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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정재(養正齋)

반남박씨 판관공파 소고문중(潘南朴氏 判官公派 嘯皐門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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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양정재(養正齋)
  • 글자체 행서(行書)
  • 크기 32.5x73.0x6.7
  • 건물명 양정재(養正齋)
  • 공간명 반남박씨 판관공파 소고문중(潘南朴氏 判官公派 嘯皐門中)
  • 서예가
  • 위치정보 영주시 가흥1동 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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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정재(養正齋)

양정재(養正齋)


양정재(養正齋)는 경상북도 영주시 가흥 1동 한정에 있던 한천서원(寒泉書院) 숙사의 편액이다. ‘양정’은 바른 도리를 기른다는 뜻으로, 『주역周易』, 「몽괘蒙卦」 ‘단사(彖辭)’에 “어릴 때 바른 도리를 기르는 것이 성인이 되는 공부이다.[蒙以養正 聖功也]”라고 한 것에서 취하였다. 『성호사설星湖僿說』에도 “제왕은 어렸을 때부터 바른 길로 교양한다.[帝王蒙養]”라고 하였다. 한천서원은 1786년 지역 유림에 의해 창건되어 장수희(張壽禧), 오운(吳澐), 박회무(朴檜茂), 박종무(朴樅茂)를 제향하였다. 본래 이들의 신위는 산천서원에 제향되었다가 오운이 세웠던 산천서당 자리에 1786년 한천서원을 세우고 분봉되었다. 산천서당의 유생이 지은 오운의 제문 가운데 “산천에 재실 세워 양정이라 당호했네[立齋山泉 養正名堂]”라고 한 것을 살펴보면 산천서당의 당호가 양정이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한천서원 옛 터에는 ‘한천서원사선생유허비’만 세워져 있다. 글씨는 행서로 쓰였다.

양(養)에서 良은 전서자형을 변환한 형태를 선택하는 등 문자의 변환을 한껏 운용하였다. 덕분에 고풍스럽다. 필획이 강건하면서도 내면의 리듬감을 품고 있다. 마지막 재(齋)의 상부에서 그 리듬이 표출된 점은 어쩔 수 없는 감정의 자연스런 표현이다. 절제된 감정과 고조된 감정의 표현이 이와 같다. 드러내지 않는 당시 선비의 감정 변화를 보는 듯하다. 

(서예가 恒白 박덕준)

반남박씨 판관공파 소고문중(潘南朴氏 判官公派 嘯皐門中) 소개


한천서원이 있던 영주시 가흥동은 동쪽으로 상망·영주·휴천동을 경계로 하고 있고, 서북부로는 안정면과 봉현면, 서남부는 장수면과 문수면을 접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영천군 가흥면 지역이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하줄동·대사동을 병합하였고, 가흥면사무소가 있었으므로 가흥리라 하고 영주군 영주읍에 편입하였다. 그 후 1980년 영주시 승격에 따라 일부 지역을 편입시켜 가흥 1·2동으로 구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가흥동은 동으로 낙동강 지류인 서천이 흐르고 북은 서천 지류인 남원천과 죽계천이 합류하여 넓은 충적평야를 이루며, 서남쪽은 구릉형 산지로 서천 연안에 경지와 가옥이 많이 분포되어 있다.

양정재 현판을 소유하는 반남박씨(潘南朴氏) 소고문중(嘯皐門中)은 고려 고종 때 반남현(지금의 나주시 반남면)의 호장(戶長)을 지낸 박응주(朴應珠)의 후손이다. 대대로 관료를 배출한 반남박씨가는 박응주의 9세손 박숙(朴䃦)이 1458년 고모부인 안동부사 이중(李重)을 따라 서울에서 안동으로 내려왔고, 당시 안동에서 일가를 이루던 능성구씨(綾城具氏) 집안에 장가들면서 안동에 터를 내렸다. 박숙은 세 아들 박침(朴琛), 박진(朴璡), 박형(朴珩)을 두었는데 박침과 박형이 1500년대 영주로 이거하여 정착하였다. 박침은 처음 조제(지금의 문수면 조제리. 속칭 잔도리)에서 살았으며, 그의 손자 박담수(朴聃壽)가 녹동(지금의 장수면 호문리) 방상골에 옮겨 살았고, 박담수의 증손인 박내길(朴來吉)과 박처길(朴處吉)이 1637년 고랑골(지금의 장수면 권선리. 일명 난곡)에 다시 자리 잡았다. 박침의 둘째 아들인 박소장(朴紹長)은 조제의 동쪽 마을인 멀음(지금의 문수면 원암리)에 자리 잡았고, 박소장의 6대손 박수(朴檖)가 1666년 멀음마을의 동쪽 내성천 건너편의 무섬(지금의 문수면 수도리)마을을 개척하여 살았다. 박숙의 셋째 아들 박형은 처음 영주 뒷새(지금의 영주시 영주동 영광중학교 부근)에 자리 잡았다가 가세가 번창하자 후손들이 원당(지금의 영주시 하망동), 귀내(지금의 영주시 고현동), 수구리(지금의 이산면 내림리), 한정, 서릿골(지금의 영주시 문정동), 덕바우(지금의 장수면 덕암리) 등으로 터전을 넓혀 지금까지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가흥동에 있던 한천서원에는 네 명을 제향했는데, 그들의 이력은 다음과 같다.

장수희(張壽禧)는 자가 우옹(祐翁), 호는 과재(果齋), 본관은 인동이다. 부친은 장응신(張應臣), 모친은 감천문씨(甘泉文氏) 문경동(文敬仝)의 딸이다. 부인은 창원황씨(昌原黃氏) 황사언(黃士彦)의 딸이다. 장수희는 퇴계 이황이 초곡에 거주할 때 6세 나이로 배움을 청했으며 이산서원을 창건하는 데 주요 역할을 하였다. 음직으로 어모(禦侮)직을 지냈고 사후에는 형조참의에 추증되었다.

오운(吳澐)의 자는 태원(太源), 호는 죽유(竹牖)와 죽계(竹溪), 본관은 고창이고 경상남도 함안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오수정(吳守貞)이고, 모친은 순흥안씨(順興安氏) 안관(安灌)의 딸이다. 이황(李滉)과 조식(曺植)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561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566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내·외직에 제수되어 활약하였으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켜 곽재우(郭再祐)의 휘하에서 소모관(召募官), 수병장(收兵將) 등으로 활약하였다. 당시 백령에서 모집한 의병이 전후 2만여 명에 이르렀고 의령 부근의 전투와 현풍 전투에 군공이 뛰어났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다시 합천 부근의 왜적을 쳐서 공을 세워 도원수 권율(權慄)의 추천으로 통정대부에 올랐고, 명나라 장수 진린(陳璘) 제독의 접반사로 활약하였다. 임진왜란의 공로로 선무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고, 병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전쟁의 와중에 오운은 처가가 있던 영주 초곡으로 내려와 학문에 힘쓰며 주자의 저술 가운데 중요한 의미를 지닌 상소문들을 초록하여『주자문록朱子文錄』을 편찬하였고, 단군조선으로부터 고려에 이르는 우리나라의 역사를 정리한 『동사찬요東史纂要』를 저술하였다. 부인은 김해허씨(金海許氏) 허사렴(許士廉)의 딸이다. 3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오여은(吳汝檼), 오여벌(吳汝橃), 오여영(吳汝楧)이고, 사위는 조형도(趙亨道), 문홍운(文弘運)이다. 저술로 『죽유문집竹牖文集』과 『동사찬요東史纂要』 등이 있다.

박회무(朴檜茂)의 자는 중식(仲植), 호는 육우당(六友堂)과 숭정야로(崇禎野老)이며, 본관은 반남이다. 박승임(朴承任)의 손자이고, 부친은 취수헌(醉睡軒) 박록(朴漉, 1542~1632)이다. 박회무는 정구(鄭逑)와 정경세(鄭經世)에게 수학하였고 1606년 진사시에 합격한 뒤 음직으로 선공감역에 제수되었으며 황산찰방, 금부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에 올랐다. 1636년 겨울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출정하였으나 이미 화의가 성립되어 통곡하며 되돌아와 두문불출하였다. 향리에 숨어 지내면서 소나무, 전나무, 매화, 대나무, 연, 국화를 심고 본인과 더불어 벗을 삼는다 하여 아호를 육우(六友)라고 하였다.

박종무(朴樅茂)의 자는 계직(季直), 호는 삼락당(三樂堂)이며 박회무의 아우이다. 영주 한정에 거주하며 정구와 장현광에게 수학하였고 1609년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이괄의 반란에 임금을 공주까지 박회무와 함께 호종하였으며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항복하자 세상에 나설 뜻이 없어 연화산에 들어가 생애를 마쳤다. 박종무는 경학으로 여러 번 천거되었지만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다. 저술로 형과 함께 쓴 4권 2책의 『육삼연고六三聯稿』가 있다. 소고문중에서 양정재 편액을 보관한 것은 박회무와 박종무가 소고문중의 인물이기 때문으로 파악된다.

참고문헌
  • 오운, 『죽유선생문집竹牖先生文集』.
  • 박회무·박종무, 『육삼연고六三聯稿』.
  • 소수박물관, 『대를 잇는 선비정신, 영주 소고가 사람들』, 소수박물관, 2009.
  •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 목판아카이브(http://mokpan.ugyo.net/)
  •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 유교역사관(http://www.ugy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