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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산정(1)(枕山亭)

영천이씨 간재문중 침산공파(永川李氏 艮齋門中 枕山公派0

55.5×127.0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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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침산정(1)(枕山亭)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55.5×127.0
  • 건물명 침산정(1)(枕山亭)
  • 공간명 영천이씨 간재문중 침산공파
  • 서예가
  • 위치정보 경북 안동시 녹전면 원천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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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산정(1)(枕山亭)

침산정(1)(枕山亭)

침산정(枕山亭)(1)은 1926년 내산(奈山) 이운연(李運淵, 1864~1940)이 그의 부친인 침산(枕山) 이세강(李世鋼, 1846~1917)을 기리기 위해 경상북도 안동시 녹전면 원천리에 세운 정자의 편액이다. 이 편액은 영천이씨(永川李氏) 간재문중(艮齋門中) 침산공파(枕山公派)에서 기탁한 것으로, 편액의 크기는 가로 127㎝, 세로 55.5㎝이다. ‘침산(枕山)’은 은거하여 조용히 심신을 수양하는 의미의 수석침류(漱石枕流)의 고사에서 인용된 것이다. 진나라 손초(孫楚)가 산림에 은둔하려는 뜻으로 왕제(王濟)와 대화하다가 ‘돌을 베고 흐르는 물로 입을 헹군다[枕石漱流]’는 말을 ‘돌로 입을 헹구고 흐르는 물을 벤다[漱石枕流]’고 잘못 말하였다. 그러자 왕제가 “과연 흐르는 물을 벨 수가 있고 돌로 입을 헹굴 수 있는가?”라고 물었다. 손초가 임기응변으로 대답하기를 “흐르는 물을 베는 것은 귀를 씻기 위해서이고, 돌로 입을 헹구는 것은 이에 낀 이물을 갈아 없애기 위해서이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글씨는 작자 미상의 해서체이다. 후덕하고 듬직한 붓이 짧고 굵은 흔적을 남기더니 수직으로 내리꽂는 획이 어느새 억센 기운을 이끌고 내달려 이룬 ‘枕(침)’ 자가 낯설게 다가온다. 차분함을 다잡은 붓이 소박하게 움직여 이루어낸 ‘山(산)’ 자가 위압감 없이 친근하다. 높은 지붕을 이고 큰 창을 내고 우뚝하게 선 ‘亭(정)’ 자가 시원한 기운을 뿜어낸다. 높고 낮음 그리고 우뚝한 높이로 구성된 세 글자가 편액이라는 제한된 공간 속에서 자유롭다. (서예가 遯石 양성주)

영천이씨 간재문중 침산공파 소개

이세강(李世鋼, 1846~1917)의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치련(稺鍊), 호는 침산(枕山)이다.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의 9세손으로, 증조는 이휘(李彙), 조부는 이용묵(李庸黙)이며, 부친은 이인규(李寅奎)이고, 모친은 함창김씨(咸昌金氏) 진악(鎭岳)의 딸이다. 계당(溪堂) 류주목(柳疇睦, 1813~1872)과 운산(雲山) 이휘재(李彙載, 1795~1875)의 문인이다.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 1842~1910)를 비롯한 당시 영남의 명사들과 교유하였다.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애송하여 주서옹(朱書翁)이라는 별호를 얻었다. 저서에 『침산집(枕山集)』이 있다.
문집 중 시는 국가 또는 사회적인 문제에 대하여 울분을 표현한 것이 주목을 끈다. 「경술칠월이십오일국가유사옥지변운운(庚戌七月二十五日國家有社屋之變云云)」은 칠언율시인데 경술국치를 당하여 통분한 심사를 읊었다. 「학교탄(學校歎)」은 고시 장편으로 유교의 전통이 날로 쇠퇴하여짐을 한탄조로 표현하였다. 「상전가(傷田家)」·「춘창즉사(春窓卽事)」·「관가(觀稼)」·「자조(自嘲)」 등은 모두 현실적 고민이나 갈등을 표현한 것이고, 「사선음(思仙吟)」은 문선(文仙), 주선(酒仙), 가선(歌仙), 조선(釣仙) 등을 칠언절구로 읊은 것으로 현실의 괴로움을 떠나 환상의 세계로 비약하고자 하는 희망을 나타내고 있다. 잡저의 「학교해(學校解)」는 신교육제도인 학교에 대하여 분석, 비판하고 전통적인 유교식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한 내용이다. 「경성록(警省錄)」은 음양호생(陰陽互生), 지경(持敬), 위학(爲學), 명의논성(明義論性), 자경(自警), 독서(讀書), 제사(祭祀), 계자손(戒子孫), 간문자(看文字), 변의리(辨義理), 대인(待人) 등 19개 항목으로 나누어 수신제가(修身齊家)에 필요한 내용을 정리, 기록한 것이다.
경상북도 안동시 녹전면 원천리에 있는 외내[


川]의 ‘외[


]’는 ‘우뚝한’ 또는 ‘두드러진’이란 뜻이고, ‘내(川)’는 ‘시내’란 뜻이다. 원당천과 구천이 마을을 감싸고도는 외내는 영천이씨 습독공파(永川李氏 習讀公派 대부분 간재 후손임)의 세거지이다. 습독공(習讀公) 이현우(李賢佑)는 강호문학의 창도자인 농암 이현보(李賢輔)의 동생으로 부내[汾川]에서 내살미[川沙]로 분가하였고, 아들인 흥해교수(興海敎授) 이충량(李忠樑)이 1520년경에 다시 이 마을로 옮겨 살게 된 이래 그의 자손들이 약 480년간 대를 이어 살아왔다. 외내는 풍수지리학상으로 금계(金鷄)가 알을 품고 있는 형상으로, 많은 인물을 배출하여 예로부터 ‘영천(榮川, 현 영주) 제일향(第一鄕)’이라 불려 왔다.
이충량의 아들인 곤재(坤齋) 이명홍(李命弘)·노운(蘆雲) 이복홍(李福弘)·간재 이덕홍의 3형제가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학업을 닦았고, 이덕홍의 아들인 선오당(善


堂) 이시(李蒔, 1569~1636)·금학당(琴鶴堂) 이립(李苙)·천유자(天遊子) 이점(李蒧)·소백(小白) 이모(李慕)의 4형제가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에게 급문하여 학업을 닦았다. 특히 간재 이덕홍은 퇴계 이황이 이름, 자, 호 3가지를 모두 지어 주신 유일한 제자로 평소 독실히 학문을 닦아 스승으로부터 많은 총애를 받았고, 임종 시엔 서적을 관리하라는 명을 받았고, 많은 성리학적 저술을 남겨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임란 시에 거북선의 원형 설계도로 추측되는 귀갑선도(龜甲船圖)를 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선오당 이시는 오계서당에서 29회의 강학을 열고 많은 제자(118명)를 가르쳐서 스승인 정구로부터 ‘대(代)를 이은 가학(家學)’이라는 칭찬을 들었고, 시조로 「조주후풍가(操舟候風歌)」 3장과 「오로가(烏鷺歌)」 1장을 남겼다. 그 뒤를 이어 청천와(聽天窩) 이영전(李榮全)·이경태(李慶泰)·지암(芝巖) 이상규(李祥奎)·송라(松羅) 이긍연(李兢淵)·침산 이세강·해악(海嶽) 이유곤(李裕昆)·내산(奈山) 이운연(李運淵)·서정(西汀) 이기연(李起淵)·심소(心巢) 이철연(李喆淵)·인당(忍堂) 이희욱(李羲頊)·고선(古善) 이희익(李羲益)·산운(山雲) 이희복(李羲復)·심재(心齋) 이유춘(李有春) 등 많은 문인과 학자를 배출했다.
또 금학당(琴鶴堂) 이립(李苙)·이강(李茳)·천유자(天遊子) 이점(李蒧)·소백(小白) 이모(李嘉)·남산(南山) 이영구(李榮久)·우송(友松) 이장태(李長長) 등 6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했는데, 특히 간재 이덕홍의 세 아들인 립·강·모가 1615년(광해군 7) 실시한 식년시에서 동시 급제하여 조선조 과거 역사상 ‘3형제 동방급제’라는 유일무이한 기록을 남겼다.
외내에는 간재 선생 종택(당호는 선오당, 건립 연대는 미상)과 사당, 청천와(聽天窩 1664년에 이영전(李榮全)이 건립), 읍춘정(挹春亭 1901년 이세갑(李世鉀)이 건립), 침산정(枕山亭 1926년 이운연(李運淵) 등이 건립) 등의 정자가 남아 있고, 녹전면 원천리 우곡에는 간재 이덕홍의 재사인 영모암(永慕庵 1883년 중건)이, 매정리에는 이덕홍이 처음 발견한 신암폭포가 있다. 가까이 영주시 평은면 천본리 부곡에는 간재 이덕홍과 선오당 이시를 배향한 오계서원(


溪書院 1691년 오계서당에서 승격)과 군자정(君子亭 1570년 이덕홍 건립, 경북 무형문화재 제276호)이, 장수면 녹동에는 간재선생강생유지비(艮齋先生降生遺址碑 1933년 세움)가 있다. 또 도산서원 옥진각에는 퇴계의 명으로 간재 이덕홍이 제작한 혼천의(渾天儀, 혼상)가 보관되어 있다.

참고문헌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유교넷(www.ugyo.net)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