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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암정(下巖亭)

영주 연안김씨 만취당종중(榮州 延安金氏 晩翠堂宗中0

87.0×105.4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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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하암정(下巖亭)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87.0×105.4
  • 건물명 하암정(下巖亭)
  • 공간명 영주 연안김씨 만취당종중
  • 서예가
  • 위치정보 경북 영주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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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암정(下巖亭)

하암정(下巖亭)

하암정(下巖亭)은 만취당(晩翠堂) 김개국(金蓋國)의 부친인 김몽득(金夢得, 1521~1601)이 경상북도 영천군(榮川郡, 현 영주시)에 세운 정자 편액이다. 이 편액은 영주 연안김씨(延安金氏) 만취당종중(晩翠堂宗中)에서 기탁한 것으로, 편액의 크기는 가로 105.4㎝, 세로 87㎝이다. ‘하암(下巖)’은 지명으로 김몽득이 이곳의 아름답고 뛰어난 경치를 좋아해 정자를 짓고 자호(自號)하였다고 한다.

글씨는 송성래(宋聲來)가 쓴 해서체이다. 무게감 가득한 대들보 같은 질감의 가로획이 늠름하다. 그 무거움을 능히 감당할 수 있는 자신감으로 세로획이 곧게 직각으로 결구되어 적막한 분위기를 점 하나가 깨뜨리며 ‘下(하)’ 자를 이루었다. 그 당찬 기운을 이어받은 붓이 고요한 움직임으로 ‘山(산)’ 자를 의젓하게 조형한다.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마른 획들이 바쁘게 오가며 빈틈없이 ‘巖(암)’ 자를 조형하는데 다시 그 견실한 힘을 회복하며 마무리함에서 숨 막히는 엄숙함이 시선을 압도한다. 다시 먹을 보충한 붓이 느린 걸음으로 움직여 높고 높은 ‘亭(정)’ 자를 조형하였는데 시원한 개방감과 함께 튼튼함에서 오는 안정감이 뚝뚝 묻어난다. 풍성한 여백을 거느린 ‘下’ 자와 치밀한 결구의 ‘巖’ 자 그리고 우뚝 선 ‘亭’ 자가 적당한 간격을 두고 늘어선 모습이 소소밀밀(疏疏密密 성긴 데는 성기고, 치밀한 데는 치밀함)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서예가 遯石 양성주)

영주 연안김씨 만취당종중 소개

김몽득(金夢得, 1521~1601)의 자는 천뢰(天賚), 호는 하암(下巖),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1521년(중종 16) 7월 4일 영주시 이산면 두암리(斗巖里) 집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통례원인의(通禮院引儀)를 지낸 김복흥(金復興)이고, 어머니는 함양박씨(咸陽朴氏)이다. 타고난 자질이 돈후(敦厚)하였고 기량이 홍원(弘遠)하였다. 어려서 독서를 좋아하여 어른의 가르침과 독려 없이 스스로 먼저 하였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17세에 부친상을 당하자 정성을 다하여 장례를 치렀으며 3년을 하루처럼 여막에서 곡을 하였는데, 그 마을을 사람들이 빈동(殯洞)이라 불렀다. 더 이상 부친이 계시지 않기에 과거 공부를 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수양에 노력하는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전념하였다.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퇴계에게 칭찬을 많이 받았다. 퇴계 사후에는 이산서원(伊山書院)을 맡아서 관리하였는데 예법에 맞게 경영하고 마음을 다해 추모하였다. 선조를 받듦에 풍약을 따지지 않고 정성과 효심을 다했으며 후사가 없는 외선조(外先祖)의 무덤에도 성묘(省墓)하였다. 지극한 행실로 인해 장사랑(將仕郞)과 김산훈도(金山訓導)에 천거되었다.
임진란에 백암(柏巖) 김륵(金玏)이 안집사(安集使)가 되어 의병을 일으켰는데, 김륵은 만취당(晩翠堂) 김개국(金蓋國)에게 의병대장의 직임을 맡도록 하였다. 김개국은 부모님이 연로하다는 이유를 들어 사양하였다. 그러자 김몽득이 “우리 집안은 대대로 국은을 입었으나 그 은혜를 조금이라도 보답하지 못했다. 네가 의병을 일으켜 작은 정성이라도 바치거라. 늙은 아비는 걱정하지 말거라. 나는 가솔을 데리고 산으로 들어가 네가 걱정하지 않도록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김개국이 울면서 부친의 명을 받들었다. 이때 보는 사람들이 슬퍼하며 말하기를 “하암의 충의(忠義)가 자식으로 하여금 큰일을 하도록 하였도다”라고 하였다. 이보다 앞서 김개국이 이미 노봉(蘆峯) 아래 오록(烏麓)마을에 노봉정(蘆峯亭)을 지어 놓았는데 김몽득이 이곳으로 가서 우거하였다. 이때 원근의 친구들이 와서 의탁하는 자가 많았다. 별좌(別坐) 김전(金㙉)은 서울에서 왔고, 부용당(芙蓉堂) 성안의(成安義, 1561~1629)는 창녕에서 왔는데, 극력으로 도와주었기에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1601년(선조 34) 7월 14일에 세상을 떴으며 부인은 공주이씨(公州李氏)로 진사 극온(克溫)의 딸이다. 슬하에 2남 4녀를 두었으며 장남은 개국, 차남은 팔국(八國)이다.
김개국은 자가 공제(公濟), 호가 만취당(晩翠堂)·양진재(養眞齋)·노봉(蘆峰)이다.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 1517~1586)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고, 1573년(선조 6) 생원시에 급제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3년 상을 치르는 동안 오 리 밖에 있는 묘소를 아침저녁으로 성묘했다고 한다. 1591년(선조 24)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을 사람들은 김개국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1595년(선조 28) 강원도도사로 부임하였는데, 당시 강원도관찰사였던 정구(鄭逑, 1543~1620)와 뜻이 서로 맞아 함께 선정을 베풀었다고 한다. 1596년(선조 29) 예조좌랑(禮曹佐郞)에 제수되었고, 1598년(선조 31) 충청도도사로 부임하였는데, 병환으로 업무를 보지 못했던 관찰사 대신에 명나라군을 조리 있게 대우하고 군무를 잘 다스렸다. 김개국은 1601년(선조 34) 아버지 봉양을 위해 외관을 구해 옥천군수로 부임하였으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2개월 만에 사퇴하였다. 짧은 기간 동안 옥천군수로 있었지만, 선정을 베풀어 고을을 떠날 때 백성들이 울면서 보냈다고 한다. 김개국의 문집으로 2권 1책의 『만취일고(晩翠逸稿)』가 있고, 일록(日錄)으로 『만취선조관동일록(晩翠先祖關東日錄)』과 『만취선조예조일기(晩翠先祖禮曹日記)』가 전한다. 『만취선조관동일록』은 1596년 1월 19일부터 1599년 2월까지 약 3년간 일상을 기록한 일기이다. 특히 『만취선조관동일록』에는 임진왜란 막바지와 전란이 끝난 직후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의 상황이 잘 묘사되어 있다. 『만취선조예조일기』는 예조좌랑을 역임했던 1596년 1월 19일부터 2월 16일까지 일과 충청도도사를 역임했던 1598년 6월 22일부터 11월까지 일을 기록한 일기이다.
김개국은 1605년(선조 38) 4월 선무원종공신에 녹훈되었으며, 사헌부집의에 증직되었다. 1650년(효종 1) 효행으로 승정원좌승지에 추증되었다. 1654년(효종 5) 삼봉서원(三峯書院)에 제향되었다. 삼봉서원은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철폐된 후 복설되지 않았다.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 1587~1667)는 삼봉서원에 배향된 네 분에 대해서 축문을 지어 이들의 덕행을 송축하였는데, 만취당 김개국에 대해서는 “소련(小連)처럼 거상을 잘하였고, 노공(魯恭)처럼 이적(異蹟)으로 다스렸네. 대대로 전승된 지조를 지켰으니, 훌륭한 명성 세상에 영원하리라[善居小連 異治魯令 操勵家傳 芳流世永]”라고 하였다.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1711~1781)은 김개국의 문집인 『만취일고』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하늘이 사람에게 부여한 기질은 고르지 않아서, 내면이 도타운 사람이 반드시 외면까지 겸비하는 것은 아니며, 재주가 넉넉하면 덕이 모자라는 경우가 많다. 이 두 가지는 근본과 지엽(枝葉)의 차이가 있고 중요하고 덜 중요한 차이는 있지만, 그러나 모두가 한쪽으로 치우친 것이어서 군자의 전덕(全德)이 되기에는 부족하다. 그러므로 온 집안이 효자라고 칭찬해도 겨우 차등(次等)의 선비가 될 뿐이고, 재능이 있어도 도를 듣지 못하였다면 군자가 취하지 않는 것이다. 만취(晩翠) 선생 김공(金公) 같은 분이야말로 재능도 있고 덕도 있으며, 내면이나 외면에 치우치지 않은 분일 것이다.
선생은 단정하고도 아름다운 자질을 타고나서 겸손의 미덕을 간직하였으며,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공부하고, 깨끗하고 고요한 마음을 지켰으므로, 도를 굽혀서 남을 따르지 않으셨다. 자신의 내면을 수양한 것이 확실히 순유(醇儒)의 모범이셨다. 그러나 이것은 범상한 학자들도 노력하면 가능한 것이다. 선생은 하늘에서 효성을 타고나 부모님을 순수하고 지극하게 봉양하였고, 상을 당해서는 슬픔을 다하여 피눈물을 흘리면서 나뭇가지처럼 여위어 세상을 떠났으니, 비록 옛날의 안정(顔丁)이나 이련(二連 대련과 소련)의 효성이라도 이보다 더했으랴.
선생이 임진왜란을 만나 의병장이 되어서는 군중을 모으고 복병을 설치하여 적을 많이 죽였고, 전라도관찰사를 보좌할 때에는 명나라 장수들을 접대하고 군량을 조달하였는데 계획을 세우고 안배한 것이 일마다 합당하였다. 시행한 일에 드러난 것을 보면 충분히 유용(有用)한 인재셨다. 그러나 이것도 지혜가 있는 자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선생이 몇 달 동안 지방의 수령으로 계실 때는 폐단을 없애고 백성의 고통을 덜어주었기 때문에 믿음을 주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백성들이 스스로 복종하였다. 상(喪)을 당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자 온 고을이 통곡하며 갓난아이가 자애로운 어미를 잃은 듯이 하였으니, 고사(古事)를 살펴보면 노공(魯恭)이나 이원굉(李元綋) 같은 사람이 여기에 해당될 것이다.
아! 안정과 이련 같은 재능은 세상에 쓰이지 못하였고, 노공과 이원굉 같은 덕은 사서(史書)에 드러나지 않았으니, 고금 인물들의 같고 다름은 쉽게 논할 수가 없다. 그러나 선생 같은 분은 양자를 겸비하고 군자의 체용(體用)을 온전하게 한 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쉽게도 하늘은 그에게 재주와 덕을 주셨지만 유독 수명만은 주지 않으셨다. 깊이 함양하고 잘 길러서 타고난 기량을 확충하여 내면에 수양된 덕을 더욱 넓히고 활용에 드러나는 재주를 확대하지 못하였으니, 이 어찌 후학들의 끝없는 유감이 아니겠는가.

참고문헌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김응조(金應祖), 『학사집(鶴沙集)』
김영(金瑩), 『괴헌집(槐軒集)』
이상정(李象靖), 『대산집(大山集)』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