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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곡정사(晩谷精舍)

영양 한양조씨 만곡고택(英陽 漢陽趙氏 晩谷古宅0

59.0×190.0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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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만곡정사(晩谷精舍)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59.0×190.0
  • 건물명 만곡정사(晩谷精舍)
  • 공간명 영양 한양조씨 만곡고택
  • 서예가
  • 위치정보 경북 영양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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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곡정사(晩谷精舍)

만곡정사(晩谷精舍)

만곡정사(晩谷精舍)는 만곡(晩谷) 조술도(趙述道, 1729~1803)가 학문을 가르치기 위해 1790년(정조 14)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원당리 선유굴 위에 세운 정사 편액이다. 이 편액은 영양 한양조씨(漢陽趙氏) 만곡고택(晩谷古宅)에서 기탁한 것으로, 편액의 크기는 가로 190㎝, 세로 59㎝이다. ‘만곡(晩谷)’은 지명에서 취한 말이지만,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 1777~1861)이 지은 조술도의 행장(行狀)에는 만문졸수(晩聞拙修)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만문졸수는 소식(蘇軾)의 「가난한 집에 마당을 깨끗이 청소하고[貧家淨掃地]」라는 시에 “낮은 선비가 늘그막에 도를 듣고서 애오라지 졸렬함으로써 스스로 수양하노라[下士晩聞道 聊以拙自修]”라고 한 데서 나온 말로, 외물(外物)에 이끌리지 않고 천진한 본성을 기른다는 뜻이다. 만곡정사의 처음 명칭은 미운정(媚雲亭)인데, ‘미운(媚雲)’은 주자(朱子)의 「운곡(雲谷)」 시의 “찬 구름은 계절을 가리지 않고, 이 산골짜기 여기저기 넘쳐흐르네. 다행히 장맛비 내리는 모습 적으니, 그윽이 홀로 지내기에 뭐 해가 되랴[寒雲無四時 散漫此山谷 幸乏霖雨姿 何妨媚幽獨]”라고 한 데서 비롯되었다.
만곡정사는 1997년 12월 19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41호로 지정되었다. 이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 반 규모의 홑처마 팔작집으로, 가운데 당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두었다.

글씨는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이 쓴 해서체이다. 맑은 하늘에 고운 자태로 떠가는 구름인 양 느긋한 붓질로 ‘晩(만)’ 자가 편안하게 자리하였다. 푸근한 두 점을 이고 그 아래 두 사선이 공간을 확보하고 그 속에 ‘口(구)’ 자를 슬쩍 밀어 넣어 ‘谷(곡)’ 자를 이루었다. 상부 두 점이 서로를 바라보는 듯하고 그 아래 형성된 좌우의 공간이 한쪽은 넓고 다른 쪽은 다소 좁게 구성되어 골짜기를 흐르는 계곡의 모습인 양 변화미를 갖추었다. 이어지는 ‘精(정)’ 자는 그야말로 정성스러움이 느껴지게 정밀하여 단정하다. ‘舍(사)’ 자는 그 내부를 왼편으로 슬쩍 치우치게 배치하여 우측에 넓은 공간을 확보하며 신선함을 부여하고 있다. ‘樊巖七十八書(번암칠십팔서)’라 써서 마무리하여 채제공이 78세의 노구를 이끌고 쓴 글씨임을 보여주고 있다. 글씨의 칠이 벗겨지고 나무의 문양이 드러나 노사(老師)의 꾸밈없는 글씨와 잘 어울린다. (서예가 遯石 양성주)

영양 한양조씨 만곡고택 소개

조술도(趙述道, 1729~1803)의 자는 성소(聖紹), 호는 만곡(晩谷)이며, 본관은 한양(漢陽)이다. 그는 조희당(趙喜堂)의 다섯째 아들로, 주실마을의 옥천종택에서 태어났다. 청년기까지는 과거 공부에 종사했으나 1759년(영조 35) 동생 조진도(趙進道)가 문과에 합격하고도 옥천(玉川) 조덕린(趙德鄰)의 손자라는 이유로 삭과(削科)되자 과거를 단념하고 성리서를 탐독하였다. 향인들이 조술도를 월과(月課)의 학정(學正)으로 추대하자 상벌을 엄격하게 행하는 한편 여씨향약(呂氏鄕約)에 준해 생도들을 가르쳤다. 1765년(영조 41) 이상정(李象靖)·김낙행(金樂行)의 문하에 입문하고, 김종덕(金宗德)·류장원(柳長源)·이종수(李宗洙)·정종로(鄭宗魯)와 학문을 토론하였다. 1776년(영조 52)에는 월록서당(月麓書堂)을 지어 후학들을 지도하고 ‘만곡(晩谷)’으로 자호하였다. 조술도는 조부 조덕린의 신원 운동을 위해 수차례 서울을 왕래했으며, 당시 남인의 영수 채제공과도 자주 접촉하였다. 그 결과 1789년(정조 13)에는 신원 운동이 성사되고 채제공과의 관계도 더욱 밀접해졌다. 조술도는 유학의 가르침에 충실해 서학(西學)·노장(老莊)에 대해서는 매우 엄정한 입장을 취했으며, 일생 사서(四書)·『심경(心經)』·『근사록(近思錄)』·주자서(朱子書)를 애독하였다. 만년에는 도산서원 유생들을 위해 「향음주고정의식(鄕飮酒攷定儀式)」을 제정하고, 『주서강록간보(朱書講錄刊補)』를 교열하였다. 경세론에도 조예가 있어 영양현감을 대신해 지은 9조항의 권농책(勸農策)은 유명하다. 만년에 도산서원 원장을 역임하고 호문(湖門) 6군자의 한 사람으로 칭송되었다. 저서로는 『만곡집(晩谷集)』이 전한다.
만곡정사(晩谷精舍)의 내력은 매오(梅塢) 조거신(趙居信, 1749~1826)이 지은 「만곡정사중건기(晩谷精舍重建記)」에 기록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다.

지금 이 만곡(晩谷)이라는 곳은 바로 문종산(文宗山)과 부용봉(芙蓉峰)이 동쪽에서 나와 남쪽으로 돌아 시내를 만나 뚝 끊겨 저절로 한 지역을 이루었다. 동부(洞府)는 그윽하고 깊으며 숲이 아름다워 은자들이 머물러 지낼 만한 곳으로, 바로 우리 만곡 선생께서 글을 읽고 도를 강론하시던 곳이다. 산골짝에 은거하며 기상을 드러내지 못하나 형제간의 즐거움으로 서로 지기(知己)로 여기며 시절마다 꽃과 나무를 심고 책을 보며 스스로를 즐기며 이로써 평생을 마치려고 하였다. 의리(義理)의 연수(淵藪)에서 침잠(沈潛)하고 훈회(訓誨)와 규범(規範)에 마음을 두며 거친 밥을 먹고 나물국을 마시며 세상일에 대해서는 잊어버렸다. 산속에서의 즐거움이 진실로 이와 같았다. 스스로 만곡(晩谷)이라 호를 삼고 이곳에서 늙어가고 이곳에서 세상을 마치겠다는 뜻을 드러낸 것이 거의 사십여 년이나 되었다. 그리하여 그런데 스승님이 세상을 떠나심에 재앙이 잇달았고 풍수가의 설 때문에 일개 후손이 집에 거처하지 못하여 황폐하게 되고 잡초가 가득하여 마침내 나무꾼과 소몰이꾼들이 오가는 곳이 되었다.
아! 선생께서 무탈하실 때 책을 가지고 그윽한 곳으로 가겠다는 바람을 평소 가지고 있었으나 그 적합한 장소를 만나지 못했다. 몽정(夢亭)·월담(月潭)·국동(菊洞) 사이를 배회하면서 미운정(媚雲亭)을 지었으나 인가(人家)와 동떨어져 있어서 수호하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또 이건(移建)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으나 비용만 낭비한 채 세 번 이건하여 세 번 허물어져서 단 하루도 조용히 지내지 못하시다가 갑작스럽게 우리 곁을 떠나심에 후학들로서는 천고의 한이 되고 말았다. 그렇기에 당시 선생에게 나아가 글을 배운 이들이 어찌 정자를 지어 홀로 거처하고 싶은 뜻이 없을 수 있겠는가.
금년 봄에 문하생 몇 사람이 비용을 모으고 재목을 마련할 것을 논의하였다. 그러나 다른 계산(溪山)에는 합당한 곳이 없어서 다시 옛터의 위아래를 찾다가 한곳을 정하게 되었다. 비록 아름다운 경치는 없으나, 뒷산이 높고 앞 봉우리들이 감싸며 물 형세가 굽이쳐 흘러 눈에 보이는 경치가 상쾌하여 학문으로 곳으로 삼을 만하였다. 고인(古人)들이 산으로 돌아간 일과 벼슬을 버리고 은거한 뜻을 대략 모방하여 한때 무심한 저 구름이 피어나는 그윽한 골짝을 다시 찾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모든 사람이 좋다고 하였다. 이에 직접 판과 삽을 들고 조금씩의 곡식도 모금한 뒤 들보를 함께 올림에 네댓 명의 장인(匠人)과 수십 명의 젊은이들이 온 힘을 다하여 몇 달이 못 되어 공사를 마쳤다. 정자는 모두 여섯 칸으로 가운데가 강당(講堂)이고 두 개의 협실은 방으로 삼아서 노소간에 편안하게 거처할 수 있게 하였다.

일월면은 영양군의 북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동서남쪽에 수비면, 청기면, 영양읍이 있으며, 북쪽으로는 봉화군 재산면과 소천면이 이어져 있다. 영양의 상징이라 할 일월산(日月山)이 북쪽으로 솟구쳐 있으며, 산맥은 다시 세 갈래로 나누어져서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장군천(將軍川)과 반변천을 끼고 남쪽으로 뻗은 산기슭에 주곡리(注谷里)가 이루어진다. 마을은 서쪽으로는 일월산의 갈래인 흥림산(興霖山)이 뻗어 내려 마을의 입구를 막고 있으며 감북골 서편에 영양읍과 경계를 만들고 있다. 흥림산 허리에 구름이라도 돌면 비가 오기 때문에 붙여진 산의 이름이라고 한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마을의 전경이 배 모양이라 하며, 마을의 중앙을 흐르는 장군천을 좌우로 하여 용골·논골·성지골·새미골·감북골·앞산골 등의 골짜기를 서로 마주하여 이루어져 주실(注室) 또는 주곡(注谷)이라 불렸다고 한다.
1630년(인조 8) 이전 이곳에는 주씨(朱氏)가 살았으나, 조선 중기 때 환란을 피해 이곳 주실로 와 정착한 한양조씨(漢陽趙氏)들의 집성촌이 되었다. 1630년 한양인 조전(趙佺)이 이 마을에 처음으로 들어와 정착한 뒤 매한(梅寒)이라 하였고, 1700년(숙종 26) 무렵 매계(梅溪) 혹은 매곡(梅谷)으로 불렀다고 한다. 1914년 행정구역을 고칠 때 감북동과 법곡동을 합하여 주곡리라 하였다. 마을의 뒤쪽에는 부용봉, 매방산이 있고 마을 앞쪽에는 갈미봉, 문필봉, 연적봉, 흥림산, 독산 등이 서에서 동으로 차례로 늘어서 있는데, 부용봉 아래에는 1997년 12월 19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41호로 지정된 만곡정사가 자리 잡고 있다.
이 마을은 실학자들과의 교류로 일찍 개화한 마을이면서, 또한 일제 강점기의 서슬 퍼런 압박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던 지조 있는 마을이다. 청록파의 시인이자 지조론의 학자였던 조지훈(趙芝薰, 1920~1968)을 비롯하여 한국 인문학의 대가 조동일, 조동걸, 조동원 교수 등 우리나라 역사에 남을 수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마을에는 조지훈 시인의 생가인 호은종택과 입향조 호은공의 증손자인 옥천 조덕린의 옥천종택, 1773년(영조 49)에 후진 양성을 위해 건립한 서당인 월록서당 등 유적들이 그대로 남아 있으며, 지훈문학관과 시 공원, 시인의 숲, 매년 5월 개최되는 지훈예술제 등 볼거리와 행사가 다양하다.

참고문헌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유교넷(www.ugyo.net)
조거신(趙居信), 「만곡정사중건기(晩谷精舍重建記)」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