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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래정(歸來亭)

안동김씨 감찰공파 둔굴재(安東金氏 監察公派 屯屈齋0

47.0×126.8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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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귀래정(歸來亭)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47.0×126.8
  • 건물명 귀래정(歸來亭)
  • 공간명 안동김씨 감찰공파 둔굴재
  • 서예가
  • 위치정보 경북 안동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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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래정(歸來亭)

귀래정(歸來亭)

귀래정(歸來亭)은 안동김씨(安東金氏) 감찰공파(監察公派) 후손인 둔굴재(屯屈齋) 김부일(金富鎰)이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는 것을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한 것으로, 편액의 크기는 가로 126.8㎝, 세로 47㎝이다. ‘귀래(歸來)’는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뜻으로, 중국 진나라의 도연명은 일찍이 집이 가난한 이유로 팽택현령(彭澤縣令)이 되었다가 부임한 지 겨우 80여 일 만에 벼슬을 버리고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으며 고향인 율리(栗里)로 돌아갔다. 그 「귀거래사」 첫 구절에 “돌아가리라! 전원이 장차 황무지로 변하려 하니 어찌 돌아가지 않으리오?[歸去來兮 田園將蕪胡不歸]”라고 하였다. 이는 전원 속에서 자연의 섭리에 따라 살아가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

글씨는 작자 미상의 해서체이다. 붓을 쥔 손에 힘을 주고 꾹꾹 누르며 삼절(三折)을 충실하게 수행하며 꽉 찬 느낌으로 단정하게 쓴 글씨가 숙연하다. 한 글자 한 글자 반듯하게 서 있으나 팽팽한 긴장감보다는 편안한 분위기가 흐른다. 관직을 버리고 고향의 전원으로 돌아간 선비의 인자한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직선인 듯 보이지만 꿈틀꿈틀 움직이는 율동감이 느껴지는 횡획(橫劃)과 느슨해질 수 있는 분위기를 다잡는 곧은 종획(縱劃)이 섞여 안정감을 준다. ‘來(래)’ 자는 가운데 위치하여 사선(斜線)을 거느리며 생기를 부여하고 있다. (서예가 遯石 양성주)


안동김씨 감찰공파 둔굴재 소개

우리나라에는 귀래정(歸來亭)이 여러 군데 있다. 이를테면 안동의 귀래정, 경주의 귀래정, 순창의 귀래정 등이 있다. 그러나 해당 편액은 어디에 있었던 것인지는 자세하지 않아 공간 해제에서는 다루지 않고 세 곳 귀래정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안동 귀래정은 현재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고성이씨(固城李氏) 안동 입향조인 이증(李增)의 아들인 낙포(洛浦) 이굉(李浤, 1440~1516)이 1513년(중종 8년)에 건립한 것이다. 그는 상류 낙동강이 합수(合水)되는 경승지에 정자를 짓고 동진(東晉)시대의 은일지사였던 도연명의 귀거래(歸去來)의 뜻으로 ‘귀래정’이라 편액하였다. 용재(容齋) 이행(李荇, 1478∼1534)이 편찬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안동대호부’ 조에 의하면 “귀래정(歸來亭)은 안동부의 동쪽 3리에 있으며, 유수(留守) 이굉(李浤)이 치사(致仕)하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와부탄(瓦釜灘) 가에 정자를 지었다”라고 되어 있으며, 용만(龍灣) 권기(權紀)가 편찬한 『영가지(永嘉誌)』에도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로 미뤄보면 예전의 귀래정은 낙동 강가에 위치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당시 건너편에 위용을 자랑하던 영남의 대표적 누각인 영호루(映湖樓)와 쌍벽을 이루었을 정도로 안동을 대표하는 정자였다. 귀래정 앞에 세워놓은 안내 표지판에 기록된 내용을 인용해보면 “이중환(李重煥)은 『택리지(擇里志)』에서 안동의 수많은 정자 가운데 임청각(臨淸閣), 군자정(君子亭), 하회(河回)의 옥연정(玉淵亭)과 함께 으뜸으로 꼽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4칸의 T자형 팔작지붕으로, 앞면에는 대청을 두고 뒷면에는 온돌방을 꾸몄으며, 마루 주위에만 둥근기둥을 사용하였을 뿐 그 외에는 모두 사각기둥을 사용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굉의 자는 심원(深源), 호는 낙포(洛浦) 또는 귀래정(歸來亭)이다. 그의 고조(高祖)는 고려 때 시중(侍中)을 역임한 행촌(杏村) 암(嵒)이고, 증조는 고성부원군(固城府院君) 문경공(文敬公) 강(岡)이며, 조부는 세종 때 좌의정을 역임한 용헌(容軒) 원(原)이다. 그리고 그의 부친은 영산현감(靈山縣監)을 지내고 이조참판에 증직된 증(增)이고, 어머니는 경주이씨(慶州李氏)로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 이희(李暿, 1404~?)의 딸이다. 25세인 1465년(세조 11) 진사시에 입격하였고, 40세가 되는 1480년(성종 11)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봉상시부정(奉常寺副正)·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예빈시정(禮賓寺正)·승문원판교(承文院判校) 등을 거쳐 군위현감(軍威縣監)·상주목사(尙州牧使)·경상좌도수군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 등을 역임하였다. 타고난 자질이 영특하고 매우 침착 과묵하였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들과 우애하였으며, 벗과 다른 사람을 각별하게 마음과 예의를 다해서 대하여 모두에게 환심(歡心)을 샀다. 시문(詩文)은 평담(平淡)하여 제배(儕輩)들의 대단한 추중(推重)을 받았다. 서울에 있을 때 영상(領相) 문성 부원군(文城府院君) 유순(柳洵), 이상(二相) 한산군(漢山君) 이손(李蓀), 판서(判書) 안침(安琛), 참판(參判) 김선(金瑄) 등 10여 분과 공은 모두 남학(南學)에서 함께 공부한 옛날 동배들인데 이때에 이르러 나이가 모두 70세를 넘겨 기로회(耆老會)를 결성하여 좋은 날 아름다운 계절이면 돌아가며 집에 모여서 술을 마시며 담소(談笑)하고 강론(講論)하니, 사대부들이 모두 감탄하고 경모(景慕)하여 성대한 일이라며 낙중기영회(洛中耆英會)에 비견하였다. 그러다가 퇴거(退居)해서는 벼슬에서 물러나 향리에 와서 살고 있는 대부(大夫)들과 향리의 순근(諄謹)한 노상사(老上舍)들과 함께 진솔회(眞率會)를 만들어 꽃피는 아침이나 달뜨는 저녁이면 모여 즐겁게 술을 마셨다. 집안이 가난하였으나 걱정하지 않으며 있고 없음을 묻지 않았으며 손님이 이르면 음식 대접을 독촉하고 음식이 모두 동이 나도록 은근하게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지내는 것을 예사로 하였다.
경주 귀래정은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다산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자 건축물이다. 1991년 5월 14일 경상북도의 민속문화재 제94호로 지정되었으며, 2019년 11월 14일 대한민국의 보물로 지정 예고를 거쳐, 2019년 12월 30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2052호로 승격되었다. 귀래정은 1755년(영조 31) 천서문중에서 건립하였고, 이후 1798년(정조 22) 21세손 이지한(李之翰, 1749~1827)을 거쳐 1938년 문중의 논의를 통해 선조 숭모 사업의 일환으로 애초에는 ‘육화정(六花亭)’이라 하였으나, 예조정랑을 지낸 지헌(止軒) 이철명(李哲明, 1477~1523)을 모시면서 선생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왔다는 뜻을 기려 당호(堂號)를 ‘귀래정’이라 하였다. 춘사(春沙) 이병관(李炳觀, 1858~1949)과 후손 이대원(李大源)의 「귀래정기(歸來亭記)」가 전한다.
건축물을 보면 사랑채와 안채가 별도의 공간을 구획하여 전후로 배치되어 있는데, 귀래정은 전면에 있는 사랑채의 당호로, 사랑채로서는 이례적으로 정육각형의 평면을 채택하여 정자와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육각형 평면의 정자에는 내부에 온돌방을 두는 경우가 거의 없으나, 이 건물에는 평면의 교묘한 분할로 육각의 평면 내에 방형을 앞뒤로 나누어 앞은 마루로 하고 뒤는 온돌방을 설치하여 사랑채로서의 기능을 하게 하였다. 평면은 육각형을 전후로 크게 나누어 두 개의 사다리꼴로 만든 후 전면에는 대청을 꾸미고 후면에는 사다리꼴에 내접하는 사각형의 방 2개를 들이고, 나머지 삼각 부분은 출입 공간과 반침으로 꾸몄다. 주상(柱上)에는 이익공으로 장식하였으나, 일반적인 예와는 반대로 외부에는 제공(諸貢)의 뿌리를 단절하였고, 내부에는 초각(草刻)을 하였다. 천장은 서까래가 보이는 연등천장과 빗천장, 우물천장 등으로 되어 있다. 평면 구성이 육각형으로 특이하며, 연못에는 입수구가 따로 없고 물이 땅에서 샘솟는 특이한 관개(灌漑)로 구성되었다. 조경 구성 역시 독특하여 우리나라 전통 건축의 정원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이철명은 자신의 호 ‘그칠지(止)’처럼 매사에 분수를 지켜 만족하여 그칠 줄 아는 실천적 학자의 삶을 살았다. 지위가 낮은 벼슬살이를 하면서 한결같은 마음으로 나랏일을 근심하고 임금을 사랑하여 충성으로 섬겼을 따름이었고, 모친 초상에 여막을 짓고 효도를 다하였으며, 사화를 당해 벼슬에 미련을 두지 않고 편안하게 여겼으니, 지족(知足)을 실천한 인물이었다.
순창의 귀래정은 1456년(세조 2) 신숙주의 아우인 신말주(申末舟, 1439~1503)가 지은 정자로, 지금 있는 건물은 1974년에 고쳐 지은 것이다. 신말주는 수양대군(세조)이 조카 단종을 내몰고 왕위에 오르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켜 벼슬에서 물러나 순창으로 낙향하였다. 건물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팔(八) 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안쪽에는 서거정이 지은 「귀래정기(歸來亭記)」와 강희맹의 시문을 보존하고 있다. 1975년 2월 51일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67호로 지정되었으며 순창읍에서 88올림픽고속도로 진입로를 따라 1㎞ 지점에 있다.
귀래정을 지은 신말주는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자집(子楫), 호는 귀래정(歸來亭)이다. 서화가(書畵家) 신덕린(申德隣)의 증손으로, 조부는 공조참의 신포시(申包翅)이고, 부친은 공조참판 신장(申檣, 1382~1433)이며, 어머니는 정유(鄭愈, ?~1372)의 딸이다. 그리고 보한재(保閑齋) 신숙주(申叔舟, 1417~1475)의 동생이다. 1454년(단종 2) 생원시에 합격하고, 같은 해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여 벼슬이 대사간에 이르렀다. 성격이 조용하고 담담하여 벼슬하기를 즐기지 않았다. 단종이 왕위에서 물러난 이후로 벼슬을 사임하고 물러나 순창에 살면서 귀래정을 지어 산수를 즐겼다. 형 숙주가 강권하여 벼슬에 나오게 하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한편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그가 1470년(성종 1) 봄에 순창에 내려가 오래 귀경하지 않아 한때 파직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뒤 1476년(성종 7) 전주부윤, 1483년(성종 14) 창원도호부사, 1487년(성종 18) 경상우도병마절도사와 대사간, 이듬해 첨지중추부사·전라수군절도사를 지냈다. 1503년(연산군 9) 12월 순창에서 75세로 세상을 떠났다.

참고문헌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