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서헌(此栖軒)
차서헌(此栖軒)은 소우(素愚) 강벽원(姜璧元, 1859~1941)의 서재(書齋) 편액으로 보인다. 이 편액은 영주 뒷새 진주강씨(晉州姜氏) 소우종택(小愚宗宅)에서 기탁한 것으로, 편액의 크기는 가로 57㎝, 세로 25.5㎝이다. ‘차서(此栖)’는 이곳에 머무른다는 뜻으로, 자연과 함께 살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글씨는 소우 강벽원의 친필 전서체이다. 오랜 풍상(風霜)을 겪은 고목이 힘겹게 새 가지를 뻗고 꽃을 피우려는 의지를 보여주는 듯한 글씨이다. 억세고 굵은 획을 위주로 하면서, 마르고 거친 획과 가늘고 부드러운 획이 섞이어 독특한 조형을 이루고 있다. 위로 바짝 올린 두 글자 아래로 넓은 공간을 경영하여 시원한 개방감을 이루었다. 첫 글자의 좌상에서 우하로 이어지는 사선이 넓은 공간을 밖으로 열어주고, 마지막 글자는 튼튼한 수직선을 강하게 세워 외부로부터의 삿된 것을 막아주는 벽처럼 선 모습이 당당하다. (서예가 遯石 양성주)
영주 뒷새 진주강씨 소우종택 소개
강벽원(姜璧元, 1859~1941)은 경상북도 영주군 두서면 출신으로 자는 윤화(允和)이고 호는 소우(小愚)·노정(蘆亭)·두고산인(斗皐山人)·만학당(晩學堂)이다. 12, 13세 무렵에 수산(睡山) 김휘철(金輝轍, 1842~1903)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후에 다시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1846~1919)의 문하에서 공부하며 퇴계학맥을 계승했던 선비이기도 하다. 풍채와 기개가 뛰어나고 호탕하고 굳세면서도 너그러운 품성의 소유자였다. 일평생 서학(書學)에 정진하여 예해행초(隸楷行草)가 최근세 한국 서화가 중 가장 으뜸이다. 오랜 세월 중국의 안진경(顔眞卿)과 미불(米芾)의 서체를 독학으로 습득하였을 뿐 아니라 김정희의 추사체도 홀로 터득하여 필체가 경건(勁健)하고, 영남의 필치(筆致)를 탈피하여 자기만의 독특한 서예의 경지를 이룩하여 필체가 담대하다. 1885년(고종 22)경 운현궁을 드나들면서 대원군과 서도(書圖)를 나누었으며, 시서화(詩書畵) 삼절(三節)로 유명하다. 강벽원의 탁월한 서예 경지는 당시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져 금문학파의 거두인 강유위(康有爲)가 그의 글씨를 보고 “안진경과 미불의 서법을 얻었으니 당대 천하제일의 솜씨”라고 격찬하기도 했다. 강벽원은 어려서부터 재주가 출중하고 의협심이 강하였으며, 수산 김휘철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그러나 과거에 인연이 없어서 산천을 유람하며 자유롭게 살았고, 훗날엔 고향으로 돌아와 사계서당(泗溪書堂)을 짓고 후진을 양성하였다.
무덤은 경상북도 영주시 장수면 백록동(후산)에 있다. 저서로는 서법(書法)에 관해 예해행초(隸楷行草)의 서예 이론을 담은 『노정서결(蘆亭書訣)』과 『오우집화(五友集話)』, 문집으로는 4권 1책의 『소우재유고(小愚齋遺稿)』가 있다. 여러 권의 저서를 남긴 문인이었지만 벼슬과는 인연을 맺지 못하고 산천을 유람하며 자유롭게 살다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사계서당을 짓고 후진 양성과 선비로서의 초연한 삶을 살았다. 특히 『노정서결』은 일종의 학서 이론서이자 연서교본의 성격을 띠고 있는 책으로 모두 2권으로 구성된 목판본이다. 현대 영주의 서예가인 김동진의 말에 의하면 “이 책은 자신의 이론을 확립시킨 내용이었다기보다는 원교 이광사나 추사 등 전대 서가의 이론들 중에서 자신의 주관에 따라 취사선택하여 정리한 것이라고 보인다. 따라서 이론서로서의 가치에 대해 다소 간과해버릴 여지가 없지 않지만, 자신의 작업에 대해 정확한 이론적 근거를 마련하면서 접근해간 극히 드문 사례라는 측면에서 주목할 필요가 크다”라고 하였다.
2006년 한국국학진흥원에서 전주역사박물관과 공동으로 개최한 ‘영호남 선비들의 예술세계 특별전’에 붙인 캐치프레이즈는 소우의 작품 「묵란도(墨蘭圖)」 화제에서 따왔다. ‘뜻이 도달하면 붓은 못 미쳐도’라는 구절이 바로 소우의 「묵란도」에 적힌 글귀이다.
소우의 작품에 임하는 태도와 마음가짐이 기교보다는 뜻에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라 하겠다. 이 8폭 묵란도 그림은 진주강씨(晉州姜氏) 기헌고택(起軒古宅)에서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했던 작품들이다. 그중 두 폭의 화제의 원문과 해석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寫蘭不可葉葉相均 난을 치는데 잎사귀마다 서로 고르게 하는 것은 옳지 않다.
不妨若斷若續意到而筆不到 끊어질 듯 이어질 듯해도, 뜻이 도달한다면 붓은 미치지 못해도 무방하다.
소우의 작품들은 서예사적 중요한 전시마다 단골로 초대받고 있다. 2009년 연세대학교 백주년기념관에서 개최된 ‘선비의 꿈’ 전에는 ‘정와(靖窩)’, ‘일신헌(日新軒)’ 등의 현판이 출품됐고, 2012년에는 예술의전당에서 개최된 ‘한국목판특별전-목판, 선비의 숨결을 새기다’ 전을 비롯하여 남한산성 만해기념관에서 개최된 ‘설중매 만해 한용운 특별기획전’에도 소우의 작품이 전시되었다.
선별하여 초대했다는 작가들의 면면으로는 율곡 이이의 누나인 이매창(1529~1592), 추담(秋潭) 오달제(吳達濟, 1609~1637)를 비롯하여 구한말 이래 최고의 화가들인 소치(小痴) 허련(許鍊, 1809~1892), 미산(米山) 허헝(許灐, 1861~1938),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 1891~1977),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 1892~1979) 등이 보이는데 이들과 함께 작품을 전시하였다는 것은 영남 문인화를 대표하는 작가임을 증명해주는 사례라고 하겠다.
다만 한국의 근대 시기에 영남 지방 묵죽화 계보의 단초를 일으킨 석재(石齋) 서병오(徐丙五)와 동시대를 살았으면서도 교류한 흔적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은, 당시에도 중앙(대도시)과 지방 혹은 ‘사승’과 ‘독학’, ‘출사’와 ‘서생’이라는 간격이 두꺼운 벽처럼 존재했으리라는 추측을 하게 할 뿐이다.
참고문헌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유교넷(www.ugyo.net)
영주시민신문(www.yjinews.com)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