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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일재(涵一齋)

안동권씨 부정공파 방담문중(安東權氏 副正公派 方潭門中0

35.0×87.6 / 행서(行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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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함일재(涵一齋)
  • 글자체 행서(行書)
  • 크기 35.0×87.6
  • 건물명 함일재(涵一齋)
  • 공간명 안동권씨 부정공파 방담문중
  • 서예가
  • 위치정보 경북 안동시 풍산읍 만운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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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일재(涵一齋)

함일재(涵一齋)

함일재(涵一齋)는 방담(方潭) 권강(權杠, 1567~1626)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서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만운리에 건립한 운계서원(雲溪書院) 서재(西齋) 편액이다. 이 편액은 안동권씨(安東權氏) 부정공파(副正公派) 방담문중(方潭門中)에서 기탁한 것으로, 편액의 크기는 가로 87.6㎝, 세로 35㎝이다. 운계서원은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고 지금은 현판만 남아 있다. ‘함일(涵一)’은 중국 송나라 유학자인 정호(程顥)가 “나의 순일한 마음을 함양해야 한다[涵養吾一]”라고 한 말에서 취한 말이다. 귀와(龜窩) 김굉(金㙆)이 지은 「운계이사기(雲溪里社記)」에 의하면, 운계서원은 정조 병오년(1786)에 권강의 덕행과 학문을 기리기 위해 서원을 건립하자는 논의가 있었고, 4년 뒤인 경술년(1790)에는 옛터에 사당(祠堂)을 6칸으로 개건(改建)하였으며, 순조 임술년(1802)에 이진동(李鎭東)이 원장이 되어 이조억(李祚億)과 남범귀(南範龜)와 함께 강당(講堂)과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를 건립하였다. 이때 강당은 오교(五敎) 즉 오륜(五倫)을 닦는다는 의미에서 ‘수교재(修敎齋)’라 명명하였고, 동재(東齋)는 공자(孔子)의 제자 증자(曾子)가 “나는 하루에 세 가지로 스스로를 반성한다[吾日三省吾身]”라고 한 데서 취하여 ‘성삼재(省三齋)’라 하고, 서재(西齋)를 ‘함일재(涵一齋)’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글씨는 작자 미상의 행서체이다. 삼라만상의 모든 이치를 품은 듯 풍성한 여유가 한가운데 ‘一(일)’ 자에 응축되어 있다. 강하지만 부드러운 물성을 가진 ‘氵(삼수변)’이 후덕함을 과시하며 ‘函(함)’ 자를 품어 여유 만만한 모습을 드러내며 ‘涵(함)’ 자를 이루어내고 있다. 열심히 공부하고 흔들림 없는 태도로 실천하자는 다짐으로 숨을 고르는 듯 단아한 모습의 ‘齋(재)’ 자가 포근하다. 묵직하고 넉넉한 획으로 이루어진 편액이지만 ‘一’ 자를 중시에 두고 분배한 시원한 공간으로 인하여 밝고 여유 있는 느낌이 전체 편액을 싸고돈다. (서예가 遯石 양성주)

안동권씨 부정공파 방담문중 소개

권강(權杠, 1567~1626)은 자가 공거(公擧), 호가 방담(方潭), 본관이 안동(安東)이다. 어려서부터 유일재(惟一齋) 김언기(金彦璣, 1520~1588)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23세 때인 1589년(선조 22)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이후 벼슬에서 물러나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을 찾아가 집지(執贄)하였다. 부친을 일찍 여의고 가난한 생활을 영위하는 가운데에서도 스스로 물고기를 잡고 사냥하여 모친을 지극정성으로 봉양하였다. 부친이 돌아가신 뒤로 과거에 뜻을 접고 두문불출하면서 학문에만 정진하여 문하에 많은 제자를 길러내었다. 학자로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이후로 많은 명사가 그를 찾아와 교유하였다.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이 그를 찾아왔을 적에 낚시질에 골몰하느라 오는 줄도 몰랐다고 한다. 그 이후로 당색(黨色)이 다른 두 사람은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절친 관계를 형성하였다. 조정에서 세자익위사우세마(世子翊衛司右洗馬)를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만년에 방담골에 거처했기 때문에 제자들이 방담선생이라 불렀다. 1666년(현종 7)에 왕명으로 충효유일지사(忠孝遺逸之士)를 찾아 표창할 때 선정이 되어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추증받았고 정려(旌閭)가 내려지기도 하였다.
임여재(臨汝齋) 류규(柳, 1730∼1808)가 지은 운계서원(雲溪書院) 사당 정효사(貞孝祠) 「상량문(上樑文)」에 권강의 학문과 효행을 도드라지게 드러내고 있어 옮겨본다.

“삼가 생각하건대 방담(方潭) 권 선생은 옥 같은 훌륭한 자질을 지녔고, 학문이 있는 집안의 이름난 후손이었네. 안풍(安豐)의 동소남(董邵南)처럼 물에서 고기를 잡기도 하고 산에서 나무하기도 하여 신령이 그 효성을 알았고, 누항(陋巷)의 안회(顔回)처럼 한 그릇의 밥과 한 표주박의 물로 지내어 지극한 즐거움이 가난을 잊었네. 일곱 편의 『맹자』를 정밀하게 살폈고, 한 권의 『주역』을 깊이 연구하였네. 우러러 생각하고 고개 숙여 글 읽어 연마하는 데 몇 년간 공력을 쌓았고, 잠심하여 수양하고 힘써 실천하여 존양성찰(存養省察)에 하루도 방심하지 않았으니, 진실로 관중(關中)의 경학이었으며 적막한 곡구(谷口)의 일생이었네. 학술의 연원은 하외(河隈)에서 가까이 접하였으니 진실로 스승의 가르침에 얻은 바가 있음을 알겠고, 훌륭한 시문은 멀리 석실(石室)에서 왔으니 어찌 다만 향당에서 추앙받았을 뿐이겠는가. 골짜기에 사자(使者)가 들어온 것은 성스러운 임금이 현인을 부르는 수레가 있어서이고, 강가에서 야인(野人)으로 지낸 것은 은거하는 선비가 벼슬길에 나아갈 마음이 없어서라네. 노래가 「백운곡(白雲曲)」이 되어 스승의 장려와 화답을 얻었고, 푸른 물가에서 맹세가 깊어 시끄러운 세상을 멀리하였네. 끝내 소미성(少微星)에 재앙이 있어 오래도록 선계(仙界)에 주인이 없었네. 깊숙한 전원에 누가 다시 문을 닫고 글을 읽었는가. 탄식하던 선비들이 모두 간절히 풍모를 존경하고 덕을 흠모하였네. 고향에 정문(旌門)을 세우고 관작을 추증하여 조정이 내리는 정려의 특은(特恩)을 입었으니, 그곳에 나아가 그분을 생각함에 유림들이 융숭하게 보답하는 예전(禮典)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이 한 굽이의 구름 낀 시내를 돌아보건대 진실로 백세토록 은거할 만한 곳이라네. 가까운 선영(先塋)의 후손들이 매년 제사를 지내는 사묘(私廟)가 있으니, 제사로 인하여 우리 향당이 묘우(廟宇)를 짓는 법도를 의논하였네. 모두가 선생을 존경하니, 고인(故人)이 된 뒤에 제사를 지낼 만한 분이라고 누가 말하지 않겠는가. 대략 사원(祠院)의 체제를 본받았으니, 모두가 예법에 구애될 것은 없다고 하였네. 대들보를 크게 하고 서까래를 세밀하게 함에 각각 적합한 재목을 얻었고, 모난 곳을 자르고 굽은 곳을 깎음에 모든 지혜를 동원하였네. 봄가을에 조촐하게 제사를 지내게 되었으니 진실로 대대로 살아온 고향이라네. 좌우로 서재(書齋)가 청정하니 가서 예악의 성대함을 볼 수 있네. 병산(屛山)이 시야에 들어오니 문하에서 공부하던 영령이 왕래하고, 화천서원(花川書院)과 같은 해에 지었으니, 폐백을 받드는 많은 선비들이 분주하네. 과거 공부를 그만두던 어느 해, 눈물짓는 어머니를 어찌 견딜 수 있었겠는가. 절조가 있고 정효사에 절을 올리는 오늘, 지난날 흠모하던 마음에 기쁘게 부응하네.”

권강의 문집인 『방담문집(方潭文集)』은 그가 죽은 지 200년이 지나서 후손들에 의해 간행되었는데, 4권 2책의 목판본이다. 내용에 있어서 「영이귀부(詠而歸賦)」는 성리학자로서의 시각이 뚜렷하게 부각되는 작품이다. 「변무소(辨誣疏)」는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났을 때 경상도 일원의 선비들은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는 전 감사(監司) 민성징(閔聖徵)의 무고를 반박하기 위하여 올린 글이다. 「맹자서취정록(孟子書就正錄)」은 『맹자』 가운데 중용한 구절들을 해설한 내용으로 분량도 많을 뿐만 아니라 『방담문집』의 핵심적인 글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한국의 편액Ⅰ』, 한국국학진흥원, 2016
「운계이사기(雲溪里社記)」, 『구와집(龜窩集)』 권8
권강(權杠), 『방담문집(方潭文集)』
주승택, 『방담문집 해제』, 퇴계학자료총서22, 안동대학교 퇴계학연구소,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