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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고와(好古窩)

전주류씨 호고와종택(全州柳氏 好古窩宗宅)

36.0x86.0x6.7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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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호고와(好古窩)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36.0x86.0x6.7
  • 건물명 호고와(好古窩)
  • 공간명 전주류씨 호고와종택(全州柳氏 好古窩宗宅)
  • 서예가
  • 위치정보 안동시 임동면 마재-구미 해평 일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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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고와(好古窩)

호고와(好古窩)


호고와(好古窩)는 경상북도 안동시 임동면 마재[馬嶺洞]에 있었던 호고와(好古窩) 류휘문(柳徽文, 1773~1832)의 당호로, 임하댐 건설로 구미시 해평면 일선리로 이건하였다. ‘호고와’는 옛 것을 좋아한다는 의미로, 류휘문은 모든 언행에 있어 옛것을 통해 고증하고 실행하려고 하였다.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이 찬한 류휘문의 「행장行狀」에 기록된 몇 가지 사례들을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다. “예를 논함에 평상시 입고 다니는 것이 옛 사람들의 궁려(宮廬)와 기복(器服)과 달라 항상 서로 어긋나서 통하지 않음을 한스럽게 여겼다. 이에 궁묘도(宮廟圖)와 「관복고증冠服考證」을 지어 평상시에도 갓을 쓰고 지냈다. 혹자가 요즘 사람은 마땅히 요즘 사람의 옷을 입어야 한다고 하자 웃으면서 이것 또한 옛것을 회복하는 한 방법이다. 만약 이것으로써 주공(周公)을 뵙는다면 주공이 반드시 빙그레 웃으실 것이다라고 하였다. 옛것을 사모함이 돈독하여 일상적인 따르고 최근의 것에 친압하지 않아서 평소 말하는 것은 『사서四書』‧『심경心經』‧『근사록近思錄』‧『주서朱書』‧『퇴서退書』의 평이하고 명백한 것을 벗어나지 않았다. 항상 『소학』을 사람이 되게 하는 책이라고 여겨 주해(註解)가 본지(本旨)를 잃어버린 것은 장구(章句)를 지어 바로잡았다. 또 주자 이후와 우리나라 여러 유학자들의 가언(嘉言)과 선행(善行)을 채집하여 『소학후편小學後篇』을 지었으며, 『근사록섭주近思錄葉註』를 수정하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또 말하기를 배우는 자는 마땅히 선배들의 가르침을 삼가 지켜야지 새로운 학설을 만들거나 세우는 것을 좋아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쌓인 공부가 풍부하고 정확하고 핵심적인 것만 발설하여 이따금 옛사람들이 말하지 않은 것을 많이 얻었다. 또 스스로 안다고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남들이 더욱 좋아하고 믿게 되었다. 군자의 학문은 반드시 세상을 놀라게 하고 시속을 움직이게 하는 일이 될 필요는 없다. 평상시에 절로 도리가 있어야 한다. 뜻은 크게 세우고 규모를 광대하게 설정하여 세상의 수만 가지 일들이 모두 나의 분수 안에서 한 가지로 이해해야 한다고 하였다. 입심(立心)은 충신으로 속이지 않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고, 제행(制行)은 엄격하고 각려함을 위주로 삼았다. 갑작스럽고 급한 때에는 행동을 더욱 조심하였고, 은미하고 그윽한 곳에 홀로 있을 때에는 몸가짐을 더욱 정밀하게 하였다.” 특히 상례나 제례 등 예학에 관해서는 『주자가례朱子家禮』보다는 고대 『의례儀禮』를 바탕으로 그 논리적 근거를 마련하고 학문적 토대를 형성하였다. 현재 종택에는 가운데 호고와 편액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연민(淵民) 이가원(李家源, 1917~2000)의 쓴 가림(可林)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고, 오른쪽에는 사성재(思誠齋) 편액이 걸려 있다. 글씨는 작자 미상의 해서체이다.

‘옛 것이 좋다’는 호고(好古)는 고금을 막론하고 문인아사(文人雅士)들의 공통된 취향이다. 그 호고 두 글자로 당호를 짓고, 그 집에 붙일 편액을 쓰는 부탁받고 쓰는 서가의 마음이 이와 같을까? 아무 거리낌 없이 편안하다. 눈을 사로잡는 화려한 끌림도 없고 주변을 호령하는 필세도 없다. 품격의 높고 낮음을 떠나 내용과 결부되는, 그 내용과 잘 어울리는 글씨를 좋은 편액이라 한다면 이 말에 적합한 편액인 듯하다. 역시 글씨에 기세가 있을 때면 그 이유가 있어야 하고 웅장할 때면 그 사연이 마땅해야 한다. 옛것을 좋아한다는 말에 더 이상 무슨 장식이 필요하겠는가? 

(서예가 恒白 박덕준)

전주류씨 호고와종택(全州柳氏 好古窩宗宅) 소개


류휘문(柳徽文)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공회(公晦), 호는 호고와(好古窩)이다. 조부는 삼산(三山) 류정원(柳正源)이고, 아버지는 통덕랑 류만휴(柳萬休)이며, 어머니는 한양조씨(漢陽趙氏) 오죽재(梧竹齋) 조의양(趙宜陽)의 딸이다. 삼산리 집에서 태어났으며 류장원(柳長源)의 문인이다. 1821년에 류장원이 지은 『예서통고禮書通攷』와 고조부 정원(正源)의 『역해참고易解參攷』를 교정하였다. 1830년에 후릉참봉이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2년 뒤에 장릉참봉이 제수되었으나 이미 죽은 뒤였다. 일생을 학문과 후진양성에 바쳤으며 남한호(南漢皓)·조승수(趙承粹)·류식(柳栻)·이병운(李秉運)·이병원(李秉遠)·류건휴(柳健休)·류정문(柳鼎文)·류치명(柳致明) 등의 학자들과 교유하였다. 고산서당을 비롯하여 여강·구계·황산·고운 등 여러 서당에서 후진을 교육하였다. 경서와 제자서에 두루 밝았고 많은 저술을 하였다. 류휘문은 특히 성리학 관련 저술을 많이 남겼는데, 문집 잡저에 사서오경(四書五經) 중 요어(要語)의 뜻을 논변한 「독서쇄어讀書瑣語」, 『사서四書』·『대학혹(大學或問』·『성학십도聖學十圖』 등에 대해 동암 류장원과의 문답을 기록한 「암재어록巖齋語錄」, 성재(誠齋) 남한호(南漢皜) 등과 함께 태극도를 중심으로 강론한 「천재강록泉齋講錄」, 『소학』·『근사록』·『서경』·『강목』·『역학계몽』 등에 대한 견해를 밝힌 「관규참언管窺僭言」 등이 있다. 「관복고증冠服考證」, 「가례고정家禮攷訂」, 「계몽고의啓蒙攷疑」, 「전의여론傳疑餘論」 등의 저술을 통해서는 태고부터 주대(周代)에 이르는 제도를 고증하고 주자의 가례에 대한 제설을 정리하였다. 특히 유교적 실천윤리를 강조하는 영남 사림파가 숭상하는 주자의 『소학』에 대해 제유의 설을 총집하고 요점을 초록한 「소학장구小學章句」, 「소학동자문小學童子問」을 저술하여 성리학의 이론을 기초부터 다시 정립하고자 하였다.

전주류씨 무실파는 시조 류습(柳濕)의 후손으로, 6세손 류윤선(柳潤善, 1500~1557)이 세거지인 서울 묵사동에서 처가인 영주(榮州)로 이거하였고, 장남 류성(柳城, 1533~1560)이 안동 천전리에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청계(靑溪) 김진(金璡)의 사위가 되면서 영주에서 무실로 이거하여 이곳에 터전을 형성하기 시작하였으며, 이후 조선 후기까지 학문‧덕행‧충효 등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문집을 남긴 인물만 120여 명에 이른다. 불천위(不遷位)가 5명(백졸암 류직, 용와 류승현, 삼산 류정원, 호고와 류휘문, 정재 류치명), 문과급제자가 10명, 무과급제제가 5명, 생원진사 33명, 음사로 벼슬한 인물이 39명이었다. 특히 류경시(柳敬時)와 류승현(柳升鉉)은 청백리에 선정되었고 류관현과 류정원은 『목민심서』에 수록될 만큼 치적이 있었다. 류성은 류복기(柳復起)와 류복립(柳復立) 두 아들을 두었는데, 류복기는 학봉 김성일과 함께 진주성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순국하였다. 류복기는 우잠(友潛)‧득잠(得潛)‧지잠(知潛)‧수잠(守潛)‧의잠(宜潛)‧희잠(希潛)‧시잠(時潛) 등 일곱 아들을 두었다. 류우잠은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첫째 류숙(柳橚)은 호군을 지냈고, 둘째 류직(柳㮨)은 진사였고 호가 백졸암(百拙庵)이다. 셋째는 류욱(柳㮋)이고, 넷째는 류학(柳㰒)이며, 다섯째 류격(柳格)은 생원이다. 류숙은 아들 넷을 두었는데, 첫째 류진휘(柳振輝)는 진사이고, 둘째 류정휘(柳挺輝)는 문과에 급제하여 목사를 지냈으며, 셋째 류증휘(柳增輝)는 호군을 지냈다. 넷째 류익휘(柳益輝)는 호가 만령(萬嶺)으로 무실종가에서 마령(馬嶺)으로 분가를 나와 상시(相時)‧행시(行時)‧대시(大時)‧달시(達時) 네 아들을 두었다. 류상시는 석구(錫龜)‧석린(錫麟)‧석순(錫純) 세 아들을 두었는데, 류석구가 삼산(三山)으로 이거하였다. 류석구가 세 아들은 두었는데 정원(正源)‧후원(厚源)‧발원(發源)이다. 류정원은 호가 삼산(三山)인데, 곧 류휘문의 조부이다.

호고와종택은 임하댐 건설로 인하여 삶의 터전이 물속에 잠기게 되어 부득이 1987년 전후하여 구미시 해평면 일선리로 이거했다. 류휘문은 불천위로 모셔지고 있는데 종택에 사당은 따로 없고 사랑채 감실방에 벽감으로 봉안되어 있다. 이 집은 ㅁ자형으로 정면 5칸, 측면 4칸 규모의 건물로 정침은 2칸의 안대청이 중앙에 있고 좌측에는 2통간의 안방이 있으며 우측에는 1칸의 상방이 있다. 상방의 전면에는 통래간을 두어 사랑채의 통방과 이어지게 하여 우익사를 형성하였다. 사랑채는 중문간의 우측에 있는데 2통간의 사랑방과 1칸의 감실방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사랑방 우측간의 뒤로는 중방을 두어 우익사와 연결하였다. 중문간 좌측에는 외양간을 두었고 외양간 뒤에는 부엌과 안방이 연접되어 있다. 그리고 외양간 좌측에는 방앗간이 있고 정침의 양측면 뒤로는 토석담장을 쌓아 뒷마당을 이루고 있다.

참고문헌
  • 류영수, 「전주류씨 수곡파 가학의 형성과 전개」, 경북대학교 대학원, 2009.
  • 한국국학진흥원자료부, 『전주류씨 호고와종택』, 한국국학진흥원소장 국학자료목록집 36, 2016.
  • 안동민속박물관, 『安東의 懸板』Ⅰ, Ⅱ, 2009.
  •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 Ⅱ, 2015.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 유교역사관(http://www.ugy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