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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한정(夏寒亭)

반남박씨 소고문파문중潘南朴氏 嘯皐門派門中

70.0×98.0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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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하한정(夏寒亭)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70.0×98.0
  • 건물명 하한정(夏寒亭)
  • 공간명 반남박씨 소고문파문중潘南朴氏 嘯皐門派門中
  • 서예가
  • 위치정보 경상북도 영주시 한정로124번길 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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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한정(夏寒亭)

하한정(夏寒亭)



하한정(夏寒亭)은 경상북도 영주시 문정리 한정마을에 있는 정자의 편액이다. 이 편액은 반남박씨(潘南朴氏) 판관공파 소고문중에서 기탁한 것으로, 크기는 가로 98㎝, 세로 70㎝이다. 하한정은 박록(朴漉, 1542~1632)이 아버지 박승임(朴承任, 1517~1586)을 위해 둘째 아들 박종무(朴樅茂)로 하여금 짓게 하였다. ‘하한’은 정자가 확 트인 곳에 위치해 있기에 앞에는 큰 시내가 있고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을 쐴 수 있어 여름에도 더운 줄을 모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보물 1078호로 지정된 『한석봉증류여장서첩(韓石峯贈柳汝章書帖)』의 말미에 전별연에 참석한 박록, 한호, 김구정, 김윤명, 류기 등 다섯 사람의 명단이 기재되어 있는데, 이는 박록과 한호의 긴밀한 교분을 확인할 수 있는 단서이다.

글씨는 조선시대 명필로 평가되는 석봉(石峯) 한호(韓濩, 1543~1605)가 쓴 해서체이다. 여름 한낮 높은 하늘 아래 쏟아지는 햇살인 양 ‘하(夏)’ 자가 광채를 뿜어내며 큰 키로 서 있다. 한겨울 몸을 움츠리듯 꽉 조인 결구와 함께한 ‘한(寒)’ 자는 고요한 엄숙미를 지니며 자리하고 있다. 시원한 바람이 드나드는 듯한 ‘정(亭)’ 자가 다시 우뚝하다.(서예가 遯石 양성주)

반남박씨 소고문파문중潘南朴氏 嘯皐門派門中 소개



박록(朴漉)은 본관이 반남(潘南), 자가 자징(子澄), 호가 취수옹(醉睡翁)이다. 아버지는 소고 박승임이고 영주에서 살았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향 사람들의 추대를 받아 의병장이 되어 치밀한 정찰과 뛰어난 용병술로 고향에 왜군이 침입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러한 공으로 1594년(선조 27) 태릉참봉과 1598년(선조 31) 사근도찰방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부임하지 않았다. 1603년(선조 36) 의금부도사·예빈시별제를 거쳐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 뒤 수직으로 통정대부에 이어 가선대부에 올랐다. 하한정(夏寒亭)에는 박록이 하한정을 세우고 지은 시를 시판이 걸려 있어 옮겨보기로 한다.

身世相忘外 세상사 다 잊어버리고
溪山半醉中 산수 속에서 반쯤 취하네
睡餘無一事 잠에서 깨어도 하릴없어
高枕草亭風 정자에 누워 바람을 쐬네

두암(斗庵) 김약련(金若鍊, 1730∼1802)은 「하한정중수기(夏寒亭重修記)」에서 박승임은 직언을 하다가 조정에 쓰임을 얻지 못하자 반곡의 별장으로 퇴거하였는데, 이에 박록이 아버지의 뜻을 알고는 자기 집 남쪽에 10여 보쯤 떨어진 곳에 하한정을 지었다고 되어 있다. 하한정에는 중국 명나라 때 우리나라로 온 사학초(史學初)가 하한정 주변의 아름다운 경관에 대하여 읊은 시판이 걸려 있는데, 이른바 ‘하한정십경(夏寒亭十景)’이다. 구체적으로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성봉춘화(聖峯春花), 봉산추월(烽山秋月), 창계낙조(滄溪落照), 관포관어(鸛浦漁火), 반동취우(蟠洞驟雨), 전교목적(前郊牧笛), 응사효종(凝寺曉鐘), 북촌모연(北村暮煙), 철탄청람(鐵呑晴嵐), 소백제설(小白霽雪)이다. 이시는 무술년(1598) 1월에 하한정 주인 박회무의 부탁을 받고 지어준 5언절구 10수이다. 뒷부분에 이 시를 받은 내력을 기록해놓았다.
반남박씨(潘南朴氏)는 고려 반남현(潘南縣) 호장(戶長)을 지낸 박응주(朴應珠)를 시조로 한다. 호장은 국가에서 지방관으로 보낼 수 없는 지역에 지방관을 유력 가문의 수장이 대신할 수 있도록 벼슬을 주어 지방을 다스렸던 인사 제도였다. 반남은 현 전라남도 나주시 반남면 일대로 백제 반내부리현이며 당나라가 백제를 멸한 뒤 반나로 고쳐 대방주의 영현으로 하였고, 757년 반남군으로 고친 후 계속 내려온 지명이다.
박응주로부터 5세손인 박상충(朴尙衷, 1332~1375)은 자가 성부(誠夫)이고 시호가 문정(文正)이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문하생으로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정랑, 판전교시사 등을 지냈다. ‘반남선생(潘南先生)’이라 일컬어진 그는 정계에서 두각을 드러내면서 반남박씨가 번영을 누릴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진 유생으로 친명파에 가담하여 이인임(李仁任) 등 친원파에 대항하였다. 박상충의 아들 읍취헌(揖翠軒) 박은(朴訔, 1370~1422)은 고려 말 개성부소윤을 지내고 조선 개국 후 공을 세워 익대동덕좌명공신3등으로 반남군에 봉해졌다가 금천부원군으로 다시 봉해졌다. 이후 태종 때 우의정과 좌의정에 올랐다. 박상충과 아들 박은의 활약으로 반남박씨는 조선 전기 명문가로 명성을 떨치게 되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박은은 박규(朴葵), 박강(朴薑), 박훤(朴萱) 세 아들을 두었다. 장남 박규는 세종 때 예조와 형조참판 및 경상도관찰사를 지냈다. 차남 박강은 군기감정에 이어 이조참판, 황해도관찰사, 중추원지사를 지냈다. 또 계유정란 때에는 수양대군을 도와 좌익삼등공신에 책록되고 금천군에 봉해졌다. 삼남 박훤은 경주부윤에 봉해졌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박규는 네 아들을 두었는데, 네 아들 모두 벼슬을 하면서 반남박씨가 크게 번성하게 되었다. 장남 박병문(朴秉文)은 중군부사직을 지냈고, 차남 박병균(朴秉鈞)은 봉직랑홍주판관을 지냈으며, 삼남 박병중(朴秉中)은 상호군을 지냈고, 사남 박병덕(朴秉德)은 온양군수를 지냈다. 그리하여 이들의 후손이 사직공파, 판관공파, 호군공파, 군수공파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또 박병균의 아들 박숙(朴䃦, 1444~1526)은 부사직으로 좌승지에 증직되었는데, 그가 능성구씨(綾城具氏) 안동 입향조인 구익명(具益命)의 사위가 되어 서울에서 안동으로 이거하면서 처가가 있는 모사골의 남쪽인 나주골에 정착하였다. 박숙의 장남 박침(朴琛)과 삼남 박형(朴珩, 1479~1549)은 16세기 초 안동에서 영주로 이거하면서 문수면 월호리와 영주동 두서에 정착하였으며, 박침(朴琛)의 후손들은 영주의 여러 마을에 정착하였다. 박형은 1479년(성종 10)에 태어나서 1549년(명종 4)에 향년 71세로 운명함에 부인과 함께 합장되었다. 1507년(중종 2)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아들 박승임의 현달로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7남을 두었는데, 장남 박승문(朴承文)은 훈도를 지냈고, 차남 박승건(朴承健)은 생원시에 합격하여 찰방을 지냈고, 삼남 박승간(朴承侃)은 문과에 급제하여 부사를 역임했으며, 사남 박승준(朴承俊)은 진사를 지냈고, 오남 박승인(朴承仁)은 어모장군을 지냈고, 육남 박승임은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간을 지냈으며, 막내 박승륜(朴承倫)은 어모장군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은 “아들 7형제가 모두 글 잘하는 선비이니 그 복이 한량없다.”라고 했다. 박형은 향리에서 지냈는데 행의(行義)로 널리 알려져서 퇴계 이황이 영주의 은군자라 하며 조정에 추천하기도 하였다. 소고문중의 직계는 박형(朴珩)-박승임(朴承任)-박록(朴漉)-박회무(朴檜茂)-박두(朴炓)-박충기(朴忠基)-박문린(朴文麟)으로 이어진다.

참고문헌
  • 한국국학진흥원, 『국학자료목록집 48 반남박씨 소고문중』, 2018
  •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 한국국학진흥원, 2016
    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
  • 유교넷(http://www.ugy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