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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림서당(道林書堂)

영주 도림서당(榮州 道林書堂0

40.5×90.2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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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도림서당(道林書堂)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40.5×90.2
  • 건물명 도림서당(道林書堂)
  • 공간명 영주 도림서당
  • 서예가
  • 위치정보 경북 영주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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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림서당(道林書堂)

도림서당(道林書堂)

도림서당(道林書堂)은 취수옹(醉睡翁) 박녹(朴漉, 1542~1632)이 1625년(인조 3) 부친인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 1517~1586)의 유지를 받들어 송상헌(宋尙憲, 1590~1653)·전이헌(全彛憲, 1579~1661) 등의 도움을 받아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면 두월리에 건립한 서당 편액이다. 이 편액은 영주 도림서당에서 기탁한 것으로, 편액의 크기는 가로 90.2㎝, 세로 40.5㎝이다.
‘도림(道林)’은 처음 도림서당이 건립된 곳이 영주시 이산면 내림리의 도봉산(道峯山) 아래 임고촌(林皐村)이었기 때문에 도봉산의 ‘도’와 임고촌의 ‘임’을 취하여 서당의 이름으로 정한 것이다. 이후 도림서당은 1780년(정조 4)에 중수하였으며, 1843년(헌종 9)경에 중건되었다. 1867년(고종 4)에 6칸의 집을 완성하였고, 1872년(고종 9) 김박장(金鏷丈)이 현재 위치로 이건하였다. 그리고 1903년에는 8칸으로 확장하였다.
도림서당의 규모는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평면 구성은 중앙의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둔 중당협실형이다. 2칸의 대청은 전면 기둥 밖으로 약 2척가량 돌출되게 설치해 놓았다. 좌우 온돌방은 뒷벽에 각기 반침을 두었다.
2010년 3월 11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67호로 지정되었다가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 번호가 폐지되어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재지정되었으나, 현재 관리 상태는 양호하지 못하다. 영주 지역의 대표적인 서당으로 해방 이후까지 강학을 지속한 기초 교육의 산실이었다. 또한 영주 도림서당의 사적을 정리해 놓은 『도림서당지(道林書堂誌)』가 전해 도림서당 역사를 살펴보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글씨는 작자 미상의 해서체이다. 두 손을 앞으로 가지런히 모은 듯 단아한 모습의 ‘首(수)’ 자에 목표를 향해 빠르지만 위엄을 잃지 않은 ‘辶(착)’을 받혀 쓴 ‘道(도)’ 자가 몸과 마음이 반듯한 선비인 양 차분한 분위기를 이끌며 의젓하다. 짧고 강한 획이 우상향 하는가 싶더니 이내 수직으로 떨어지더니 곧 치솟아 ‘木(목)’ 자를 이루고 또다시 우측으로 뛰어올라 가로획을 긋고 이어서 폭포처럼 내리꽂히며 좌우로 차분한 획을 더하여 구성한 ‘林(림)’ 자가 빠른 속도감으로 시작하여 안정된 붓으로 마무리하며 맑은 기운을 뿜어내며 이어진다. 차분한 호흡을 되찾은 붓이 오랜 세월의 지적 퇴적인 양 가로획을 겹쳐서 쌓고 세로획으로 짱짱하게 꾀어 엮어낸 ‘書(서)’ 자가 바로 앞에 놓인 책을 대하는 듯하다. 화려하게 이은 지붕과 그 안에 소박한 공간을 두고 튼튼한 기초위에 올려놓은 ‘堂(당)’ 자가 당당한 위용을 드러내며 우뚝 섰다. (서예가 遯石 양성주)

영주 도림서당 소개

박녹(朴漉, 1542~1632)의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자징(子澄), 호는 취수헌(醉睡軒)이다. 증조는 홍주판관을 지낸 박병균(朴秉均)이고, 조부는 진사 박형(朴珩, 1479~1549)이다. 아버지는 사간원대사간을 지낸 박승임(朴承任)이고, 어머니는 예천권씨로 집의를 지낸 권오기(權五紀, 1463~?)의 딸이다. 부인은 생원 허사렴(許士廉)의 딸 정부인 김해허씨(金海許氏)이다.
박녹의 반남박씨(潘南朴氏) 가문은 할아버지 박형 대에 처음 경상도 영주에 정착하였으며, 박녹이 영주 초곡방(草谷坊 지금의 영주시 문정동 한정마을 일대)으로 이거하면서, 초곡방 일대에 박녹 후손들이 세거하게 되었다.
박녹은 시(詩)와 예(禮)에 밝았지만, 아버지 박승임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과거에 뜻을 두지 않았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켰는데, 고을 사람들이 박녹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이때 박녹은 정탐과 복병을 통해 왜군이 영주 경내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박녹은 1594년(선조 27) 천거를 통해 태릉참봉에 제수되었고, 1595년(선조 28) 집경전참봉으로 옮겼다. 1598년(선조 31)에는 사근도찰방으로 부임하여 병란으로 피폐해진 민졸들을 안정시켰다. 1603년(선조 36)에는 의금부도사에 제수되었다. 1630년(인조 8)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에 올랐고, 90세가 되기 전 가선대부의 품계가 내려졌다. 박녹은 고향 초곡방에 정자를 짓고 소요하였는데, 아버지 박승임이 ‘하한정(夏寒亭)’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1938년 후손들이 하한정이 있던 자리에 삼락당(三樂堂)을 건립하였다.
송상헌(宋尙憲, 1590~1653)의 본관은 야성(冶城), 자는 숙도(叔度), 호는 독성(獨醒)이다. 선오당 이시(李蒔, 1569~1636)의 문인으로, 1633년(인조 11)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창계사(昌溪社)에 제향되었다.
전이헌(全彜憲, 1579~1661)의 본관은 옥천(沃川), 자는 윤보(倫甫), 호는 채지정(採芝亭)이다. 서애 류성룡의 문인으로, 용궁훈도를 지냈다. 수직으로 첨지중추부사를 제수받았다. 저서로는 『연역도(演易圖)』, 『채지집(採芝集)』 등이 전한다.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면은 대부분 구릉성 산지로 되어 있고 곳곳에 소규모의 산간 침식 평야가 발달되어 있다. 면의 남북을 관류하는 내성천 유역 일대에는 다소 넓은 논농사 지대가 전개되어 있다. 두월리는 조선시대 영천군 임지면 지역으로 두월산 아래에 위치해 있어 두달 또는 두월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하외리와 중외리 일부를 병합하여 두월리라 하고, 봉화군 상운면에 편입되었다. 1973년 3월 대통령령 제6543호에 의하여 영주군 이산면에 편입되었다.
두월리는 두월1·2리로 나누어져 있는데 두월1리에는 갈마골·덕골·시르미·두들 등의 마을이 있고, 두월2리에는 해맬·돌고개·사시골 등의 마을이 있다. 갈마골은 풍수지리설에 의거 ‘갈마음수형(渴馬飮水形)’이라 하여 갈마골이라 불렸다. 덕골은 충주지씨가 개척한 마을로 지씨의 덕과 의가 존중되어 덕곡이라 불렸다. 처음에는 봉화군 상운면 지역이었으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영주시에 편입되었다. 시르미(시림)는 마을 중앙에 떡시루처럼 생긴 산봉우리가 있다 하여 시르미마을로 불려 왔는데, 여산송씨들이 이곳에 주류를 이루고 있다. 목(木)·임(林)자가 들어가는 지명이면 잘산다고 하여 시림이라고 마을 이름을 바꾸었다. 해맬은 마을에 호수가 있었는데 매화가 유난히 피어 호매(湖梅)라 불렸고, 풍수지리상 매화낙지라고 한다. 두월리에는 조선시대 영천군의 동창이 있었던 동창터가 있으며 배유화의 팔사정이 있었다. 사시골은 해맬 북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사슴이 많이 있어 사시골이라 불렸으며 청백리 부용당 성안의 묘소와 신도비가 서 있다.
현재 두월에는 두들의 도림서당, 괴헌 김영이 지은 괴헌고택과 서실, 덕산정사, 두월리 약사여래좌상, 시르미의 동강 송계와 송원창의 묘 수호를 위해 건립한 영모재 등의 유적이 남아 있다.

참고문헌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유교넷(www.ugyo.net)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