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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휴정(晩休亭)

안동김씨 보백당종중(安東金氏 寶白堂宗中0

48.5×107.5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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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만휴정(晩休亭)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48.5×107.5
  • 건물명 만휴정(晩休亭)
  • 공간명 안동김씨 보백당종중
  • 서예가
  • 위치정보 경북 안동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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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휴정(晩休亭)

만휴정(晩休亭)

만휴정(晩休亭)은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 1431∼1517)이 1501년(연산군 7) 경상북도 안동시 길안면 묵계리에 건립한 정자 편액이다. 이 편액은 안동김씨(安東金氏) 보백당종중(寶白堂宗中)에서 기탁한 것으로, 편액의 크기는 가로 107.5㎝, 세로 48.5㎝이다. ‘만휴(晩休)’는 만년에 휴식을 취하겠다는 뜻으로, 만년 은거 지향적 삶이 내포되어 있다. 김계행의 후손인 동야(東埜) 김양근(金養根)의 「만휴정중수기(晩休亭重修記)」에서 “만휴정이라고 명명한 것은 김계행이 청일(淸逸)하신 풍치(風致)로서 지락(至樂)을 산수에 부치고, 행지(行止)를 천기(天機)로 징험하며, 물외(物外)에 소요하고 세사(世事)를 뜬구름으로 여긴 것에서 비롯되었다”라고 하였다. 김계행은 그의 나이 68세 되던 1498년(연산군 4) 지금의 안동시 풍산읍 소산 2리에 해당하는 설못[笥堤]에서 살았다. 이때 집 근처에 작은 집을 짓고 당호를 보백당이라 하였다. 보백(寶白)은 그가 일찍이 읊조린 시 “우리 집엔 보물이라곤 없나니, 있다면 청백만이 보물이다[吾家無寶物 寶物惟淸白]”라고 한 데서 취한 말이다. 그는 당호를 보백당이라 명명함과 동시에 그의 자호로 삼은 듯하다. 그는 이곳 설못에서 조용히 거처하며 성현이 남긴 글을 깊이 연구하며 많은 후학을 양성하였다.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의 아우 유천(柳川) 이만규(李晩煃)는 그가 지은 「보백당중수기(寶白堂重修記)」에서 보물을 세 등급으로 나누어 설명하면서 보백당의 청백 정신을 삼백 정신(三白精神)으로 승화하여 재해석하였는데 “대개 일찍이 사람들이 보물로 여기는 것에는 세 등급이 있다. 군자는 도덕을 품은 것을 자신의 보물로 여기고, 문사는 경적(經籍)을 탐닉하는 것으로써 보물로 여기며, 중인은 주옥 같은 보석을 보물로 여긴다. 선생과 같은 경우는 결백(潔白)으로써 마음을 다스렸고, 정백(精白)으로써 임금을 섬겼으며, 청백(淸白)으로써 백성들을 교화하였으니, 시종일관 ‘백(白)’ 자 한 글자를 자신의 보물로 삼았고, 또한 자손에게 편안함을 남겨주는 유일한 비결로 삼았다. 선생의 보물은 문사나 중인의 보물이 아니고 바로 도덕군자의 보물이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다.

글씨는 작자 미상의 행서체이다. 먹물을 흠뻑 머금은 붓이 느릿한 걸음으로 내려앉아 ‘日(일)’ 자를 조형하더니 바삐 오른쪽으로 뛰어올라 차분하게 움직이다가 예리한 흔적을 남기더니 기운을 한데 모아 천천히 거두어들이며 ‘晩(만)’ 자를 이루어냈다. 그 기운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붓이 다소 거친 느낌으로 ‘休(휴)’ 자를 조형하는데 수직의 강한 획이 허리를 곧게 펴고 서서 시원함을 선사하고 있다. 휴식을 취한 뒤라서인지 긴장감이 해소된 부드러운 획이 느린 발걸음으로 조형해낸 ‘亭(정)’ 자가 편안하다. 윤필 위주로 단조로울 수가 있는 분위기를 간간이 섞인 섬세하고 예리한 붓질이 지루함을 날려버린다. (서예가 遯石 양성주)

안동김씨 보백당종중 소개

김계행(金係行, 1431∼1517)의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취사(取斯), 호는 보백당(寶白堂)이다. 1430년(세종 12) 2월 풍산 불정동(지금의 풍산읍 하리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뛰어나고 몸가짐이 올발라서 장차 큰 그릇이 되리라는 기대를 모았다. 31세에 성균관에 유학하였으며 32세에 성주교수로 벼슬을 시작하였다. 이에 앞서 맏조카 김학조(金學祖)가 출가하여 국사가 되었으니 왕의 총애를 빙자하고 위세를 부리고 있었다. 하루는 성주에 이르러 마침내 향교로 가 김계행을 배알하려하니 목사가 이르기를 “국사께서는 수고로이 거동하실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사람을 보내어 김계행을 맞으려 했으나 김계행이 가지 않으니 국사가 부득이 가서 찾아뵙자 김계행이 이르기를 “너는 왕의 은총만 믿고 교만을 자행하느라 늙은 숙부를 찾아와 보지도 아니하고 도리어 늙은 숙부로 하여금 너를 찾아오라 하느냐?” 하며 매로 다스려 피가 날 지경이었다. 얼마 뒤 국사가 “숙부님께서 오랜 세월 과거에 고생하시온데 만약 벼슬 하실 뜻만 있으시면 힘써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니 김계행은 “너로 인해서 벼슬을 얻는다면 무슨 면목으로 세상 사람들을 보겠느냐?”라고 답해 국사는 두 번 다시 말하지 못하였다. 김계행은 성주교수로 있으면서 사림파의 거두였던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과 도의의 친교를 맺었으며, 관직에 큰 뜻을 두지 않았던 그는 50세가 되던 해 과거에 급제하였다. 이때 사헌부감찰에 올랐으나, 강직한 성품이 조정에 용납되지 않아 53세에 고령현감으로 나아가서 청렴함과 은혜로써 밝게 다스려 좋은 치적을 거두었다. 55세에 사간원정언이 되어 천재(天災)와 당시의 폐단과 인사행정의 문란함을 논계했다가 권신들의 미움을 사서 파직되었다. 다음 해에 홍문관교리, 홍문관부교리, 그다음 해에는 이조정랑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으며, 사양하고 벼슬에 나가지 않을 때마다 벼슬은 높아졌다. 62세에는 성균관대사성, 사간원대사간으로 있다가 63세에 홍문관부제학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풍산과 길안의 묵계를 오가면서 휴양하였다. 65세에는 도승지에 임명되었으며, 66세에는 다시 대사간에 임명되어 벼슬을 사양하였으나 윤허되지 않았으며, 이듬해에 시정의 부조리로 인한 폐단을 척결할 것을 간언했으나 용납되지 않자 즉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연산군이 즉위하면서 몇몇 권세 있는 신하들이 나라를 휘저어 나라가 날로 그릇되어가는 상황이었기에 선생은 그것을 바로 잡기 위한 우국충정으로 나라를 바로잡을 적절한 대책을 상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풍산에 보백당이란 서재를 짓고 학문을 연구하고 후배들을 양성하였다. 1498년(연산군 4)에 무오사화가 일어났다. 사림파가 새로운 세력을 이루게 됨에 이를 싫어한 훈구파들이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세조가 왕위를 빼앗은 사실을 비방한 글이라 하여 본래 선비를 싫어하는 연산군에 일러바쳐 김일손 등 많은 사림파 출신 선비들이 죽거나 귀양을 갔으며 김종직과 가까운 사이였던 선생도 의금부에 갇혀 고문을 받고 풀려났다. 그해에 대사간이 되었으나, 다시 의금부에 잡혀가 고문을 당하였으니 사간원에 있을 적에 자주 외척들과 권신들의 농간을 탄핵하였던 바 이들이 기회를 이용하여 앙갚음한 것이었다. 억울함이 밝혀져 풀려나 다시 이조참의를 거쳐 대사헌이 되었으나 앞의 사건으로 인하여 다시 의금부에 갇혀 70세가 된 노인의 몸으로 몇 년 사이에 18번이나 신문을 받았다. 다섯 달 동안의 모진 형벌을 치른 끝에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쓰다가 8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김계행은 죽음을 맞아 자질과 종손인 삼당(三塘) 김영(金瑛, 1475∼1528)을 불러 “집안 대대로 전해 오는 청백의 정신을 자손 대대로 공근하게 지킬 것이며 효우하며 화목하게 지내라. 더욱이 선조의 훈계를 소중히 여겨 너희들은 하나하나 준수할 것이며, 교만 방자하고 경박한 행동으로 가문의 명성을 실추시키거나 훼손시켜서는 안 된다. 상례와 제사는 오직 정성과 공경에 있는 것이니, 풍부와 사치에 힘쓰지 말라. 또한 나는 경악(經幄)에 오래 있으면서 군왕을 바르게 인도하고 시대의 폐단을 구제하지 못하였다. 살아서 이미 세상에 도움이 되지 못하였으니 죽어서는 장례는 간단히 하고 성명만 기록하여 무덤을 표시할 뿐 허황된 말과 지나친 미사로 남에게 비갈(碑碣)을 청하지 말라. 훌륭한 일이 없으면서 훌륭한 이름을 얻는 것은 내가 매우 부끄러워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1859년(철종 10) 이조판서로 추증되었으며, 응계(凝溪) 옥고(玉沽)와 함께 묵계서원에 제향되었다. 보백당의 불천위 휘일은 음력 12월 17일이다.
묵계는 길안에서 영천 방면으로 가는 국도를 따라 5km 정도에 있다. 원래 길안현에 속하였고, 1914년 오락을 합하였으며, 1995년 안동시 길안면 묵계리가 되었다. 묵계 1리와 2리로 나누는데 묵계 1리에는 선항리(仙巷里 서낭댕이), 상리(上里), 하리(下里 안룻마), 새마을, 구만(九滿 구마닛골) 등 5개 마을이, 묵계 2리에는 오락 1개의 마을이 있다. 원래 거묵역이라 불리던 묵계마을은 1500년(연산군 6) 보백당 김계행이 옮겨와 살면서 묵촌(黙村)으로 고쳐 불렀다. 그가 송암폭포 위에 만휴정(晩休亭)을 건립하고 정자 앞 냇물 모습을 보고 다시 묵계라 불렀다고 한다. 선항리는 묵계리의 북동쪽 언덕 기슭에 있는 남향 마을이다. 무오사화를 피하여 이주한 김계행의 종택인 보백당이 있고, 보백당의 동쪽에 묵계서원(默溪書院)이 있다. 묵계서원은 1706년(숙종 32) 건립된 것으로 김계행과 응계 옥고를 배향하였다. 그 후 1870년(고종 7) 훼철되었으나 1998년에 다시 지었다. 상리는 새마을에서 남동쪽 산기슭에 있다. 새들은 상리의 앞쪽에 있는 넓은 들판이다. 제잉골(재궁골)은 상리의 뒷산에 있는 골짜기다. 여기에 안동김씨(安東金氏) 재사(齋舍)인 달수재(達壽齋)가 있다. 하리는 새마을에서 남서쪽 마을로, 마을 뒷산에는 만휴정이 있다. 만휴정은 김계행이 만년에 조용히 쉬겠다는 뜻으로 건립한 정자로,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이며 팔작지붕이다. 정자 앞 용추 가에는 ‘보백당만휴정천석(寶白堂晩休亭泉石)’이라고 새긴 바위가 있다. 보백당종택(寶白堂宗宅)은 묵계서원과 함께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9호로 지정되었다. 이 집은 대문간인 행랑채와 본채인 口자 기와집과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보이는 건물인데, 현재 이 건물은 조상의 제사를 받드는 제청으로 사용되고 있다. 사당은 口자 집의 왼쪽에 위치하며 흙돌담을 두른 채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맞배지붕에 풍판이 달려 있다. 행랑채는 가운데 칸에 솟을대문을 두고 좌우 측면에는 방을 꾸민 정면 5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집이다.

참고문헌
『보백당실기(寶白堂實記)』
『안동의 문화유산』
『안동의 지명유래』
『안동의 명현당호2』
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
유교넷(www.ugyo.net)
황만기, 「만휴정과 영남 선비들의 교류」, 『국학연구』 제32집, 한국국학진흥원, 2017
황만기, 「청백의 정신이 피어나는 만휴정」, 『퇴계학』 제23집, 안동대학교 퇴계학연구소,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