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계정(光溪亭 )
광계정(光溪亭)은 광계(光溪) 남상소(南尙召, 1634~1709)가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원구리에 세운 정자의 편액이다. 이 편액은 영양남씨(英陽南氏) 영해 광계정에서 기탁한 것으로, 편액의 크기는 가로 91㎝, 세로 41㎝이다. ‘광계’는 남상소의 호로, 정자가 있는 영해면 원구리 광동의 시냇가에서 따온 것이다.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 1842~1910)가 지은 「광계정기(光溪亭記)」에 광계정 건립 배경과 규모 등에 대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원고(元皐)의 광계정(光溪亭)은 고 성균관진사 남공(南公)의 정자이다. 정자가 예전에 삼광동(三光洞)에 있었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퇴락하자 후손인 호직(浩直) 등 여러 사람이 정자가 있던 유허지에 ‘광동별서(光洞別墅)’라는 네 자를 새기고, 고향인 원고에 열다섯 칸짜리 집을 사서 ‘광계정’이란 옛 편액을 달았다. 원고가 삼광동의 하류이기 때문에 풍광이 같을 뿐 아니라 자손들이 관리하기 편하고 공부하며 쉬기에도 적당하기 때문이었다. (중략) 회갑을 맞은 다음 해에 비로소 정자를 짓기 시작하였는데 모두 여덟 칸의 초가집에 나무를 심어 울타리를 삼고 거적자리를 덮어서 문으로 삼으니 그 즐거움이 도도하였다. 당시에 장자 하명(夏明)과 막내 조카 구명(九明), 종질 준명(峻明)이 이미 잇따라 과거에 합격하였고, 무자년(1708년, 숙종 34)에 차자 한명(漢明)이 진사가 되었다. 시냇가 바위 위에 자리를 마련하니 이미 우관(郵官)이 된 장자와 막내 조카가 문안 오고, 큰조카 노명(老明)과 종손 국한(國翰)은 모두 문과에 합격한 선배로서 장난을 하였다. 공은 윤건(綸巾)을 쓰고 야복(野服)을 입고서 윤택한 머릿결에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로 즐거워하며 장수를 축원하는 술잔을 받고 자제들의 효도를 즐기었다. 한집안에 뛰어난 인물과 영화가 집중된 것에서 그 조상 대대로 쌓아 온 덕이 보답받았음을 증험할 수 있으니 산수와 초목조차 기뻐하고 빛을 더한 것이 어떠하겠는가.
아, 다음 해에 공이 세상을 떠나고, 또 3년 뒤 신묘년(1711)에 크게 흉년이 들자 마침내 자손들이 흩어지고 가산이 탕진되어 정자를 보전하지 못하였다. 이후 200여 년 동안 자손들이 유허지를 지적하며 안타까워하고 다시 일으켜 세우려고 생각해 왔으니 반드시 적당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오늘날 여러분의 손에서 성취되었으니 천시(天時)와 인사(人事)가 기다려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기는 하나 앞으로 이곳에서 공부하고 이곳에서 쉴 여러분은 장차 어떤 방도로 선조의 사업을 계승한다는 본래의 취지를 확충할 것인가?
공이 지은 시에 이르기를,
소나무로 울을 삼고 풀로 집을 지어 松爲籬落草爲廬
사슴 돼지 함께 산천초목에 지내네 鹿豕同遊木石居
막내 아이가 늘상 곁에 있는 덕분에 賴有季兒長在側
거문고 책으로 종일토록 서로 즐기누나 琴書終日樂于胥
하였다. 막내아들 수당공(守堂公) 남제명(南濟明)이 화운하기를,
여기서 봉양함이 참된 첫째 즐거움이니 就養此間眞一樂
인생 백 년의 부귀영화 화서국과 같다네 百年榮貴等華胥
하였다. 이제 두 시를 읽어보면 아버지는 자애롭고 자식은 효성스러우니, 이것이 바로 광계정의 참된 즐거움이요, 사서(四書)와 육경(六經)은 모두 그 즐기는 도구임을 알겠다. 진실로 제현들이 반드시 이에 힘쓰고 여기에 종사하여 겨울에 다습고 여름에 시원하게 해드려 하찮은 일에도 혹 소홀함이 없게 하고, 밤낮없이 부지런히 힘써 혹 외물에 뜻을 빼앗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겠다. 온갖 행실과 모든 선행이 이 효로 말미암아 진보하나니, 그렇다면 예전 가문이 성대했을 때 두루 갖추었던 자손들의 복이 오늘날에 다시 오지 않으리라 어찌 장담하겠는가.
글씨는 작자 미상의 해행체이다. 봄날의 따스한 햇살인 양 부드러운 원필(圓筆)이 휘감은 ‘光(광)’ 자가 넉넉한 품으로 서 있다. 굽이굽이 세찬 물살을 안은 ‘溪(계)’ 자가 다소곳한 모습으로 자리하였다 이 모든 풍광을 조망하기에 안성맞춤인 듯 시원한 상승감을 갖춘 ‘亭(정)’ 자가 우뚝하다. 세 글자 모두 곡선 위주의 원필(圓筆)로 마무리하였으나 그 속에 응축된 힘으로 인하여 유약함은 보이지 않는다. 봄날의 따스함과 계곡의 시원함이 넉넉한 여백과 함께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亭’ 자에 응축해 정감 있는 편액이 완성되었다. (서예가 遯石 양성주)
영양남씨 영해 광계정 소개
남상소(南尙召, 1634~1709)의 자는 유보(幼輔)이고, 호가 광계(光溪)이다. 본관은 영양(英陽)이고, 거주지는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이다. 조부는 난고(蘭皐) 남경훈(南慶薰, 1572~1612)이고, 부친은 남길(南佶)이다. 남길의 2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형은 남상주(南尙周)이다.
1654년(효종 5) 부친상을 당하여 3년상을 치렀으며, 1657년(효종 8) 향시에 합격하였다. 1660년(현종 1) 식년시 진사 3등 34위로 합격하여 성균관에 몇 년 동안 거처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어머니 단양신씨(丹陽申氏)를 봉양하고 선친의 제사를 정성껏 받들었다. 1674년(현종 15) 모친상을 당하여 정성을 다해 상을 치렀으며, 이후로는 과거에 대한 마음을 접고 후진 양성에 매진하였다. 청렴한 절개로 지조를 지키고 온화한 후덕함으로 남들을 대하였으며, 후생들을 잘 가르쳐 인도해서 성취하는 바가 많았다. 아들은 남하명(南夏明)·남한명(南漢明)·남진명(南晉明)·남송명(南宋明)을 두었다.
남상소의 10세손인 남붕(南鵬, 1870~1933)은 1923년 8월에 경주에 와서 머무는 동안 그곳에 사는 여러 족인을 모아 놓고 남상소를 기리는 계회(契會)에 새로 가입하는 사람들의 명단을 추가로 기입한 「광계정추입계첩(光溪亭追入契帖)」을 만들었다. 그 후 남붕은 광계정 계회의 운영 자금을 관리하는 일에도 신경을 썼다. 9월 12일에는 경주시 암곡동에 사는 족인을 모아 놓고 「광계정추입계첩」을 수정하고 유사(有司) 남걸조(南杰朝)에게 보문·암곡·구어동의 여러 족인의 명전(名錢)을 합한 80여 금을 주었다. 그중에는 돈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도 있어 남붕이 대신 빌려주고 차후 다시 받기로 하고 내어주기도 했다. 남붕은 남걸조에게 명전을 그냥 갖고만 있지 말고,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계책으로 삼으라고 일렀다.
1924년 1월 초에 다시 경주에 와서 머물고 있던 남붕은 2월 5일 여러 족조를 만나 해조(海朝) 족조의 집에 가서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광계정 계전(光溪亭契錢)을 거두었는데, 미처 거두지 못한 것은 교숙(敎淑) 족조가 모아서 차후에 남붕에게 가지고 오기로 약속을 하였다. 2월 9일 외동읍 구어리에 사는 남의조(南宜朝)가 광계정 계전을 거두어 모아 왔는데, 모두 17원 18냥이었다. 나머지 6명이 내지 않은 6냥은 남의조에게 위임하였다. 11일에는 머물고 있던 사상재에서 행장을 꾸려 나와 경주 읍내로 나왔다. 13일에는 집으로 돌아갈 계획을 세웠는데 가기 전에 몇 명을 더 만나고 가야 해서 미리 나온 것이다. 그런데 계전이 잘 모이지 않았다고 하여 아무래도 집으로 돌아갈 날을 며칠 더 미뤄야 할 것 같았다. 12일 저녁에 남붕은 공낙중(孔洛中)의 집에 가서 며칠 전에 도착했다는 옥금의 족조 남효구가 보낸 편지와 경주시 암곡동의 남교태가 보낸 편지를 전해 받아 보았다. 그런데 암곡동에 사는 남교태의 편지에서 광계정 계전을 아직 거두지 못했으니 남붕에게 직접 한 번 와주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다음 날 남붕은 암곡동으로 향했는데, 경주시 안강읍 청령리에서 천북면 덕산리·물천리·손곡리의 산길과 눈 내린 고개를 넘어 온갖 어려움을 겪으며 도착하였다. 날이 이미 저물어서 초곡(草谷)의 집에 들어가 잤다. 2월 14일 아침에 남붕은 족인인 남걸조에게 내일 모여서 회의하기로 정하고 대략 술과 안주를 준비하게 하였다. 약속 시간에 계정(溪亭)에 모여 광계정계(光溪亭契)의 문기(文記)를 작성하였다. 암곡의 명전(名錢)은 26냥이고, 보문의 명전은 이자와 함께 37냥 1전 5푼이며, 구어동의 명전은 19냥이니 합이 82냥 6전 5푼이었다. 4냥 7전을 술과 안주 값으로 기록하였다. 실제 남은 돈 77냥 9전 5푼은 남교원(南敎源)에게 넘겨주었다. 2월 15일 아침을 먹은 뒤에 여러 족인이 와서 모였다. 이에 광계정 계전 77냥 9전 5푼을 거두어 모아서 새로 유사가 된 남교원에게 넘겨주고, 내년 2월 15일에 다시 거두어들일 것을 약속하였다. 일을 마친 남붕은 다시 길을 나서 밤늦게 보문동에 이르러 잤다. 2월 16일 남붕은 보문동에서도 아직 거두지 못한 계전을 거두었는데 겨우 3냥이었다. 그 나머지는 족조인 남교일(南敎一)에게 부탁하고서 집으로 돌아왔다.
참고문헌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유교넷(www.ugyo.net)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