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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연서당(洛淵書堂)

성주 벽진이씨 완석정종택(星州 碧珍李氏 浣石亭宗宅0

76.5×181.5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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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낙연서당(洛淵書堂)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76.5×181.5
  • 건물명 낙연서당(洛淵書堂)
  • 공간명 성주 벽진이씨 완석정종택
  • 서예가
  • 위치정보 경북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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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연서당(洛淵書堂)

낙연서당(洛淵書堂)

낙연서당(洛淵書堂)은 완정(浣亭) 이언영(李彦英, 1568~1639)이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석주리에 건립한 서당의 편액이다. 이 편액은 성주(星州) 벽진이씨(碧珍李氏) 완석정종택(浣石亭宗宅)에서 기탁한 것으로, 편액의 크기는 가로 181.5㎝, 세로 76.5㎝이다. ‘낙연(洛淵)’은 이락연원(伊洛淵源)의 줄임말로, 정주학(程朱學)의 연원(淵源)을 의미한다. 이락은 낙양(洛陽)을 흐르는 이수(伊水)와 낙수(洛水)로, 정명도(程明道)와 정이천(程伊川) 형제가 학문을 익히던 곳이다.
낙연서당은 자고산(鷓鴣山) 정상에서 남서쪽으로 뻗은 능선 말단부 북사면에 남서향으로 앉아 있다. 주위에는 노송과 함께 울창한 숲을 이루며 건물을 둘러싸고 있다. 서당 좌측에는 민가가 한 채 들어서 있고 건물 입구에 완정 이선생 유허비가 최근에 세워져 있다. 최근 서당 주변과 건물을 정비했다.
서당에 관한 기록은 『사기(史記)』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나 삼국시대 고구려에 경당(扃堂)이라는 마을 단위의 학교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것이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 초기부터 각처에서 성행한 것으로 여겨진다. 고려의 서당은 그대로 조선시대에 계승되어 더욱 발전된 민중 교육 기관으로 신교육이 실시될 때까지 존속해온 가장 보편화된 교육 기관이었다. 서당은 사립 교육 기관이라 반드시 기본 자산이나 인가를 요하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만들거나 없애는 것이 자유로웠으며 뜻있는 인사는 누구나 설치할 수 있었다. 서당이라 불리는 사숙이 성립되는 데는 사족(士族) 자제들을 자기 집에서 가르치는 경우, 가세가 풍족한 집안에서 독선생(獨先生)을 앉혀놓고 약간 명의 이웃 자제들을 무료로 동석시켜 수업하는 경우, 훈장 자신이 교육 취미나 소일을 위하여, 또는 이웃이나 친구의 요청으로 학동을 받아 수업하는 경우, 향중(鄕中)의 몇몇 유지 또는 한 마을 전체가 조합하여 훈장을 초빙하여 자제를 교육시키는 경우 그리고 훈장 자신이 생계를 위하여 자기가 직접 설립하는 경우 등이 있었다. 칠곡은 유학이 크게 발달한 곳으로 서원, 정사, 재사 등이 약 130여 곳이 보존되고 있다고 한다. 조선 말기부터 일제 초기에 이르는 동안 학교 교육이 보편화되지 못한 곳에서는 유생들이 자기 집에 서당을 차려 인근 지역의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문 교육을 실시하며 유학의 명맥을 이어 왔다.

글씨는 작자 미상의 해서체이다. 낙동강이 고요하게 유유히 흐르는 듯 중량감 있는 획이 안정감을 주며 ‘洛(낙)’ 자를 조형한다. 낙동강 어딘가에 있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소(沼)인 듯이 치밀하게 결구한 ‘淵(연)’ 자가 위압적이다. 두 글자의 ‘氵(삼수변)’이 거의 같은 모양인데 이는 온갖 계곡의 물을 받아들여 하나로 조화를 이루어낸 의연한 낙동강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다. ‘書(서)’ 자에서는 획의 강약을 적절히 섞어서 세상 만물의 변화하는 이치를 소상하게 설명해주는 것이 책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堂(당)’ 자에 이르러 당당함을 잃지 않으면서도 포근함이 가미되어 있음이 정겹다. ‘洛’ 자에서 ‘淵’ 자를 거쳐 ‘書堂(서당)’으로 가면서 자간을 점점 넓혀 한결 여유로운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서예가 遯石 양성주)

성주 벽진이씨 완석정종택 소개

이언영(李彦英, 1568~1639)의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군현(君顯), 호는 완정(浣亭)이다. 이인손(李麟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운(李運)이다. 아버지는 공조좌랑 이등림(李鄧林)이며, 어머니는 최호(崔湖)의 딸이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인으로 1591년(선조 24)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효도와 청렴으로 순릉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03년(선조 36)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였으나 학문이 아직 성취되지 않았다며 벼슬길에 나갈 뜻이 없었다. 1613년(광해군 5) 호조정랑·태복시첨정(太僕寺僉正)을 거쳐 다음 해 사간원정언으로 승진하였다. 이때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억울한 죽음을 주장하는 정온(鄭蘊)을 변호하였다가 삼사의 탄핵으로 삭직되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후, 인조의 특별한 부름을 받아 성균관직강·사예(司藝)·내자시정(內資寺正)·사헌부장령이 되었다. 1625년(인조 3) 승정원좌부승지가 되었으며, 그 뒤 밀양목사·청주목사·선산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선조를 도와 10여 년 동안 국방에 힘썼으며, 만년에 낙동 강가에 정자를 짓고 여생을 보냈다.
저서로는 8권 4책의 『완정문집(浣亭文集)』이 있다. 권1에는 시 75수, 만사 33수, 권2에 서(書) 24편, 소(疏) 3편, 정사 4편, 계(啓) 5편, 장계 5편, 권3에 잡저 1편, 권4에 설 2편, 논 7편, 전책 1편, 권5에 제문 14편, 묘지 1편, 묘갈 2편, 행록 4편, 유사 1편, 권6에 연보, 권7·8에 부록으로 행장·묘갈명·유사·완석정기(浣石亭記) 등이 수록되어 있다. 1978년 12대손 형기(瀅基)가 영인, 간행한 책에는 별집으로 국조실록(國朝實錄)·청증작소(請贈爵疏)·청증작시소(請贈爵諡疏)·동완양선생청시건원소(桐浣兩先生請諡建院疏) 등이 수록되어 있다. 서의 「상한강선생문목(上寒岡先生問目)」은 정구(鄭逑)에게 상례(喪禮)를 질의한 문목이다. 「여신우태경숙(與申右台敬叔)」은 1624년(인조 2) 강사(江舍)에 우거하고 있던 우의정 신흠(申欽)을 위로한 것이다. 「여밀양사림(與密陽士林)」은 1637년(인조 15) 예림서원(禮林書院)을 중수할 때 선현의 배향 문제를 논의한 것이다. 선진과 후진을 따져 선진인 김종직(金宗直)에 신용개(申用漑)를 배향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 밖에도 장현광(張顯光)·이도창(李道昌)·조희일(趙希逸) 등 명사들과 주고받은 서신이 많다. 소에는 장령의 사직을 청하는 「사장령소(辭掌令疏)」, 호종가자(扈從加資)의 사면을 청하는 「사면호종가자소(辭免扈從加資疏)」 그리고 성주 사림을 대신하여 선정을 베푼 민형남을 유임하게 해달라고 지은 「민후형남원류소(閔侯馨男願留疏)」 등이 있다. 장계는 중국의 사신을 접대하는 임무를 띠고 사포(蛇浦)에 내려가 올린 「도사포접대허천사장계(到蛇浦接待許天使狀啓)」 4편 등이 있다. 잡저의 「운계한화(雲溪閒話)」는 선세(先世)의 유적부터 여항(閭巷)의 세미한 일까지 어려서부터 보고 들은 것을 모두 모아서 자손들이 참고하도록 기록한 것이다. 설에는 수박에 관한 「종서과설(種西瓜說)」 등이 있고, 논에는 중국의 역사적 인물이나 역사적 사실을 평한 것이 대부분이다. 전책의 「문안위치란(問安危治亂)」은 나라의 선정을 논한 내용으로, 회시(會試)에서 장원한 책문이다.
낙연서당(洛淵書堂)은 골짜기 사이 평평한 충적지 위에 평평하게 대지를 정지한 다음 방형의 담장을 두르고 일자형의 건물을 앉혔다. 솟을대문인 읍청문(挹淸門) 문간채를 들어서면 정면 5칸, 측면 1.5칸의 건물이 마주하고 있다. 평면 구성은 좌측부터 온돌방 2칸[漾月軒], 대청 2칸[浣石亭], 온돌방 1칸[捿雲寮]이 연이어 있고 전면에 반 칸 툇마루가 있는 전퇴 중당협실형이다. 방 전면에는 심벽에 쌍여닫이 띠살창을 설치했고 청방간에는 사분합들문이 설치되어 있다. 대청 후면은 판벽에 쌍여닫이 바라지창[당판창]을 설치했으며 툇마루 양 단벽에는 쌍여닫이 골판창을 시설했다. 온돌방 양 측면에는 외여닫이 띠살문이 있었으나 현재는 우측면에만 있다. 구조는 막돌 바른층쌓기로 한 시멘트 마감 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앉힌 다음 전면과 대청 배면 중앙에만 원형기둥을 세우고 나머지는 방형기둥을 세워 상부가구를 받고 있다. 한지를 몇 겹 둘러싼 주 상부는 보아지 외단을 꾸밈없이 직절한 몰익공 형태로 하여 주두를 앉히고 대들보를 얹었다. 보아지 내단은 연화를 초각했고 주간에는 창방과 장혀 사이에 소로를 끼워 장식했다. 전체 5량가로 대들보 위에 동자주를 얹어 종보를 받고 있다. 종보 위는 원형의 판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얹어 가구를 완성했다. 청방간 대들보는 통부재를 이용했고, 특히 우측 방 상부에는 전면 쪽으로 쪽문을 내고 낮은 다락형의 수장 공간을 두었다. 지붕은 홑처마에 팔작지붕으로 모서리 서까래는 마족연 형태이다. 내림마루 끝에는 명문망와가 장식되어 있었으나 최근 번와를 해 현재는 없다. 추녀 끝은 암키와를 이용해 막새로 이용했다. 기단 정면에는 돌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참고문헌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