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주메뉴 바로가기
  • 편액
  • 서체별 보기

명고서원(明皐書院)

야성정씨 참판공종택(괴음당)(冶城鄭氏 參判公宗宅(槐陰堂)0

42.0×126.5 / 해서(楷書)MORE

의견달기 URL
목록 이전 기사 다음 기사
  • 자료명 명고서원(明皐書院)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42.0×126.5
  • 건물명 명고서원(明皐書院)
  • 공간명 야성정씨 참판공종택(괴음당)
  • 서예가
  • 위치정보 경북 영양군
  •  
r0545_01.jpg
명고서원(明皐書院)

명고서원(明皐書院)

명고서원(明臯書院)은 김제군수를 지낸 장렬공(莊烈公) 정담(鄭湛, 1548~1592)과 문월당(問月堂) 오극성(吳克成, 1559~1616)의 의열(義烈)을 기리기 위해 지방 유림의 공의로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도곡리에 건립한 서원 편액이다. 이 편액은 야성정씨(冶城鄭氏) 참판공종택(參判公宗宅 괴음당)에서 기탁한 것으로, 편액의 크기는 가로 126.5㎝, 세로 42㎝이다. ‘명고(明臯)’는 서원이 위치한 일월면의 일월(日月)을 합한 글자인 ‘명(明)’에서 취하여 서원의 명칭으로 정한 것으로 보인다. 서원 건립의 배경을 살펴보면 1710년(숙종 36) 정담의 후손이 그의 충렬을 추모하여 영해 인량리에 향현사(鄕賢祀)를 세우고 매년 향사를 올렸다. 그 후 그의 자손들이 영양군 일월면 가곡리로 옮겼고, 종가 또한 이주하면서 명고서당을 서원으로 고치고 위패를 모신 뒤 명고서원이라 불렀다. 그 후 1829년(순조 29) 문월당 오극성을 추향하게 되었고, 사우(祠宇)도 향현사에서 충렬사(忠烈祠)로 개칭하였다. 건립 당시 경내 건물로는 묘우(廟宇)인 향현사(鄕賢祠)와 강당인 명교당(明敎堂) 그리고 동재(東齋)인 성인재(成仁齋), 서재(西齋)인 정의재(正義齋), 출입문인 충렬문(忠烈門) 등이 있었다. 묘우 옆에는 정공(鄭公)의 정려각(旌閭閣)을 세웠다.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묘우가 훼철되고 명고서원은 명고서당(明臯書堂)으로 그 기능이 축소되었다.

글씨는 작자 미상의 해서체이다. 세상의 밝고 분명함이란 이런 것이라는 듯 ‘明(명)’ 자가 당당하다. ‘皐(고)’ 자에 이르러 그 활달한 필력을 자랑하며 우뚝 세움이 위태로울 법도 하지만 꼿꼿하게 내리그은 강한 획이 중심을 잡고 서 있다. ‘書(서)’ 자에 이르러 필속이 더해지며 쾌활한 분위기를 이끌면서도 위엄을 잃지 않고 버티고 섰다. ‘院(원)’ 자에서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이 보이면서도 끝내 일탈에는 이르지 않는 절제를 보여준다. 빠를 필속에 의한 비백(飛白)이 군데군데 눈에 띄는데 서자(書者)의 의도와 달리 각수(刻手)의 의욕이 지나쳐 도드라져 보이는 점이 아쉽다.

야성정씨 참판공종택(괴음당) 소개

정담(鄭湛, 1548~1592)은 본관이 야성(冶城), 자가 언결(彦潔), 호는 일헌(逸軒)이다. 정담은 영덕 출신으로 울진군 평해읍 사동리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정창국(鄭昌國)이고, 어머니는 전의이씨(田義李氏)이다. 그는 어려서 경서와 역사서를 읽고 시를 익히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나 향시(鄕試)에서 낙방한 뒤로는 무술 연마에 뜻을 두었다. 그는 18세가 되던 해에 처음으로 무관에 종사하여 무인의 기질을 마음껏 펴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1583년(선조 16) 무과에 급제하여 회령판관으로 부임하였을 때 이탕개(尼湯介)의 변에 공을 세웠다. 경주판관(慶州判官), 도총부도사(都摠府都事) 등을 거쳐 1592년(선조 25) 김제군수(金堤郡守)로 나갔다. 이 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여 권율(權慄)의 지휘하에 나주판관 이복남(李福男), 해남현감 변응정(邊應井), 의병장 황박(黃樸) 등과 함께 웅치를 방어하였다. 이때 금산을 거쳐 전주를 점령하려는 고바야카와(小早川隆景) 휘하의 일본군을 7월 7·8일 양일간에 걸쳐 웅치에서 백병전을 벌이면서 끝까지 방어하여 그들의 진격을 막고 모두 전사하였다. 일본군은 그 충절에 경의를 표시하여 ‘조조선국충의간담(弔朝鮮國忠義肝膽)’이라는 묘비를 세웠다. 1690년(숙종 16) 정문이 세워졌고, 뒤에 병조참판에 증직되었으며, 영해 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다.
오극성(吳克成, 1559~1616)의 자는 성보(誠甫)이고, 호는 문월당(問月堂)이며, 본관은 함양(咸陽)이다. 아버지는 오민수(吳敏壽)이다. 1594(선조 27) 아우 오윤성(吳允成)과 함께 권무과(勸武科)에 합격하였다. 이후 선전관이 되어 남방의 적정(賊情)을 탐지하여 보고를 한 다음날에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가 되었다. 1596년(선조 29) 황간현감(黃澗縣監)에 제수되어 기발한 계교로써 적을 토벌한 공이 많았다. 그러나 벼슬은 시강원시독관(侍講院侍讀官)으로 원종록(原從錄)에 참가하는 데 그쳤다. 1597년(선조 30) 왜적이 다시 침입하자 병사(兵使) 이시언(李時言)의 진(陣)으로 가서 접전을 벌였다. 죽인 왜적이 2백여 명이었다. 그는 남원의 천병(天兵)이 패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구원하러 갔으나, 성이 이미 함락되어 돌아오는 길에 적을 만나 30여 수급을 획득하였다. 1598년(선조 31) 10월 아우 오윤성과 통제사 이순신의 막하로 가 왜적을 대파하였다. 1601년(선조 34) 훈련판관(訓練判官)으로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올랐으나, 곧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음주와 글을 읊으며 ‘문월당’이라고 호를 지었다. 1617년(광해군 9) 영해를 지나다가 운명하니 향년 59세였다.
명고서원(明臯書院)이 위치한 일월면은 조선 숙종 때에는 영양군이 없어지게 되어 영해군 덕봉면으로 불려 오다가 숙종 병진년에 다시 영양현이 되었을 때 북이면, 북초면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을 고칠 때에 이르러서 북이면의 전부와 북초면의 일부를 합하고 일월산의 이름을 따다가 일월면으로 부르게 되었다. 일월면은 기후를 보면 대륙성으로 낮과 밤의 일교차가 커서 기온이 고르지 않다. 겨울이 길고 해가 비치는 일조시간이 비교적 짧고 강우량이 적은 편이다. 10월 초가 되면 벌써 서리가 내리며 다음 해 4월까지는 서리가 여전하게 내린다. 평야는 주로 남쪽에 있으며, 특용작물이 많으며 고추는 대표적인 영양의 특산품이다. 음력 3월까지 눈 속에서 자란다는 금죽은 일월산 산채의 특산으로 옛날 임금의 수라상에까지 올랐다고 한다. 일월면의 길은 골짜기를 따라서 동부와 서부로 나 있다. 도계리에는 영양향교가 있고, 가곡리 가마실마을에는 장렬공 사당이 있고, 도곡리 웃가마실에는 1868년(고종 5) 헐린 명고서원 터에 명고서당이 있으며, 주곡리에는 월록서당이 있다.
서파(西坡) 류필영(柳必永, 1841~1924)이 지은 「명고서당기(明臯書堂記)」에는 명고서원 옛터에 명고서당을 건립하게 된 배경과 정담과 오극성의 인물됨을 잘 묘사하고 있어 옮겨보기로 한다.

일월산(日月山)은 웅장하게 높이 치솟아 마치 황금투구를 쓰고 칼을 차고서 전진(戰陣)에 늘어서 있는 듯하다. 다시 구불구불 아름답고 빼어나게 남쪽으로 내달려서 거의 10여 리 지점에 그윽한 별천지를 만들었으니, 곧 가곡리[佳谷村]이다. 그리고 동쪽 언덕 숲 굽이친 곳에 예로부터 명고서원(明皐書院)이 있었다. 때문에 증(贈) 참판(參判) 정선생(鄭先生)의 위패를 두고 제사를 지냈으며, 다시 문월당(問月堂) 오선생(吳先生)을 추향(追享)하였으니, 두 공은 시대가 같고 의(義)가 같으며 후인들이 존모한 것이 같기 때문이다.
정담(鄭湛)은 일찍이 이탕개(尼湯介)를 막아서 먼저 적을 무찌른 공이 있어, 웅장한 위엄과 뛰어난 계책이 이미 북문(北門)에 명성을 날렸다. 임진왜란을 당하여서 삼남 지방이 먼저 왜병들에게 도륙을 당하자 조정에서는 문무(文武)의 재주를 지닌 자를 선발하였는데, 여러 장수들과 사우(師友)들이 한 입으로 공을 추천하여 마침내 김제군수에 제수되었다. 공은 말 한 필에 몸을 싣고 달려와 상처 입은 병사들을 위로하고, 강한 왜적에 맞서서 적장을 쓰러뜨리며 왜구들을 사로잡으니, 우뚝이 일이 잘되도록 보호하거나 뒷받침하는 형세가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군 기밀이 망령되이 누설되어 적에게 포위[保障]를 당하고 마침내 위급하였다. 공은 힘껏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해지자 하늘을 향해 탄식하며 죽음을 맞이하였다. 비록 적들에게 패배하였으나 그 의열(義烈)함은 사람을 감동시켰고, 남은 위엄은 적들을 두렵게 하여 충청도 지방을 온전하게 지켜냈으니, 공의 한 번 목숨을 바쳤기 때문이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서 특별히 참판[亞卿]에 증직되었고, 또한 문경공(文敬公)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이 경연에서 이 일을 아뢰어 정문(旌門)의 은전이 내려졌다.
오극성(吳克成)은 젊어서부터 지략(志略)에 뛰어났다. 바야흐로 삼남 지방이 적들에 막혀서 소식을 통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탐문하려고 하였으나 적임자를 찾기 어려웠다. 공은 드디어 그 일을 하겠다고 청을 하고, 적정(賊情)과 군사 기밀을 모두 획득하였다. 인하여 싸우고 지키는 방략으로써 편전에서 임금을 알현하고 아뢰었다. 이에 특별히 임금의 장려와 격려를 받고, 지방으로 나가서 황간(黃澗)을 다스렸다. 군내의 병사를 이끌고 왜적을 공격하여 베어 죽인 자를 이루다 셀 수 없었고, 또한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을 좇아서 한산도 앞바다 싸움에 나아가 도운 공이 있어 앞뒤로 공이 높지만, 도리어 진실로 원종(原從)에 기록되거나 훈록(勳錄)에 기록되지는 않았다. 임진왜란이 안정된 뒤에 시독관(侍讀官)의 벼슬이 내려졌으나, 공은 이미 벼슬을 사직하고, 각건(角巾 은자의 관)을 쓰며 시골집에서 은거하였다. 이때 입으로 전쟁에서 승리한 옛일을 말하지 않았으니, 공명을 세우고도 잘 처신하였다 할 만하다.
두 공은 특별히 죽거나 살아 있는 것이 다르기는 하지만, 적과 싸우려는 의기와 나라에 보답하려는 충심은 균등하였으니, 이것이 하나의 의(義)이다. 마땅히 선비들이 함께 존숭하고 제사 지내는 예의로서 성대하게 받들고, 대청의 모습으로서 높이 드러내야 한다. 매양 향사를 모실 때마다 그 위대한 발자취를 생각하면, 백성들은 감동의 실마리가 있어서, 그 풍모가 영원히 전해지게 될 것이다.

참고문헌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유교넷(www.ugyo.net)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