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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사루(晩思樓)

예천 안동권씨 춘우재고택(醴泉 安東權氏 春雨齋古宅)

73.6x27.7x2.1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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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만사루(晩思樓)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73.6x27.7x2.1
  • 건물명 만사루(晩思樓)
  • 공간명 예천 안동권씨 춘우재고택(醴泉 安東權氏 春雨齋古宅)
  • 서예가
  • 위치정보 예천 용문면 저곡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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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사루(晩思樓)

만사루(晩思樓)


만사루(晩思樓)는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제곡리에 있는 권진(權晋, 1568~1620)이 지은 춘우재(春雨齋)고택의 서재 편액이다. 권진은 안동권씨(安東權氏) 복야공파(僕射公派) 권수홍(權守洪)의 10대손인 야옹(野翁) 권의(權檥, 1475~1558)의 손자이다. ‘만사’는 늦도록 조상을 사모한다는 뜻이다. 만사루는 안마당 왼쪽에는 다락 형태의 건물인데, 특이하게도 약장을 놓아 동네 사람들이 약을 무료로 가져가도록 하였다. 그리고 안마당 오른쪽에는 사랑방이 있다. 편액의 글씨는 작자 미상의 해서체이다.

편액의 글씨는 글자 내의 공간구성이 긴밀해야 한다는 공통된 명제에 충실하게 따랐다. 필획이 튼튼하고 치밀하다. 필획을 시작하는 부분이 과장되게 강조되었다. 이 부분 역시 당시 편액 글씨 서체의 한 형식을 충실하게 따랐다. 힘찬 서체의 기상이 활달하다.

(서예가 恒白 박덕준)

예천 안동권씨 춘우재고택(醴泉 安東權氏 春雨齋古宅) 소개


안동권씨가 예천에 정착하게 된 계기는 권사빈(權士彬)의 맏아들 권의가 안동 도촌에서 작은 맛질로 옮겨 살면서 후손들이 일가를 이루게 되었다. 둘째 아들 권벌(權橃)은 처가 파평윤씨(坡平尹氏)의 터전인 봉화 닭실[酉谷]로 옮겨 갔고 셋째 아들 권예(權欚)도 닭실에 자리 잡았으나 현재 후손이 남아 있지 않다. 넷째 아들 권장(權檣)은 맛질에 정착하여 살았으나 후손들은 전라도로 이주해 갔다.

권의의 자는 백구(伯懼), 호는 야옹(野翁)이다.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으로, 1507년(중종 2)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509년(중종 4)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전적을 거쳐 장수찰방과 의흥현감을 역임하였다. 스승 조광조와 더불어 향약 시행에 대하여 깊이 상의하여 의흥현감 때는 백성들에게 향약을 권장하기도 하였다. 권심언(權審言, 1502~1574)의 자(字)는 중택(仲擇)으로 아버지 권의를 위하여 야옹정을 작은 맛질에 세우고 후진 교육에 힘쓰기도 하였다. 그는 풍채가 준엄하고 언행이 충직하며 성격이 너그럽고 후덕하였다. 음서로 처음에는 사옹원참봉‧풍저창부봉사를 거쳐 사헌부감찰에까지 이르렀고, 1549년(명종4) 지례‧고령‧거창현감으로 치적을 남겼다.

권진(權晋)은 권심언의 넷째 아들로, 자는 경명(景明), 호는 춘우재(春雨齋)이다. 율원(栗園) 이공(李珙)의 문인으로, 수정재(守靜齋) 금발(琴撥) 등과 함께 교유하였다. 타고난 품성은 효성이 지극하여 종신토록 부모님을 사모하였고, 타인을 속이지 않고 자신도 속이지 않는 것으로써 몸가짐의 표적을 삼았으며, 선조를 숭배하고 후손들에게 넉넉함을 물려줌으로 대대로 내려오는 가훈을 이행하고 여가에는 학문에 힘썼다. 또한 글씨에 능하여서 『문선文選』에 실린 80여 수의 시를 4일 만에 필사를 마쳤는데 자획이 바르고 단아하여 한 글자도 틀리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 백씨(伯氏) 매당(梅堂) 권욱(權旭, 1556~1612)과 함께 의병활동에 참여하였고 군자감참봉을 지냈다. 자식이 없어 중씨(仲氏) 권담(權曇, 1558~1631)의 아들 권상경(權尙經)을 후사로 삼았으며, 후손 가운데 권수원(權壽元, 1654~1729)은 갈암 이현일의 문인이고, 권성봉(權聖鳳, 1733~1804)은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의 문인이며, 권경하(權經夏, 1828~1905)는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의 문인으로 대대로 경전과 예학을 가학적 전통으로 계승하였다.

춘우재(春雨齋)고택은 예천군 용문면 제곡리에 있다. 용문면은 예천군의 1읍 11면 중 하나로 군의 서북쪽 끝에 위치한다. 제곡리는 용문면의 동쪽에 위치하며 사방 경계는 동으로는 대저리와 하학리, 서로는 능천리, 남으로는 상금곡리와 예천읍 생천리, 북으로는 하리면 율곡리와 접한다. 제곡리는 맛질이라고도 하는데, 제곡(渚谷)이라는 한자어를 훈자(訓借)한 것이다. 맛질은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한천을 경계로 동쪽의 큰맛질, 서쪽의 작은맛질로 나뉘며 현재 행정구역상으로는 큰맛질은 대저리, 작은맛질은 제곡리이다. 춘우재고택은 작은맛질에 위치하며, 큰맛질은 마을 뒷산에서 흘러 내리는 문계천을 경계로 위쪽의 저상, 아래쪽의 저하 마을로 나뉜다. 예천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맛질은 금당실과 함께 특별한 의미가 있다. 예천 사람들 사이에 전해지는 “금당·맛질은 반(半)서울이다.”는 말을 통해 알 수 있다. ‘반서울’이란 말 그대로 하면 서울의 절반 정도는 된다는 뜻이다. 이는 산골 마을인 금당실과 맛질에 대하여 ‘서울과 비교해도 크게 모자랄 것이 없다’는 예천 사람들의 자긍심을 내포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두 마을이 예천의 대표적 명문가의 세거지로 예천을 대표할 만한 인물을 두루 배출하였기 때문이다.

춘우재고택 건물은 정침과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침은 정면 5칸, 측면 7칸의 ㅁ자형이고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기와집이다. ㄷ자 형태의 안채는 대청을 중심으로 왼쪽은 안방으로 좌익사를 이루게 하였고, 오른쪽은 상방으로 우익사를 이루게 하였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민도리계 홑처마 맞배집이다. 사당은 신문(神門) 없이 토담 사이의 공간으로 출입하며 내부 통칸에는 우물마루를 시설하고 4대조까지의 위패를 모셨다.

춘우재고택에는 국화주가 일품인데, 만드는 순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찹쌀과 국화를 씻는다. 2. 찹쌀과 국화를 섞어서 찐다. 3. 찐 찹쌀에 누룩을 넣어 섞는다. 4. 생국화를 더 넣어 섞는다. 5. 포대에 다음 뒤 항아리에 넣는다. 6. 항아리에 입구를 봉한 뒤 장기간 삭이면 맑고 향기로운 국화주가 된다.

참고문헌
  • 안동대학교 안동문화연구소, 『예천 금당실‧맛질 마을』, 예문서원, 2004.
  •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 Ⅱ, 2015.
  • 한국국학진흥원자료부, 『안동권씨 춘우재고택』, 한국국학진흥원소장 국학자료목록집 19, 2014.
  •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 유교역사관(http://www.ugy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