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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현사(四賢祠)

영주 연안김씨 만취당종중(榮州 延安金氏 晩翠堂宗中0

31.2×73.0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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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사현사(四賢祠)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31.2×73.0
  • 건물명 사현사(四賢祠)
  • 공간명 영주 연안김씨 만취당종중
  • 서예가
  • 위치정보 경북 영주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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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현사(四賢祠)

사현사(四賢祠)

사현사(四賢祠)는 1654년(효종 5) 지방 유림의 공의로 경상북도 영천군(榮川郡, 현 영주시) 이산면 신암리에 건립한 삼봉서원(三峯書院) 사당 편액이다. 이 편액은 영주 연안김씨(延安金氏) 만취당종중(晩翠堂宗中)에서 기탁한 것으로, 편액의 크기는 가로 73㎝, 세로 31.2㎝이다. ‘사현(四賢)’은 삼봉서원에 제향된 삼로(三路) 김이음(金爾音, ?~1409), 온계(溫溪) 이해(李瀣, 1496~1550), 만취당(晩翠堂) 김개국(金蓋國, 1548~1603), 물암(勿巖) 김융(金隆, 1549~1593)을 말한다. 삼봉서원의 삼봉은 지명을 따서 서원의 이름을 붙인 것으로, 삼봉골 초입에 북봉(北峯), 서봉(西峯), 남봉(南峯) 등 세 봉우리가 우뚝하여 삼봉(三峯)이라 했다. 1650년(효종 1) 학문 활동이 활발했던 이곳에 함창김씨·진성이씨·연안김씨 세 문중이 삼봉촌에 삼봉서당(三峯書堂)을 세운 것이 삼봉서원의 시초이다. 1654년 서당에 묘우(廟宇) 3칸을 세우고 삼봉서원(三峰書院)이라 편액하였다. 삼봉서원의 강당은 명교당(明敎堂), 동재(東齋)는 박약재(博約齋), 서재(西齋)는 수양재(修養齋)라 명명하였다. 명교당의 ‘명교(明敎)’는 오교(五敎) 즉 오륜(五倫: 부자유친, 군신유의, 부부유별, 장유유서, 붕우유신)을 밝힌다는 의미이다. 박약재의 ‘박약(博約)’은 『논어』 「옹야(雍也)」에 “군자가 문에 대하여 널리 배우고 예로써 요약한다면 또한 도에 크게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君子博學於文 約之以禮 亦可以弗畔矣夫]”라고 한 데서 취한 말이다. 수양재의 ‘수양(修養)’은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마음을 보존하여 성을 기르는 것은 하늘을 받들어 섬기는 일이요, 일찍 죽고 오래 사는 것에 의혹을 품지 않고서 몸을 닦으며 기다리는 것은 천명을 세우는 일이다[存其心 養其性 所以事天也 夭壽不貳 修身以俟之 所以立命也]”라고 한 데서 취한 말이다.

글씨는 작자 미상의 해서체이다. ‘四(사)’ 자가 오른쪽에서 몸을 뒤로 젖히고 기운을 모아 왼쪽으로 갈수록 좁아지면서 방향성을 명확하게 하며, 다음에 오는 ‘賢(현)’ 자를 수식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밝히며 자리하였다. 반듯하게 벽을 형성한 획이 위로 치솟더니 가로세로 바쁜 움직임을 반복해 기운을 한곳에 모아서 꺾이다가 다시 차분하게 내려앉는 듯하더니 반듯하게 움직여 ‘賢’ 자를 우뚝 세웠다. 가히 우러러볼 만한 위용을 갖추었다. 넓은 품의 ‘示(시)’로 시작한 ‘祠(사)’ 자는 ‘賢’ 자에 바짝 다가가 보필하고 있는 모양이 안정적이다. (서예가 遯石 양성주)

영주 연안김씨 만취당종중 소개

삼봉서원(三峯書院)이 창건될 무렵의 신암1리 지역은 경상북도 영천군(榮川郡) 말암리(末巖里) 우금방(友琴坊)이라 부르다가 1750년경 행정구역을 면리(面里)로 개편하면서 말암면 우금리가 됐다. 조선 내내 그대로 내려오다가 조선 말 1896년(고종 33) 행정구역을 8도제에서 13도제로 개편할 때 경상북도 영천군 말암면 우금동이 됐다가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 때 영주군 이산면 신암1리가 되었다. 1980년 영풍군 이산면 신암1리, 1995년 영주시 이산면 신암1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또한 이 지역은 두암(斗巖), 말암(末巖), 원암(遠巖) 등으로 불러오다가 일제시대 때 신암(新巖)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으며, 지금은 얼음골에 17가구, 삼봉골에 7가구, 실래에 6가구 등 30여 가구가 산다고 한다.
삼봉골[三峯谷]은 400년 전 이곳에 삼봉서원을 건립하면서 자연스레 ‘삼봉골’이라 부르게 됐다고 한다. 얼음골[氷洞]은 이 마을에서 장수골로 넘어가는 고갯길에 소나무 숲이 울창하여 겨울에 얼어붙은 빙판길이 봄이 돼도 녹지 않아 ‘얼음골’이라 부르게 됐다. 실래[新川]는 조선 말 내성천 홍수로 온 마을이 떠내려가자 마을 사람들이 물길을 돌리고 나서 새로운 마을이 형성됐다 하여 ‘신내[新川]’라 불렀는데 발음이 변해 ‘실래’가 됐다고 한다.
김이음(金爾音, ?~1409)은 본관이 함창(咸昌), 자가 백옥(伯玉), 호가 삼로(三路)이다. 김용(金勇)의 아들로 1374년(공민왕 23)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376년(우왕 2)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1389년(공양왕 1) 지평(持平)에 임명되었고, 1391년(공양왕 3) 종4품 문하사인(門下舍人)에 올랐다. 조선 건국 뒤 우사간(右司諫)을 거쳐 1405년(태종 5) 강원도관찰사로 나갔으며 그 뒤 호조참판을 지냈다. 효행이 지극하여 정문이 세워졌다.
이해(李瀣, 1496~1550)는 본관이 진보(眞寶), 자가 경명(景明), 호가 온계(溫溪)이다. 진사 이식(李埴)의 아들이며,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형이다. 어려서 숙부인 송재(松齋) 이우(李堣)에게 글을 배워 1525년(중종 20) 진사가 되고, 1528년(중종 23)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33년(중종 28) 사간·정언 등을 거쳐 1541년(중종 36) 직제학에 올랐으며, 이어 경상도진휼경차관(慶尙道賑恤敬差官)·좌승지·도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544년(중종 39) 첨지중추부사·대사헌·대사간·예조참판을 지내고, 이 해에 또다시 대사헌이 되었다. 인종이 즉위한 뒤에도 계속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권신 이기(李芑)를 우의정에 탁용(擢用)하려는 것을 반대하고 탄핵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이기의 원한을 사게 되었다. 1545년(인종 1) 강원도관찰사에 이어 1547년(명종 2) 황해도관찰사, 1549년(명종 4) 청홍도관찰사를 거쳐 1550년(명종 5) 한성부우윤이 되었다. 명종이 즉위하면서 소윤이 득세하여 이기의 심복인 사간 이무강(李無彊)의 탄핵을 받아 무고 사건에 연좌된 구수담(具壽聃)의 일파로 몰리게 되었다. 그때 주위 사람들이 권세에 거짓으로 굴복하면 모면할 수 있다고 권하였으나 거절하였고, 김안로(金安老)가 인근에 살면서 권세로 이끌려 하였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다. 명종이 그의 결백함을 알고 특별히 갑산에 귀양 보내는 것으로 그쳤으나, 귀양 가는 도중 양주에서 병사하였다. 예서(隷書)에 뛰어났으며 선조 때 벼슬이 환급되었다. 시호는 정민(貞敏)이다.
김개국(金蓋國, 1548~1603)은 본관이 연안(延安), 자가 공제(共濟) 또는 공증(公證)이고, 호가 만취당(晩翠堂)이다. 김득몽(金得夢)의 아들로 영주 이산면에서 출생했다.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 1517~1586)의 문인이다. 1573년(선조 6) 사마시를 거쳐 식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 되어 왜적을 막는 데 활약한 공으로 삼조의 낭관을 거쳐 강원도사, 충청도사, 옥천군수를 역임했다. 천성이 착하고 효성이 지극하여 고향으로 돌아와 부모를 봉양하고 학문과 후학 양성에 전념하며 지냈다. 1650년(효종 1)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에 추증되었다.
김융(金隆, 1549~1593)은 본관이 함창(咸昌), 자가 도성(道盛), 호가 물암(勿巖)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중용』과 『대학』을 연구하였고, 산법(算法)과 천문학에 조예가 깊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격문(檄文)을 지어 여러 고을에 돌리고, 이듬해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참봉이 되었다.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 1587~1667)는 삼봉서원에 배향된 네 분에 대해서 축문을 지어 이들의 덕행을 송축하였다. 먼저 삼로 김이음에 대해서는 “행실은 증삼(曾參)·민자건(閔子騫)을 따랐고, 명성은 목은(牧隱 이색)·양촌(陽村 권근)과 병칭되었네. 아직까지 전형이 남아 있어, 영원히 잊혀지지 않으리로다[行追曾閔 名竝牧陽 尙有典刑 永世不忘]”라고 하였고, 온계 이해에 대해서는 “학문은 가정에서 익혔으나, 도는 시운에 관계되었네. 아름다운 명성이 남아 있으니, 백세토록 공경을 일으키리라[學修家庭 道關時命 餘芳所在 百世起敬]”라고 하였으며, 만취당 김개국에 대해서는 “소련(小連)처럼 거상을 잘하였고, 노공(魯恭)처럼 이적(異蹟)으로 다스렸네. 대대로 전승된 지조를 지켰으니, 훌륭한 명성 세상에 영원하리라[善居小連 異治魯令 操勵家傳 芳流世永]”라고 하였고, 물암 김융에 대해서는 “고가의 풍도와 아름다운 행실에, 스승의 가르침을 밝히었네. 훌륭한 명성 남아 있으니, 백세토록 영원히 전하리라[故家懿行 明師旨訣 餘芳所在 百世芬苾]”라고 하였다.

참고문헌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김응조(金應祖), 『학사집(鶴沙集)』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