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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재(華山齋)

안동권씨 부호장공파 일원정(安東權氏 副戶長公派 一源亭0

47.0×121.5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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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화산재(華山齋)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47.0×121.5
  • 건물명 화산재(華山齋)
  • 공간명 안동권씨 부호장공파 일원정
  • 서예가
  • 위치정보 경북 안동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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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재(華山齋)

화산재(華山齋)

화산재(華山齋)는 안동권씨(安東權氏) 부호장공(副戶長公) 권시중(權時中)의 후손들이 친목 도모를 위해 경상북도 안동시 태화동 어개골에 건립한 일원정(一源亭) 처마 오른쪽에 걸려 있는 편액이다. 이 편액은 안동권씨 부호장공파 일원정에서 기탁한 것으로, 편액의 크기는 가로 121.5㎝, 세로 47㎝이다. ‘화산(華山)’은 정자 동쪽에 있는 산이 태화산(太華山)이기 때문에 붙인 이름으로 보인다. 정자의 처마 아래에는 당호인 일원정을 비롯하여 왼쪽에는 낙서재 편액이 걸려 있는데, ‘낙서(洛西)’는 일원정이 반변천이 굽어 돌아 흘러가는 안쪽인 어개골에 위치해 있어 낙동강의 서쪽이 되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일원(一源)’은 만 가지 다른 것도 하나의 근본에서 생겨난다는 뜻이다. 『논어』 「이인(里仁)」 편에 공자가 일찍이 증자에게 이르기를 “삼아, 우리 도는 한 이치로써 오만 일을 관철시키는 것이다[參乎 吾道一以貫之]”라고 한 데 대하여, 증자가 말하기를 “선생님의 도는 충과 서뿐이니라[夫子之道 忠恕而已矣]”라고 하였는데, 주자의 『주자어류(朱子語類)』에 의하면 충서(忠恕)를 논함에 있어 서가 충에서 분파(分派)되는 것을 가지고 말하기를 “만 가지가 한 근본이 되는 것과 한 근본이 만 가지로 다르게 되는 것이 마치 한 근원의 물이 흘러나가서 만 갈래의 지류가 되고, 한 뿌리의 나무가 나서 허다한 지엽이 나오게 되는 것과 같다[萬殊之所以一本 一本之所以萬殊 如一源之水流出爲萬派 一根之木生爲許多枝葉]”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글씨는 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 1835~1919)이 쓴 행서체이다. 기세 좋은 붓이 속도감을 잃지 않으면서도 묵직하게 흔적을 남긴 편액이 거친 느낌으로 다가온다. 우뚝한 모양의 ‘心(심)’ 자가 시원한 상승감과 묵직한 안정감을 겸비하고 가운데에서 중심을 잡고 서 있다. 그 좌우에 ‘華(화)’ 자와 ‘齋(재)’ 자가 강약, 지속에 곡직, 경중의 변주를 이루며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華’ 자 상부에서 풍성함이 과하다는 생각이 들 즈음에 세로의 수직선이 곧게 서며 절제를 이루어 냄이 눈에 띈다. 부드러운 원필로 이루어진 ‘齋’ 자 속의 ‘示(시, 제사상을 의미)’ 자 부분에 다소곳한 세 점이 재실의 매우 조심스러운 분위기를 전해주고 있다. (서예가 遯石 양성주)

안동권씨 부호장공파 일원정 소개

권시중(權時中)은 안동권씨(安東權氏) 9대 권백시(權伯時)의 둘째 아들로 부호장공파(副戶長公派)의 파조(派祖)이다. 『안동권씨대동세보』에 “정조 18년(1794)의 『후갑인보(後甲寅譜)』 별보(別譜)에서 입록(入錄)되었다. 당시 그 외손 『선성김씨세보』에 실린 홍무(洪武) 경오년(1390)의 장적(帳籍)에 ‘권서정(權瑞正)은 초명(初名)이 백시(伯時)이고, 그 아들은 시중, 그 아들은 윤화(允和), 그 아들은 만기(萬紀)’라고 되어 있고, 죽유(竹牖) 오운(吳澐)의 『가승(家乘)』에 월성인 손보(孫甫)의 배위(配位) 권씨(權氏)를 일컬어 ‘부(父)는 신행(愼行), 조(祖)는 용화(用和), 증조(曾祖)는 시중이다’라고 하였고, 선성(宣城) 김여련(金汝鍊)의 『근파록(根派錄)』에서 용화를 윤화의의 아우로 적고 있는 것이 발견되어 세차(世次)를 믿게 되었다. 1205년(희종 1)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 친필 간찰 유묵이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안동권씨는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족보 중에 가장 오래된 『성화보(成化譜)』를 간행하였는데, 이는 안동권씨의 자랑이자 우리 민족의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서거정(徐居正)이 지은 『성화보』의 서문에서는 안동권씨의 초기 역사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책(冊)이 균한(均漢)을 낳고, 균한이 자팽(子彭)을 낳고, 자팽이 선개(先蓋)를 낳고, 선개가 렴(廉)을 낳고, 렴이 이흥(利興)을 낳고, 이흥이 중시(仲時)를 낳았다. 중시는 두 아들을 두었으니, 수평(守平)과 수홍(守洪)이다. 수평은 벼슬이 추밀부사(樞密副使)에 이르렀고, 한림학사 위(韙)를 낳았다. 위가 첨의찬성(僉議贊成) 탄(坦)을 낳고, 탄이 정승(政丞) 문정공(文正公) 보(溥)를 낳으니, 지위가 재상에 이르고 문병(文柄)을 담당하여 성대한 공렬이 당대의 으뜸이었다. 다섯 아들이 모두 군(君)에 봉해지니, 준(準)은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이고, 고(皐)는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이고, 후(煦)는 계림군공(鷄林郡公)이고, 겸(謙)은 복안부원군(福安府院君)이며, 종정(宗頂)은 머리를 깎고 출가하여 광복군(廣福君)이 되었으며, 세 사위도 모두 군(君)에 봉해져 당시에 일가구봉군(一家九封君)으로 일컬어졌다. 수홍이 대장군(大將軍) 자여(子輿)를 낳고, 자여가 첨의평리(僉議評理) 이(頉)를 낳고, 이가 정승 문탄공(文坦公) 한공(漢功)을 낳았다. 권씨는 책이 아전이 된 후로 중간에 가세가 쇠퇴하여 7세 동안 세상에 이름을 떨치지 못하다가 수평에 이르러 다시 일어나 자손들이 그 아름다움을 이어 나가더니 문정공에 이르러 비로소 크게 현달하였으며, 수홍의 후손으로는 문탄공이 역시 현달하였다. 이에 권씨는 마침내 나뉘어 두 대족(大族)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이로 볼 때 3대 권책의 시기로부터 10대 때까지 안동권씨는 안동에 세거하며 대대로 향리직을 세습하여 왔음을 알 수 있다. 향리로 정착한 안동권씨는 10대에 이르면 15파로 나누어지며 향리직에서 벗어나 중앙 관직에 진출하는 사람들을 배출하였다. 안동권씨 15개 파는 복잡한 양상을 띠므로 명확하게 정리하여 내기가 어렵다. 그러나 『보감(寶鑑)』에 보이는 「안동권씨 10세 15파 세계도」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9대 권백시의 장자 권수중(權守中)이 종파(宗派)를 형성한다. 9대 권백시의 차자 권시중이 부호장공파를 형성한다. 9대 권백시의 아우인 권중시의 장자 권수평이 추밀공파(樞密公派)를 형성한다. 9대 권백시의 아우인 권중시의 차자 권수홍이 복야공파(僕射公派)를 형성한다. 9대 권백시의 둘째 아우인 권취의(權就宜)의 아들 권태달(權棣達)이 동정공파(同正公派)를 형성한다. 9대 권백시의 셋째 아우인 권취의(權就宜)의 아들 권태달(權棣達)이 동정공파(同正公派)를 형성한다. 9대 권백시의 넷째 아우인 권통 의 차자 권영정(權英正)이 별장공파(別將公派)를 형성한다. 9대 권백시의 다섯째 아우인 권취정(權就正)의 아들 권통의(權通義)가 부정공파(副正公派)를 형성한다. 9대 권백시의 여섯째 아우 권융(權融)의 아들 권인가(權仁可)가 시중공파(侍中公派)를 형성한다. 3대 권책의 둘째 아들인 권광한(權光漢)의 장자 권굉옥(權宏玉)의 후손이 10대 권숙원(權叔元)에 이르러 중윤공파(中允公派)를 형성한다. 3대 권책의 둘째 아들인 권광한의 차자 권굉진(權宏眞)의 후손이 10대 권사발(權思拔)에 이르러 군기감공파(軍器監公派)를 형성한다. 3대 권책의 셋째 아들인 권겸한(權謙漢)의 후손이 10대 권대의(權大宜)에 이르러 광석파(廣石派)를 형성한다. 3대 권책의 셋째 아들인 권겸한의 후손이며 8대 권입평(權立平)의 둘째 아들 권의정(權宜正)의 아들 권추(權樞)가 호장공파(戶長公派)를 형성한다. 2대 권인행의 둘째 아들 권륜(權綸)의 후손이 10대 권척(權倜)에 이르러 검교공파(檢校公派)를 형성한다. 7대 권렴의 이름을 알 수 없는 아들의 후손이 10대 권형윤(權衡允)에 이르러 급사중공파(給事中公派)를 형성한다.
부호장공의 21대손인 권태연(權台淵)의 「일원정팔경(一源亭八景)」 시가 있어 그 대상만 소개하기로 한다. 제1경은 나산필봉(蘿山筆峯), 제2경은 용사모종(龍寺暮鍾), 제3경은 낙수홍교(洛水虹橋), 제4경은 계암효월(溪巖曉月), 제5경은 서지반조(西池返照), 제6경은 선대원수(仙臺園樹), 제7경은 태화청람(太華晴嵐), 제8경은 무협귀운(巫峽歸雲)이다.
일원정의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집으로 가운데 마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방을 꾸며 놓았다. 또 내부에는 9개의 편액이 걸려 있는데, 동농(東農) 김가진(金嘉鎭)이 쓴 만수헌(晩修軒), 청나라 옹방강(翁方綱)의 글씨인 항괴불여(恒愧不如),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이 쓴 노송운영(老松雲影), 완당(阮堂) 김정희(金正喜)가 쓴 백세청풍(百世淸風), 시남(詩南) 민병석(閔丙奭)이 쓴 태화야벽(太華夜碧), 성당(惺堂) 김돈희(金敦熙)가 쓴 앵란초우(櫻欄蕉雨)와 옥색금성(玉色金聲) 그리고 회산(晦山) 박기돈(朴基敦)이 쓴 창등백석산방(蒼藤白石山房)이다.

참고문헌
『논어』
『주자어류』
『안동권씨대동세보』
안동권씨부호장공파종회, 『일원정(一源亭)』, 2009
안동민속박물관, 『안동의 현판Ⅰ·Ⅱ󰡕, 2009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Ⅱ』,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