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주메뉴 바로가기
  • 편액
  • 서체별 보기

태고정(太古亭)

안동김씨 삼당공파 현애문중(安東金氏 三塘公派 玄厓門中0

35.6×87.5 / 해서(楷書)MORE

의견달기 URL
목록 이전 기사 다음 기사
  • 자료명 태고정(太古亭)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35.6×87.5
  • 건물명 태고정(太古亭)
  • 공간명 안동김씨 삼당공파 현애문중
  • 서예가
  • 위치정보 경북 안동시 풍산읍 현애리
  •  
r0528_01.jpg
태고정(太古亭)

태고정(太古亭)

태고정(太古亭)은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현애리에 있는 태고정 편액이다. 태고정은 삼당(三塘) 김영(金瑛, 1475~1528)이 서울 인왕산 동쪽 기슭의 북쪽 종로구 청운동 54번지 일대 골짜기에 건립한 정자인데, 1936년에 이곳으로 이건한 것이다. 이 편액은 안동김씨(安東金氏) 삼당공파(三塘公派) 현애문중(玄厓門中)에서 기탁한 것으로, 편액의 크기는 가로 87.5㎝, 세로 35.6㎝이다. ‘태고(太古)’는 중국 북송시대의 시인 당경(唐庚)이 「취면(醉眠)」 시의 “산은 태고처럼 고요하고 날은 소년처럼 길도다[山靜似太古 日長如少年]”라고 한 데서 취한 말이다. 태고정은 건립 연대가 정확하지 않으나, 김영(金瑛)이 1507년(중종 2)에 예문관대교로 재직 중 예문관 관원들과 함께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에 희생된 김종직(金宗直) 등의 신원을 주청하는 상소를 올린 뒤 벼슬에서 물러날 뜻을 가지고 인왕산과 필운대 사이에 지은 것이다. 『중종실록』 권3에 따르면 김영은 1507년(중종 2) 6월 10일(임오)에 예문관봉교 김흠조(金欽祖)와 정충량(鄭忠樑), 대교(待敎) 이희증(李希曾), 검열 윤인경(尹仁鏡)·정웅(鄭熊)·윤지형(尹止衡) 등과 함께 상소를 올려 김종직과 김일손 등의 신원을 주청하였다. 그리고 김태동(金台東)은 1936년에 지은 「태고정이건기(太古亭移建記)」에서 “선조(先祖) 삼당(三塘) 부군이 무오제현(戊午諸賢)의 신원을 주청하는 상소를 올린 뒤 시휘(時諱)에 저촉되자 벼슬에서 물러날 뜻을 가지고 인왕산과 필운대 사이에 모정(茅亭)을 짓고 정자 앞에 삼당(三塘)을 조성한 뒤 ‘태고정’이라는 편액을 달고 중씨(仲氏) 김번(金璠, 1479∼1544)과 함께 여기에서 거처하였다”라고 하였다. 태고정 건립에 관해서는 동야(東埜) 김양근(金養根, 1734~1799)이 지은 「풍계집승기(楓溪集勝記)」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청풍계(靑楓溪)는 우리 선세(先世)의 구거(舊居)로 근래에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 선생의 후손들이 주인이 되었다. 서울 장의동(壯義洞) 서북쪽에 있는데, 방(坊)은 순화방(順化坊)이고 산은 인왕산이다. 일명 청풍계(靑楓溪)라고 하는데, 풍(楓)으로 명칭을 언급한 것은 반드시 의미가 있을 터이지만 지금은 상고할 수 없다.
백악산이 청풍계 북쪽에 웅장하게 솟아 있고 인왕산이 그 서쪽을 에워싸고 있는데, 개울 하나가 우레처럼 흘러내리고 세 개의 못이 거울처럼 펼쳐져 있다. 서남쪽 여러 봉우리의 숲과 골짜기는 더욱 아름답고, 시내와 산의 승경은 도성 안에서 최고이다. 반룡강(蟠龍崗)은 혹 와룡강(臥龍崗)이라고도 하는데, 실로 집 뒤쪽의 주산이 되며 그 앞이 곧 창옥봉(蒼玉峰)이다. 창옥봉 서쪽으로 수십 보 떨어진 곳에 작은 정자가 날아갈 듯이 시냇가에 임해 있다. 짚으로 지붕을 이었는데 한 칸은 넘고 두 칸은 되지 않는다. 수십 명이 앉을 수 있으니 바로 태고정(太古亭)이다. 오른쪽으로 청계(淸溪)를 끼고 왼쪽으로 화악(華嶽)을 당기고 있는데, 서산(西山) 당경(唐庚)의 “산은 태고인 양 고요하네[山靜似太古]”라는 시구(詩句)에서 취하여 이름을 붙였다. 오래된 삼나무 몇 그루와 벽송(碧松) 천 그루가 앞뒤에 울창하다.
정자를 따라 왼쪽에 못이 세 개[三池] 있는데 모두 돌을 다듬어 방형(方型)으로 쌓았다. 정자 북쪽으로부터 구멍을 뚫어 개울물을 바위 아래로 끌어들여 흐르게 하였다. 첫 번째 못이 다 차고 나면 다시 두 번째 못으로 흘러들고, 두 번째 못이 차고 나면 다시 세 번째 못으로 흘러 들어간다. 제일 위의 것을 조심당(照心塘)이라 하고 가운데 것을 함벽당(涵碧塘)이라 하며 제일 아래의 것을 척금당(滌襟塘)이라 한다. 우리 낙재(樂齋, 金瑛) 선조의 또 다른 호 삼당(三塘)은 여기에서 유래하였다.”

태고정은 안동김씨 북애공(北厓公) 김후(金后, 1596∼1641)의 종택(宗宅)과 함께 1981년 4월 25일에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27호로 지정되었다.

글씨는 조선의 명필가 석봉(石峯) 한호(韓濩, 1543~1605)가 쓴 해서체이다. 혼돈에서 벗어나지 않은 태초의 모습인 양 장중한 걸음으로 ‘太(태)’ 자가 자리한다. 튼튼하고 위엄 있는 획으로 ‘大(대)’ 자를 두고 두 다리 사이에 ‘丶(점주)’를 슬쩍 끼워 넣어 그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하고 있다. ‘古(고)’ 자 역시 앞 글자의 기운을 그대로 이어받아 위엄을 갖추며 곧게 섰다. 그러면서도 하부의 ‘口(구)’ 자를 숨을 고르고 작게 자리매김하여 무거운 중량감을 덜어내고 편안한 느낌을 부여한다. 굵고 튼튼한 획으로 이루어졌지만 시원한 상승감을 부여하여 조형한 ‘亭(정)’ 자가 개방감으로 인한 포용력을 자랑하며 서 있는 자태가 아름답다. ‘石峯(석봉)’이라고 다소 크게 쓰인 아호로 마무리하였는데 전체의 긴장을 놓치지 않고 서 있는 품이 당당하다. 아울러 외곽을 두른 굵은 틀이 견고하고, 이어지는 내부에도 넉넉한 공간을 부여하여 ‘太古亭(태고정)’ 세 글자로 시선을 모으는 효과를 주었다. 글씨의 주위와 틀에 다섯 점으로 이루어진 문양이 별인 양 배치되어 태초의 우주를 펼쳐놓은 듯 흥미롭다. (서예가 遯石 양성주)

안동김씨 삼당공파 현애문중 소개

김영(金瑛, 1475~1528)이 청풍계에 태고정과 삼당(三塘) 등을 조성하였으나 이 집안이 이곳에 세거한 것은 한성부판관을 역임한 김계권(金係權, ?∼1458) 때부터였다. 김계권은 김삼근(金三近)의 아들이고,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 1431∼1518)의 형이다. 김계권은 5남 6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학조대사(學祖大師, 1431∼1514), 김영전(金永銓), 김영균(金永勻), 김영추(金永錘), 김영수(金永銖, 1446∼1502)이다. 김계권이 죽은 뒤 청풍계 집은 다섯째 아들인 김영수가 관리하게 되었고, 그의 세 아들 김영, 김번, 김순(金珣) 중 장남인 김영이 물려받게 된다. 그리고 청풍계 집은 이후 아들 김생락(金生洛), 손자 김기보(金箕報, 1531∼1588)에게 전해졌다. 그런데 김기보가 풍산으로 낙향하면서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 1561∼1637)에게 청풍계의 집을 물려주게 된다. 즉 초창기 태고정의 주인은 김영→김생락→김기보 조부손(祖父孫)으로 이어지다가 김기보가 안동으로 내려오면서 김영의 종증손인 김상용에게 전해졌다. 이후로는 김상용 가문에서 청풍계 집을 소유하고 관리하게 되었다.
김상용은 김기보로부터 청풍계 집을 물려받았으나 그가 청풍계를 집중적으로 조성하고 주변의 사물에 이름을 부여한 시기는 그의 나이 48세 되던 해인 1608년(선조 41)이다. 이즈음에 김상용은 석봉 한호의 ‘태고정(太古亭)’과 ‘청풍각(淸楓閣)’ 현판을 받아 걸었고, ‘청풍계(淸風溪)’ 세 글자를 써서 대들보에 걸었고, 선조(宣祖)가 하사한 어필(御筆)을 홍벽색(紅碧色) 비단에 싸서 보관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소오헌(嘯傲軒) 오른쪽의 온실(溫室) 남쪽 창 문미(門楣) 위에는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쓴 “창문이 빼어난 시내에 임하여 흐르는 물소리를 듣고, 길손이 우뚝한 봉우리에 이르자 흰 구름을 쓰네[窓臨絶磵聞流水 客到孤峰掃白雲]”라는 글씨를 걸어두었다. 현재 선조와 소현세자가 쓴 글씨는 실전된 듯하다.
김상용은 1618년(광해군 10)에 부친 김극효(金克孝)가 세상을 뜨자 원주에 거처하면서 청풍계를 그리는 시편을 짓기도 하였고, 다시 청풍계로 돌아왔지만 1637년(인조 15) 강화도에서 순절하였다. 그리고 아우 김상헌(金尙憲, 1570∼1652)도 심양에 볼모로 끌려가게 되면서 청풍계는 쓸쓸해지게 되었다.
이후 청풍계가 다시 활기를 되찾은 것은 김상용의 고손 김시걸(金時傑, 1653∼1701)과 김시보(金時保, 1658∼1734) 형제가 청풍계의 주인이 되었을 때이다. 이때 족숙인 김창집(金昌集, 1648∼1722), 김창협(金昌協, 1651∼1708), 김창흡(金昌翕, 1653∼1722), 김창업(金昌業, 1658∼1721) 형제를 포함하여 홍세태(洪世泰, 1653~1725), 이병연(李秉淵, 1671~1751), 어유봉(魚有鳳, 1672~1744), 조정만(趙正萬, 1656~1739) 등이 이곳에 들러 성황을 이루었고, 겸재(謙齋) 정선(鄭敾)이 「청풍계도(淸風溪圖)」를 그려 당시의 아름다운 풍광을 전하였다.
한편 조정에서는 김상용의 충절을 기려 1708년(숙종 34)에 청풍계에 늠연사(凜然祠)를 건립하여 김상용의 화상을 봉안하도록 하였다. 이때 늠연사 앞의 돌에 송시열(宋時烈)의 ‘대명일월(大明日月)’ 네 글자를 새겼다. 그러나 이 글씨는 일제 때 이곳에 주택을 짓느라 훼손되어 현재는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이보다 앞서 주희(朱熹)의 ‘백세청풍(百世淸風)’ 네 글자를 천유대(天遊臺, 일명 憑虛臺) 바위에 새겨 김상용의 청풍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이곳을 청풍대(淸風臺)라고도 부르게 되었다. 18세기 이후 청풍계는 늠연사와 함께 주희와 송시열의 글씨인 ‘백세청풍’, ‘대명일월’ 여덟 글자로 인하여 그 성가를 더하게 되었다.
18세기 중반 이후 태고정을 포함한 청풍계 집은 김영행(金令行), 김이진(金履晉), 김세균(金世均) 등의 자손에게 전해지고 당시의 문인인 남유용(南有容), 오원(吳瑗), 황경원(黃景源), 안석경(安錫儆), 박준원(朴準源), 이덕무(李德懋), 이서구(李書九) 등도 이곳에 들러 시로 이곳의 아름다운 풍광을 묘사하고 안동김문(安東金門)의 성예를 기리기도 하였다.
북애종택(北厓宗宅)은 대봉산 아래 정남향에 위치하고 있는 조선 중기의 건축물로, 원래 노씨문중(盧氏門中)의 종택이었으나 후손이 없자 외손인 황씨(黃氏)와 신씨(申氏)가 이어 살다가 신씨 역시 대를 이을 아들이 없게 되어 그의 외손 김후가 들어와 살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대문채 없이 넓은 대지에 사랑채와 안채가 연결된 口자형 구조로 되어 있다. 그리고 안대청에는 대한제국 때의 문신이자 독립운동가인 동농(東農) 김가진(金嘉鎭, 1846∼1922)이 쓴 매죽헌(梅竹軒) 현판이 걸려 있다.

참고문헌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Ⅱ』, 2016
김남기, 「태고정」, 안동청년유도회 제27회 누정순회강좌,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