의 한 형식으로 보인다. 雙에서 마지막 파책의 끝처리, 碧에서 石의 좌 삐침 처리가 약간 어색한 점이 옥의 티다.

(서예가 恒白 박덕준)

광산김씨 쌍벽당종택(光山金氏 雙碧堂宗宅) 소개


쌍벽당이 있는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거촌리는 죽헌(竹軒) 김균(金筠)이 사화를 피해 낙향하면서 자리를 잡은 곳이다. 마을 앞에는 내성천에서 흘러 들어온 지류가 흐르고, 종택 양옆의 높은 산은 마을 사람들로부터 각각 백호뜽, 청룡뜽이라고 불린다. 봉화읍은 조선시대에는 안동부에 딸린 내성현이었다. 1895년 순흥군 내성면이 되었다가 1906년 봉화군 내성면으로 분할되었다. 1914년 봉화군의 서면(2개동리)·북면(2개동리)·물야면(2개동리)과 순흥군의 내성면(10개동리)·화천면(5개동리)·수민단면(5개동리)을 합쳐 새로운 면을 만들어 봉화군에 편입시키고 그대로 내성면이라고 하였다. 1956년 군청 소재지임을 고려하여 봉화면으로 명칭을 고쳤고 1979년 읍으로 승격하였다. 거촌리는 ‘지형이 게처럼 생겼다’고 해서 게섬 또는 해도라고도 불렸다. 거촌역이 있는 마을에 이르면 그곳에 쌍벽당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광산김씨가 봉화읍 거촌리에 정착한 과정을 살펴보면 담암(潭庵) 김용석(金用石, 1453~?)이 1498년 무오사화로 스승 김종직(金宗直)과 동문인 김일손(金馹孫), 정여창(鄭汝昌), 김굉필(金宏弼) 등이 화를 당하자 부인 순천김씨(順天金氏)의 고향인 안동 구담으로 내려왔다. 벼슬에 대해 회의를 느낀 김용석은 “성균관 진사만은 아니 할 수 없으나, 대과에는 참여하지 마라.”고 하여 관직에 나서지 말라는 유훈을 남겼다. 이 유훈은 엄격하게 지켜져 김용석의 셋째 아들이 성주목사를 지냈는데, 무과 역시 벼슬이라고 하여 족보에서 제척(除斥) 당하기까지 했다. 김용석은 네 아들을 두었는데, 둘째가 죽헌(竹軒) 김균(金筠)이다. 그는 장인의 권유로 봉화의 거촌리에 자리를 잡았으니, 바로 거촌리에 거주하는 광산김씨 마을의 입향조이다. 김언구는 바로 김균의 맏아들로, 자는 대명(大鳴), 호는 쌍벽당이다. 1531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조부의 유지에 따라 학문에 전념하며 후진을 양성하는 데 힘을 쏟았다.

쌍벽당은 크게 안채와 사랑채인 하루와 송죽헌, 별당인 쌍벽당, 사당의 네 구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쌍벽당은 1566년에 지은 후 1652년에 증축, 1892년에 개축하였다. 살림채는 1450년에 지었고, 1864년에 사랑채를 보수하였다. 7칸 규모의 대문채를 지나면 넓게 펼쳐진 사랑마당과 서쪽의 별당마당이 보인다. 사랑마당 왼쪽에는 2칸 행랑채가 있는데 예전에는 외양간이었다. 사랑채 왼쪽에는 5칸 규모의 중문채가 있다 중문을 들어서면 6칸 대청이 있는 안채가 보인다. 안채 서쪽에 쌍벽당이 있다. 쌍벽당 뒤로 작은 연못과 수목이 어우러진 곳을 지나 가장 높은 곳에 담장으로 둘러싸인 3칸 규모의 사당이 있다. 이처럼 넓은 땅의 가장 좋고 높은 곳에 사당을 배치하고 사당 아래 서쪽에는 사랑채를, 동쪽에는 안채를, 사랑채 앞에 대문채를 배치한 것은 전형적인 사대부가의 배치 구성이다. 안채는 대청을 중심으로 양 옆에 5칸씩을 덧달아 낸 자형 구조이다. 동쪽 날개채에는 1칸 도장방 2칸 안방, 1칸 부엌이 있고 후원을 드나들 수 있는 문이 있다. 서쪽 날개채에는 1칸 고방과 2칸 상방이 있으며 사랑채와 이어진다. 몸채는 2평주 5량가이고, 양 날개채는 3평주 5량가로 홑처마 맞배지붕이다. 대청은 연등천장으로 하고 대청 양 옆의 방은 고미반자로 마감하였다. 대청 후면에는 고식 수법인 중간 문설주가 있는 널판문이 있다. 안채 가운데에는 굵은 목재를 원형으로 다듬어 기둥으로 사용해 육중하고 장엄하다. 또한 목재를 치장하지 않아 소박하고 간결한 느낌이다. 높은 기단 위에 전퇴를 둔 6칸 홑처마, 팔작지붕인 사랑채는 2칸 사랑방과 1칸 마루방으로 구성된다. 사랑방 앞에는 전퇴가 있으며, 사랑방 오른쪽으로 한 칸을 내밀어 사랑대청을 마련했다. 쌍벽당은 8칸 규모의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2칸 방과 6칸 마루가 있다. 기둥머리에 주두를 놓고 대들보에서 삼분변작하고 소로와 첨차를 갖추고 장여와 도리를 구성한 5량가이다. 매우 정교하게 초각한 보아지와 원형화반, 운형대공을 사용하였다. 마루에는 계자난간을 두르고 후면에는 우리판문을 달았으며 우측 벽면은 판벽으로 마감하였다. 방에는 이분합만살문을 달았다. 쌍벽당은 1984년 국가민속문화재 제170호로 지정되었다.

참고문헌
  • 문화재청 근대문화재과·(주)길건축사사무소, 『한국의 전통가옥 기록화 보고서』, 문화재청 근대문화재과, 2014.
  • 목심회, 『우리 옛집(경상도)』, 도서출판 집, 2015.
  • 청량산박물관, 『봉화의 누정기』, 봉화군, 2015.
  • 김은수, 「경상북도 전통주택 별당의 경(景) 디자인 원리」, 경상대학교 건축공학과 박사학위논문, 2016.
  •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 유교역사관(http://www.ugyo.net)
  • 문화재청(http://www.cha.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