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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환재(弄丸齋)

풍산류씨 충효당(豊山柳氏 忠孝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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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농환재(弄丸齋)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29.0x90.0x1.5
  • 건물명 농환재(弄丸齋)
  • 공간명 풍산류씨 충효당(豊山柳氏 忠孝堂)
  • 서예가
  • 위치정보 안동시 풍산읍 서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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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환재(弄丸齋)

농환재(弄丸齋)


농환재(弄丸齋)는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서미리에 있던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의 서재 편액이다. ‘농환’은 소옹(邵雍)이 「자작진찬시自作眞贊詩」에 “구슬(태극)을 가지고 노는 여가에 한가로이 왔다가 한가로이 오노라.[弄丸餘暇 閒往閒來]”라고 한 데서 취한 듯하며, 이욕에 물들지 않고 산수자연을 즐기며 안분자족했던 서애의 삶이 투영되어 있다. 「서애연보」에 따르면 서애는 만년에 풍산읍 서미리에 초가삼간을 짓고 농환이라 편액한 뒤에 자제들에게 “사람이 이욕에 빠져서 염치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은 모두 만족할 줄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 집이 비록 꾸밈이 없고 누추하지만 비바람을 가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추위와 더위도 피할 수 있으니 이 이상 무엇을 더 구하겠느냐. 무릇 사람이 자기가 있는 곳에 안정하면서 걱정이 없다면 어느 곳인들 살지 못하겠느냐.”라고 하였다. 편액 글씨는 작자 미상의 해서체이다.

힘이 넘친다. 박차고 튀어 나올 듯한 기세다. 원목 송판에 그대로 새긴 점이 격식을 벗어나 듯 운치가 있다. 弄과 丸은 여유가 있고 느긋하다. 반면 齋는 내부공간이 긴밀하지만 원활하지는 못하다. 외부와 소통이 원활한 관계로 구성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붓의 사용에 다소 무리한 압박이 있는 듯 필획을 부담스럽게 하는 점도 일부 있다. 붓을 강하게 눌러 힘을 주는 것과 필봉이 강한 힘을 발휘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전자는 붓 끝이 속박되어 필획은 둔탁하게 되고 후자는 필봉이 자유로워 생기 있는 필획이 된다.

(서예가 恒白 박덕준)

풍산류씨 충효당(豊山柳氏 忠孝堂) 소개


풍산류씨(豊山柳氏)는 풍산현(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의 토성으로 고려 후기에 성장한 전형적인 재지사족이다. 시조인 류절(柳節)로부터 류돈승(柳敦升), 류정장(柳挺莊) 3대에 걸쳐 호장을 역임하였다. 4세인 류백(柳伯)이 은사급제함으로써 토대를 마련하였고, 5세인 류난옥(柳蘭玉)이 창평현령을 역임함으로써 그 토대를 다졌다. 뒤를 이어 6세 류보(柳葆), 7세 류종혜(柳從惠)가 잇달아 실직을 역임함으로써 사족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특히 류종혜 때부터 풍산 읍내에서 하회로 옮겨와 정착함으로써 하회는 풍산류씨 가문의 세거지가 되었다. 풍산에 살던 류종혜가 서쪽으로 10여 리를 옮겨 하회로 들어오려 할 때 입향이 쉽지 않았던 것에는 두 가지 전설이 전해진다. 하나는 류종혜의 조부인 류난옥이 먼저 하회에 입향하고자 했으나 적선을 한 뒤라야 들어갈 수 있다는 계시에 따라 류종혜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음덕을 쌓았다는 전설이고, 또 다른 하나는 류종혜가 3년 동안 만인에게 적선을 하고 나서야 입향할 수 있었다는 전설이다.

하회로 옮겨온 풍산류씨는 사회·경제적으로 크게 성장하여 일족의 세력은 확대되었고 가세는 더욱 부유해졌다. 류종혜의 아들 류홍(柳洪)은 진사 김관(金琯)의 딸과 혼인하였는데, 김관은 강호(江湖) 김숙자(金叔滋)의 부친이고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조부이다. 그러므로 류홍은 김숙자와 처남 매부 간이고 김종직에게는 고모부가 된다. 류홍의 아들 류소(柳沼) 권옹(權雍)의 사위가 되었는데, 권옹은 이조정랑 배소(裵素)의 사위이며 평창군사를 지낸 관료였다. 류소의 아들 류자온(柳子溫)은 사간 안팽명(安彭年)에게 글을 배우고 사마시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다. 그의 장인은 청백리로 유명한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으로 연산군 때 대사간을 지내다가 낙향하여 안동 풍산에 은거한 명사이다. 류자온의 아들 류공작(柳公綽)은 간성군수를 지냈으며 연안이씨(延安李氏) 이형례(李亨禮)의 사위였다. 이형례는 대제학을 지낸 오봉(五峯) 이호민(李好閔)의 조부이다. 이와 같이 류종혜로부터 류공작에 이르기까지 하회 류씨들은 조선 전기 영남 지역이라는 제한된 시공간에서 가능한 최정상급 혼맥을 형성하였다. 그러한 혼맥이 결국 류씨 가문의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하였고, 16세기에 입암(立巖) 류중영(柳仲郢, 1515~1573), 겸암(謙庵) 류운룡(柳雲龍, 1539~1601)·서애 류성룡 부자를 출현시킴으로써 영남을 대표하는 명문가로 발돋움하였다.

류성룡의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와 운암(雲巖), 본관은 풍산(豊山)이며 부친은 입암 류중영, 모친은 안동김씨(安東權氏) 김광수(金光粹)의 딸이다. 겸암 류운룡의 아우이자 퇴계 이황의 제자로 1566년(명종 21) 문과에 급제한 뒤 여러 요직을 거쳐 1589년(선조 22) 대사헌, 병조판서, 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1591년(선조 24) 우의정으로 있으면서 권율과 이순신을 의주목사와 전라좌수사에 추천하는 한편 진관법을 예전대로 되돌리자고 주장하였다. 이 해에 세자 책봉 건으로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처벌이 논의될 때 온건파인 남인으로서 강경파인 북인의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와 대립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영의정에 임명되어 왕을 호종했으나, 왜란에 대한 판단 잘못을 이유로 곧 파직되었다. 이어 평안도 도체찰사에 제수되어 명나라 장수 이여송과 함께 평양성을 되찾았지만, 벽제관에서 대패한 이여송이 왜군과 화의를 모색하자 이에 반대하였다. 강화 회담이 진행되면서 선조가 서울로 돌아오자 다시 영의정에 올라서 훈련도감 설치를 건의하는 등 군비 보완에 힘썼다. 1598년(선조 31) 명나라 경략 정응태의 무고사건 때 명나라에 가서 사건의 진상을 해명하지 않는다며 북인들의 탄핵을 받아 관작을 삭탈당했다가 1600년(선조 33) 복관되었음에도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 내려온 류성룡은 7년이 지난 1605년(선조 38) 안동시 풍산읍 서미동으로 이사했으며, 이듬해인 1606년(선조 39) 3월 서미동에 초가삼간의 서재를 지은 다음 농환재라는 편액을 걸었다. 1607년(선조 40) 5월 6일 농환재에서 66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현재 농환재는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그래서 서미동 입구에 ‘영의정문충공서애류선생유적비’를 세워 서애가 마지막 여생을 보낸 유적임을 증명하고 있다.

참고문헌
  • 류성룡, 「연보」, 『서애집』
  • 김호종, 『서애 유성룡의 생각과 삶』, 한국국학진흥원, 2006.
  • 이세동, 『충효당 높은 마루, 안동 서애 류성룡 종가』,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