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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막재사(官幕齋舍)

영주 창원황씨 귀암종택(榮州 昌原黃氏 龜巖宗宅0

59.0×137.5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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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관막재사(官幕齋舍)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59.0×137.5
  • 건물명 관막재사(官幕齋舍)
  • 공간명 영주 창원황씨 귀암종택
  • 서예가
  • 위치정보 경북 영주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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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막재사(官幕齋舍)

관막재사(官幕齋舍)

관막재사(官幕齋舍)는 대룡산 창원황씨(昌原黃氏) 문중에서 조상의 묘소를 수호하기 위해 경상북도 영주시 안정면 대룡산 자락에 지은 재실의 편액이다. 이 편액은 영주 창원황씨 귀암종택(龜巖宗宅)에서 기탁한 것으로, 편액의 크기는 가로 137.5㎝, 세로 59㎝이다. ‘관막(官幕)’은 묘소가 있는 산이 자주 산사태가 나자 군민들의 도움을 받아 산사태를 막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대룡산 창원황씨가 터전을 형성하게 된 것은 이현(梨峴) 황지헌(黃智軒)의 5대손인 농고(農皐) 황언주(黃彦柱, 1553~1632)가 영주 배고개에서 이곳 대룡산에 사는 순흥안씨 안윤금의 딸에게 장가들어 처가 마을로 옮겨 살면서부터이다. 황언주는 대룡산에 터전을 잡은 후 그곳에 농고정사를 짓고 학문을 탐구했으며, 소고 박승임을 사사(師事)하여 꾸준히 학문 연구에 분발했다.
대룡산 창원황씨종택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집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 중심에는 이현 황지헌이 있다. 그는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황보인·김종서와 그의 형 백현(白峴) 황의헌(黃義軒, ?~1454)이 순절하자 이에 연루되어 영주에 귀양되었다. 1468년(세조 14) 귀양에서 풀려났으나 세조의 부름은 거절했다. 황지헌은 영주의 창보에 자리 잡고 살면서 자신이 살던 서울 옛 동네 이현동의 이름을 따서 마을 이름을 배고개로 고쳤다. 그는 세상을 외면하며 문을 닫고 지냈는데, 당시 절의를 함께 한 많은 사람들이 황의헌·황지헌 형제를 일컬어 “백현(白峴) 선생, 이현(梨峴) 선생은 생육신과 사육신과 같다”라고 추앙했다.
황의헌의 2남 황무소(黃茂蘇)는 황지헌이 길렀는데, 부사정으로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손자 황진(黃璡, 1451~1506)은 1478년(성종 9) 음보로 사포서별제·주부·사헌부감찰, 1499년(연산 35) 진해현감(鎭海縣監)을 지냈다. 당시 진해는 수령이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떠나올 정도로 어려움을 겪은 지가 30여 년이나 되었다. 그는 수령으로 재직하면서 위엄을 세우고 밝은 다스림을 펴 백성과 아전을 함께 편안하게 했다. 군자감판관에 승진되어 떠나올 때 고을 사람들이 비석을 세워 그의 덕을 기렸다.
귀암(龜巖) 황효공(黃孝恭, 1496~1553)은 황언주의 조부로 1521년(중종 16) 문과에 급제한 후 성균전적·예조좌랑·한성서윤·사헌부지평·사헌부장령·사복시정·사간원사간에 춘추관편수관을 겸했다. 한창 왕성하게 일할 시기인 40세에 은퇴하여 18년 동안을 향리인 영주에 있으면서 학문 연구에 몰두했다. 『역범도(易範圖)』라는 저술을 남겼다. 퇴계 이황은 그의 묘명에서 “당시 세상이 그가 크게 쓰일 것을 기대했으나 진출이 순탄치 못했고, 하늘이 수(壽)에 인색했으니 어찌 운명이 아니랴?”고 하면서 안타까워했다. 사계서원(泗溪書院)에 제향되었다.
황효공의 아들 황흠(黃欽, 1512~1590)은 유일로 천거되어 여러 벼슬을 거쳐 세자시강원세마와 상주목사를 지냈다. 황흠의 아들 황언수(黃彦樹)는 중추부사를 지냈다.
황언주는 1591년(선조 24) 유일로 천거되어 시강원세마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이듬해 전생서주부에 임명되었으나 또 나가지 않았다. 그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곡식을 바쳐 군량을 도왔다.
황효공의 13대손 황영조(黃永祖)는 호가 지암(止庵)이다. 문행이 있고 용산강당에서 후진 양성에 힘써 많은 문도를 길렀다. 저서로 『지암집(止庵集)』이 있다.

글씨는 작자 미상의 해서체이다. 먹을 듬뿍 먹은 붓이 기운을 모아 빠르게 움직이면서도 절제미를 갖추며 단아한 흔적을 남긴다. ‘官(관)’ 자 우측 하단에 여유 있는 공간이 부여되어 마치 까치발을 하고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하다. ‘幕(막)’은 천을 덮어 어둡게 만드는 것인데 임시로 쳐놓은 천막인 듯 획이 휘날리면서도 반듯하다. 묵직하게 내려앉은 붓이 좌우로 번갈아 달리며 이루어낸 ‘齋(재)’ 자가 다소곳하다. 지붕을 넓게 펴고 선 ‘舍(사)’ 자의 내부가 단정하다. 무진년(戊辰年) 삼월(三月) 어느 날 쓴 글씨이다. (서예가 遯石 양성주)

영주 창원황씨 귀암종택 소개

경상북도 영주시 안정면 용산리는 조선시대 풍기군 용산면의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대촌동·도촌동·어약동을 병합하여 용산동이라 하고, 영주군 안정면에 편입되었다. 용산리는 동으로 석바우재 남역천이 흐르고, 서로 용암산이 남북으로 봉현면과 경계를 이루고, 남으로 장수면과 경계가 되는 검은 바위재가 있고, 북으로는 봉암리와 경계가 되는 떡골재가 있다. 마을 사방이 산으로 병풍처럼 쌓여 있어 분지와 같은 지역이다.
용산리는 1·2리로 나누어져 있는데, 1리는 대룡산이고, 2리는 남녘·사계마을이다. 대룡산은 어약·사계·도촌·대촌·고촌마을이 들과 골짜기에 산재해 있었다. 인구와 가구 수가 증가하여 마을이 번창하게 되자 이들 전체 마을을 합쳐 용암산의 용의 형국을 따서 대룡산이라 불렀다.
도촌은 사계마을 남쪽에 위치한 마을로 개울이 양쪽으로 흐르고 있어 섬같이 보인다 해서 섬마 혹은 도촌이라 불렀다. 대촌은 사계 동쪽 마을로 이 부근 마을 가운데 가장 큰 마을이다. 조선 중기부터 과거에 급제한 인물이 이 마을에서 많이 나와 인근 마을의 모범이 되었다 하여 대촌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용산강당이 남아 있다. 고촌은 어약 북쪽 산 밑에 위치한 마을로 부근의 다른 마을에 비해 외롭게 떨어져 있다 하여 고촌이라 불렀다. 지금은 폐촌이 되었다.
어약은 이 마을 뒷산이 옛날에 우암산이라 불렸는데, 그 산의 형상이 용이 바위에 엎드려 있는 형국이라 해서 용암산이라 고쳐 불렀다. 그 산록에는 풍수설에 의해 어옹편균의 명당지가 있다. 이런 곳은 반드시 물과 관련이 있는 지명이어야 자손이 번성하고 대대로 잘살게 된다는 운리를 따서 용암산 좌측 하록(下麓)의 마을을 어양동이라 불렀다. 그 앞들을 낭현(浪峴)들이라 하고, 북쪽 골은 어은곡이라 했으며 마을 앞 바위를 용수바위라 불렀다.
조선 중종 때 귀암(龜巖) 황효공(黃孝恭, 1496~1553)을 위해 사계서원(泗溪書院)을 짓고 제향하였는데, 흥선대원군의 서원 훼철 때 철폐되었다. 그런데 서원이 있던 마을이라 하여 사계마을이라 부른다. 현재 용산리에는 우우정·고계정·이택진 정려문·만기정·서파정·죽림사·농고정사·창원장씨종택·순흥안씨종택 등 많은 유적이 남아 있다.
대룡산 창원황씨종택은 경상북도 영주시 안정면 용산2리 대룡산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남역마을 후면의 산록에 口자형 종택과 귀암정·경덕사(별묘)·오산정이 나란히 동남향하고 있다. 대룡산 창원황씨종택은 매우 높은 기단 위에 좁은 안마당 뒤쪽으로 대청을 가운데 두고, 우측에 안방·정지를 두었고, 좌측으로는 마루방·사랑방을 배치하였다. 특히 평면 구성상 안방과 사랑방을 한 공간 내에 갖춘 점, 마루 공간의 축소와 온돌방의 확대라는 미묘한 역학 관계를 잘 엿볼 수 있다. 중문칸 4칸 중 중문을 중심으로 좌측에 온돌방 2통칸(원래 두지 1칸), 우측에 고방 1칸을 두었다.
기단은 시멘트 마감 위에 막돌초석을 놓아 네모기둥을 세웠다. 지붕은 홑처마 팔작지붕에 골기와를 이었다. 별사(경덕사)는 높은 축대 위에 정면 3칸, 측면 툇칸을 가진 익공계 건물이다. 전면 툇칸에는 두리기둥을 세우고, 내부는 통칸에 우물마루를 깔았다. 지붕은 홑처마 맞배에 골기와를 이었다. 귀암정은 정면 3칸, 측면 칸 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종택으로 들어가는 초입에는 용산강당이 서 있는데, 지암(止庵) 황영조(黃永祖)가 독서와 강학을 하던 곳으로 약 80년 전에 건립하였다 한다.
황지헌(黃智軒)은 단종 복위 사건에 연루되자 화를 피해 서울 동대문구 이현동에서 지금의 영주시 가흥2동 배고개로 피신해 살았다. 대룡산 창원황씨종택은 황효공의 손자 황언주(黃彦柱, 1553~1632)가 영주 배고개에서 살다가 처가 마을인 이곳 남역마을로 오면서 건립하였다. 남역마을 뒤 산록에 ‘口’자형 살림집이다. 그 후 1964년에 중수한 바 있다.
귀암정은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사간을 역임하고 역학을 연구하여 『역범도(易範圖)』를 지은 황효공을 추모하여 후손들이 건립하였다. 별사(경덕사)는 황효공을 향사하기 위해 1623년(인조 1) 건립하였다. 또한 경덕사 좌측에는 현 소유자의 부친과 다섯 형제의 뜻을 기린 오산정이 자리하고 있다. 오산정은 주산(住汕) 황종락(黃鍾樂), 동산 황시락(黃時樂), 한산 황성락(黃聖樂), 농산 황흥락(黃興樂), 하산(何汕) 황필락(黃必樂)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정자이다. 오산정에는 이수성 전 국무총리의 ‘오산정기’와 다섯 사람의 호를 새긴 편액이 걸려 있다.
황언주는 목사 황흠(黃欽)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덕수이씨로 참의(參議) 이거의 딸이다. 황언주는 10세 때 조부 황효공을 따라 영주 관아에서 퇴계 이황을 만났다. 이황은 황언주에게 『중용』의 첫 장 집주의 뜻을 물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기(氣)와 리(理)의 관계를 설명하고 “기가 먼저요, 리가 뒤입니다”라고 대답을 하자 퇴계가 “이 아이가 벌써 이기(理氣)의 변(辨)을 아니 장차 대성(大成)할 것이다”라고 칭찬했다고 한다.

참고문헌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Ⅰ』
유교넷(www.ugy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