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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락당(同樂堂)

평산신씨 극재공 약목종중(平山申氏 克齋公 若木宗中)

36.5x95.5x3 / 행서(行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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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동락당(同樂堂)
  • 글자체 행서(行書)
  • 크기 36.5x95.5x3
  • 건물명 동락당(同樂堂)
  • 공간명 평산신씨 극재공 약목종중(平山申氏 克齋公 若木宗中)
  • 서예가
  • 위치정보 칠곡 약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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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락당(同樂堂)

동락당(同樂堂)


동락당(同樂堂)은 경상북도 칠곡군 약목면에 있는 극재(克齋) 신익황(申益愰, 1672~1722)의 당호 편액이다. ‘동락’은 즐거움을 함께 한다는 뜻으로, 『맹자』, 「양혜왕梁惠王」 하에서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임금께서 백성과 함께 즐기지 않기 때문입니다.[此無他 不與民同樂也]”라고 한데서 취하였다. 또 묵헌(默軒) 이만운(李萬運)의 기록에 의하면 “선을 행하는 것이 가장 즐거운 것인데, 자신만이 그 낙을 즐길 뿐만 아니라 남과 더불어 그 낙을 즐겨야 즐거움이 극대화된다.”고 하였다.

굳센 필획으로 리듬감이 있게 쓴 행서편액이다. 굳세고 단아한 당시의 미감에 부드러움을 더한 것은 백미다. 필획의 시작 부분이 둥글고 붓을 깊이 사용하면서도 섬세한 필봉의 움직임은 매순간 살아있다. 공간과 자간의 관계 구성도 적합하고 주변을 압도하는 당당함이 있다. 굳세며 부드럽고, 강하면서 섬세하고, 긴밀한 듯 넉넉하다는 멘트를 동원해도 이 편액의 총체적 면모를 설명하기에 부족하다.

(서예가 恒白 박덕준)

평산신씨 극재공 약목종중(平山申氏 克齋公 若木宗中) 소개


경상북도 칠곡군 약목면은 낙동강을 경계로 왜관읍, 석적읍과 마주하고 있다. 서부는 구릉성 산지며, 동부는 낙동강변의 평야지로 서고동저의 지형이다. 남서쪽의 비룡산이 기산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고, 남서부는 구릉성 산지, 북동부는 낙동강 유역의 평야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이곳 칠곡군 약목면은 평산신씨(平山申氏) 문중의 집성촌이다.

평산신씨의 시조는 고려 태사 장절공 신숭겸(申崇謙) 장군이다. 조선에 들어와서 호조판서를 지내고 좌찬성에 증직된 제정공(齊靖公) 신효창(申孝昌)이 신익황에게 11대조가 된다. 이후 평산신씨가 칠곡군 약목면에 정착하게 된 것은 입향조인 신수하(申壽遐) 때이다. 그는 중부(仲父) 신건(申健)이 1522년(중종 18)에 인동부사로 부임할 때 수행하여 왔다가 인동현의 영양김씨(英陽金氏) 김극성(金克誠)의 딸과 혼인하였다. 그 후 한성에 있는 친족이 황산찰방으로 불러들였으나 나아가지 않고 인동의 서쪽 강진리(江津里)에 정착하여 약목의 평산신씨 입향조가 되었다. 세대를 내려와 신익황의 증조부 신우덕(申友德)은 호조참판으로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조부 신근(申漌)은 칠곡부사로 병조참판에 증직되었고 충효가 지극하였다. 부친 신명전(申命全)은 경기수사로 병조참판에 증직되었고 친족과 화목하고 윗사람을 잘 섬겨 그 가문을 이었다.

신익황의 자는 명중(明仲), 호는 극재(克齋),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1672년(현종 13) 7월 14일에 칠곡군 약목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성격이 자유롭고 호방했는데 점차 성장하면서 마음을 바꾸어 글을 읽었다. 8세 때 박번(朴蕃)에게 나아가 공부를 하였다. 1689년(숙종 15)에 부친이 서울에서 세상을 떠나자, 곧장 달려가 영구를 모시고 돌아왔는데 이때 걸린 병이 고질병이 되고 말았다. 이후 두문불출하며 경전과 역사서에서부터 잡저와 패설에 이르기까지 읽지 않은 책이 없었으며, 끝내는 도덕 성명의 학문을 깊이 연구하여 깨달은 것이 많았다. 1692년(숙종 18)에 향시에 합격하였으나, 이듬해 대과에서 탈락한 뒤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1696년(숙종 22)에 고을 내 부로들과 의논하여 약목현 사창을 세웠다. 1698년(숙종 24) 5월에 진주 절도영에 있는 큰형을 만나러 갔던 길에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을 광양의 배소로 찾아간 것을 시작으로 여러 차례 면대하여 가르침을 받았으며, 수차례의 편지를 통한 학문적인 논의가 있었다. 주요 논의 내용은 유학 전반에 걸쳐 광범위하게 행해졌으며, 특히 당시 학계의 주요 관심사였던 이(理)와 기(氣), 사단(四端)과 칠정(七情),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이 주된 문제였다. 이후 1708년(숙종 34)에 천거되어 경기전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사퇴하였다. 1717년(숙종 43) 천거에 의해 의영고주부가 되었으나 왕에게 나아가 사은하고 바로 돌아왔다. 이때부터 신익황은 다시 벼슬에 나아갈 생각이 없었고 오직 염락관민(濂洛關閩)의 글을 취하여 깊이 생각하고 연구하였다. 그 결과 날마다 새롭게 터득하는 공부가 있었다. 그래서 원근에 믿고 따르는 선비들이 많았으며 사명을 받고 지역을 지나가는 자들이 번번이 그의 집을 방문하여 공경을 표시하였다. 1719년(숙종 45)에 풍비(風痺)를 앓았는데 병상에 누워 있는 중에도 오히려 이치를 살피고 완역하는 공부를 그치지 않았고, 더러 자제들에게 구술로 전하여 아직 마치지 못한 저술을 계속하였다. 1722년(경종 2) 6월 8일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51세였다. 1765년(영조 41) 아들 신염(申琰)의 공로로 사헌부대사헌에 추증되었고, 1784년(정조 8) 사림들이 모여 그의 위패를 곤산서원에 봉안하였다.

참고문헌
  • 이재李栽, 「행장行狀」, 『극재집克齋集』.
  • 이상정李象靖, 「贈司憲府大司憲行義盈庫主簿克齋申公墓碑銘」, 『극재집克齋集』.
  • <신익황>, 한국민족문화백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