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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천정사(山泉精舍)

반남박씨 소고문파문중潘南朴氏 嘯皐門派門中

47.0×153.0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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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산천정사(山泉精舍)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47.0×153.0
  • 건물명 산천정사(山泉精舍)
  • 공간명 반남박씨 소고문파문중潘南朴氏 嘯皐門派門中
  • 서예가
  • 위치정보 경상북도 영주시 한정로124번길 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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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천정사(山泉精舍)

산천정사(山泉精舍)



산천정사(山泉精舍)는 경상북도 영주시 가흥동에 건립한 산천서원(山泉書院)의 전신인 산천서당(山泉書堂)에 걸려 있던 편액이다. 이 편액은 반남박씨((潘南朴氏) 판관공파 소고문중에서 기탁한 것으로, 크기는 가로 153㎝, 세로 47㎝이다. 산천서당은 1615년(광해군 7)에 백암(栢巖) 김륵(金玏, 1540~1616), 죽유(竹牖) 오운(吳澐, 1540~1617), 취수헌(醉睡軒) 박록(朴漉, 1542~1632) 등이 퇴계 이황의 이산서원(伊山書院) 설립 정신을 본받아 건립하였다. ‘산천’은 『주역(周易)』 「몽괘(蒙卦) 상(象)」에 “산 아래에서 샘이 나오는 것이 몽이니, 군자가 이것을 보고 행실을 과단성 있게 하며 덕을 기른다.[山下出泉蒙 君子以 果行育德]”라고 한 데서 나온 말로, 모두가 때를 따라 중도를 얻는 데[時中] 있음을 뜻한다. 장세상(張世相, 1655~?)은 「산천서당지(山泉書堂志)」에서 스스로 산천서당의 양쪽 방의 명칭을 부여했다고 하였는데, 오른쪽의 방을 양정재(養正齋)라고 한 것은 『주역』 「몽괘」의 “어릴 때에 바른 도리를 기름이 성인이 되는 공부다.[蒙以養正 聖功也]”라고 한 데서 취한 것이고, 왼쪽 방을 진학재(進學齋)라 이름 붙인 것은 송나라 때 주자가 바위에 새긴 “학문은 성현을 구함이요, 솔개는 날고 고기는 뛴다[學求聖賢 鳶飛魚躍]”는 뜻을 취한 것이라고 하였다.
산천서당에는 ‘산천서당 관등회’ 시판이 있었는데, 이것은 신축년(1661) 관등회를 하고 지은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 1587~1667)의 7언절구 1수, 육우당(六友堂) 박회무(朴檜茂, 1575~1666)의 5언율시 1수, 그리고 그들의 시에 각각 차운한 성서(城西) 이상언(李尙彦, 1597∼1666)의 7언절구와 5언율시가 기록되어 있는 시판이다.

글씨는 작자 미상의 해서체이다. 치열하게 공부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듯 반듯한 종획과 횡획이 반복되며 튼튼한 짜임새를 갖추고 있다. 그 속에 찍힌 점의 부드러움은 지나친 경직에서 벗어나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렇지만 삐침과 파임에서 기세 넘치는 붓질로 비백(飛白)을 동반한 예리함은 정신이 번쩍 나게 한다.(서예가 遯石 양성주)

반남박씨 소고문파문중潘南朴氏 嘯皐門派門中 소개



장세상(張世相, 1655~?)이 찬한 「산천서당지(山泉書堂志)」에 산천서당의 건립배경과 사천서원(山泉書院)의 탄생 경위 등에 대해서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어 소개하기로 한다.

가정(嘉靖) 무오년(1558)에 선배들이 이산서원(伊山書院)을 창립하였는데, 그 규모와 절목은 모두 퇴계 선생이 만들고 정한 것이다. 이에 인재가 배출되고 문교(文敎)가 크게 떨쳤다. 만력(萬曆) 을묘년(1615)에 본 고을의 유생들도 살던 마을 안에 서당을 지었는데, 백암(柏巖) 김륵(金玏), 죽유(竹牖) 오운(吳澐), 취수(醉睡) 박록(朴漉) 등 여러 고을의 노선생(老先生)이 그 의견을 발의하고 야성(冶城) 송복수(宋福綏)가 그 실무를 맡았다. 대들보와 처마 기둥이 대략 갖추어지고 시렁을 얽어 편액하기를 ‘산천서당’이란 하였으니, 대개 서당 곁 몇 보쯤에 퐁퐁 솟아 나오는 샘물이 있었는데, 산 아래 샘물이 나오는 뜻을 취하여 명명한 것이다. 이에 원장 1명, 재임 1명, 재무유사 1명을 두어 서당의 일을 다스리게 하였다. 또 약간의 토지를 경영하여 그 수입을 거두어 공사의 비용으로 하였다. 또 지주에게 가서 장정을 얻어 부역을 면제하고 이들로 하여금 수직(守直)하고 심부름하는 일을 담당케 하였다. 그리하여 마을 자제들 가운데 유학을 업으로 삼는 자들이 귀의처로 삼게 되었다. 처음 창건할 당시의 규모가 궁색하였고 세월이 오래되어 장차 무너질 위기에 놓여 계사년(1653)에 돌아가신 조부께서 서원의 원장의 되어 중건을 의론하여 그 터를 더 넓게 하고 집도 크고 높게 경영하였는데, 몇 개월 만에 완성하니 모두 10칸이었다. 가운데 6칸은 당으로 하여 연회의 장소로 하고 양쪽에 협실(夾室) 2칸씩을 두어 선비들이 숙박하면서 학업을 익히는 장소로 하였으며, 주방과 창고도 차례대로 완성되었다. 모두 북쪽을 바라보며 남쪽에 앉았는데, 대개 영주의 하류가 북쪽에서 남으로 흐르며 앞에 가로놓인 형상이고, 연화봉 한 지맥이 남쪽에 북쪽으로 뻗어 좌우를 감싸는 형국이다. 서당의 위치를 반드시 이와 같이 한 뒤에야 지세와 승경이 넓게 통하여 제대로 완성되었다. 서당 아래에 또 작은 연못을 파고 연못 안에 연꽃을 심었다. (중략) 이 일을 맡은 이는 육우당(六友堂) 박회무(朴檜茂), 삼락당(三樂堂) 박종무(朴樅茂), 단계(丹溪) 장용우(張龍遇), 성재(誠齋) 오익황(吳益熀) 그리고 송대복(宋大福)·송대년(宋大年) 형제가 힘을 기울였다. 서당이 완성되자 마을의 생도들이 때때로 서로 모여 제술(製述)을 익히거나 경사(經史)를 읽으면서 해마다 이렇게 하였다. 선비를 양성하는 제도도 점차 완비되어 노비 몇 명과 약간의 토지도 서당에 속하게 하고 몇 명의 심부름꾼도 갖추어 좋은 때와 좋은 계절에는 마을의 부로(父老)들이 술잔치를 열기도 하였고, 창안백발(蒼顏白髮)의 노인들이 지팡이를 짚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였는데, 신축년(1661) 관등회 시 모임 같은 것은 더욱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서당이 건립된 지 이미 백여 년이 되었고 앞뒤 선배들이 힘썼던 바도 이렇게 되었으며 최근에는 문교가 점점 느슨해지고 공부하는 곳이 술 마시는 장소가 되었다. 이는 우리들이 걱정하며 고쳐야 할 것이다. 그런데 서당은 지어 놓고 좌우 협실의 재실에는 아직도 명칭이 없으니 선배들이 미처 겨를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감히 비루한 생각으로 오른쪽의 방을 ‘양정재(養正齋)’라고 명명하니 ‘몽이양정(蒙以養正)’의 말을 취한 것이고 왼쪽 방을 ‘진학재(進學齋)’라 이름 붙이니 ‘학구성현(學求聖賢)의 뜻을 취한 것이다. 감히 외람되다는 꾸지람을 잊고서 아울러 좋은 선비들에게 고하여 뒷날 참고자료로 삼는다.

참고문헌
  • 한국국학진흥원, 『국학자료목록집 48 반남박씨 소고문중』, 2018
  •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 한국국학진흥원, 2016
    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
  • 유교넷(http://www.ugy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