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주메뉴 바로가기
  • 편액
  • 서체별 보기

풍원루(風遠樓)

기천서원 순흥안씨 충정공파箕川書院 順興安氏 忠靖公派

42.5×115.9 / 해서(楷書)MORE

의견달기 URL
목록 이전 기사 다음 기사
  • 자료명 풍원루(風遠樓)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42.5×115.9
  • 건물명 풍원루(風遠樓)
  • 공간명 기천서원 순흥안씨 충정공파箕川書院 順興安氏 忠靖公派
  • 서예가
  • 위치정보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나산길 35-9
  •  
r0454_1.JPG
풍원루(風遠樓)

풍원루(風遠樓)



풍원루(風遠樓)는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월오2리에 있는 기천서원(箕川書院) 문루의 편액이다. 이 편액은 기천서원 순흥안씨(順興安氏) 충정공파에서 기탁한 자료로, 크기는 가로 115.9㎝, 세로 42.5㎝이다. ‘풍원’은 ‘유교의 교화가 멀리 퍼진다’라는 뜻이다. 1665년(현종 6)에 고려조의 인물인 안준(安俊)을 비롯하여 이문흥(李文興), 문근(文瑾), 문관(文瓘), 이구(李構) 등 5위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하여 당초 기천정사(箕川精舍)를 세웠다. 1692년(숙종 18)에는 용궁 월오리로 1차 이건하였으며, 1703년(숙종 29)에는 향내 유림의 합의에 의하여 기천서원으로 승격되었다. 1712년(숙종 38) 현 위치인 용궁면 월오리 오룡곡으로 옮겨 재건하였다가 1868년(고종 5) 서원훼철령으로 인해 훼철되었다가 1928년에 재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체적인 공간 배치는 명교당(明敎堂)과 서원으로 되어 있다. 왼쪽에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명교당이 있고, 오른쪽에는 강당과 사당이 일곽을 이루고 있다. 기천서원이 있는 월오리는 가래미[蘿山], 월오, 장평(章坪), 사곡(寺谷) 등의 자연 촌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서원이 위치한 곳은 가래미마을이다.

글씨는 작자 미상의 해서체이다. 유교의 교화가 멀리 퍼져나감을 보여주려는 듯 후덕한 느낌의 윤필로 원만하게 쓴 글씨에서 따스한 바람이 느껴진다. 시선을 자극하는 모난 구석 하나 없이 원필로 부드럽게 써서 따뜻한 손길로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선생님의 인자한 모습을 보는 것 같다.(서예가 遯石 양성주)

기천서원 순흥안씨 충정공파箕川書院 順興安氏 忠靖公派 소개



기천서원(箕川書院)은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월오리에 있다. 용궁면은 예천군의 1읍 11면 중의 하나로 군의 서쪽 끝에 위치하면서 문경시 영순면과 내성천의 지류인 금천을 경계로 마주한다. ‘용궁’이란 이름은 내성천 변의 풍경이 바닷속 용궁을 연상케 할 정도로 아름답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용궁면 지역은 신라 때는 축산 또는 원산이라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용주라 하여 자사를 파견하다 1017년(현종 8) 용궁으로 고쳐 상주에 소속시켰다. 조선시대에는 1413년(태종 13) 용궁현, 1895년(고종 32) 용궁군이라 하다 1914년 예천군에 통합되었다. 용궁군의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는 개포면, 서쪽으로는 문경군 영순면·산양면, 남쪽으로는 지보면·풍양면과 문경군 영순면, 북쪽으로는 문경군 산양면·산북면과 접한다. 월오리는 용궁면 소재지에서 동북쪽으로 직선상 4km 정도 떨어져 있다. 이곳은 본래 용궁군 신읍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합에 따라 월오리라 하여 예천군 용궁면에 편입되었다. 월오리는 가래미, 월오, 장평, 사곡, 안터, 별락 등의 자연 촌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서원이 위치한 곳은 가래미마을이다. 가래미는 나산이라고도 한다. 가래산 밑에 있고 마을 뒷산에 담쟁이가 많아 ‘가라산’이며, 여기서 지명을 따와 나산이라 했다고 한다. 이문흥(李文興)이라는 이가 이 마을을 처음 개척하였다고 한다.
안준(安俊)은 개포면 경진리 옥동 사람으로, 본관은 순흥(順興), 호는 노포(蘆圃),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안손주(安孫柱)의 아들이고, 정몽주(鄭夢周)의 제자다. 성리학을 깊이 공부하여 어린 나이에 문과에 급제하고, 우왕 때 남양부사, 연안부사에 오르고 전라 충청 경상 3도 체찰사를 거쳐 벼슬이 봉상시판사에까지 이르렀다. 1186년(우왕 12) 2월에 왕이 황해도로 사냥을 나가자 연안부사 안준 등이 크게 술과 음식을 갖추어 왕에게 잔치를 베풀었는데, 왕은 안준에게 말을 상으로 하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고려의 국가 운명이 점점 기울어지자 스승 정몽주와 더불어 나라를 지키려다 이방원의 사주를 받은 조영규(趙英珪)의 쇠뭉치에 맞아 죽은 정몽주 사건 이후 우현보(禹玄寶), 김진양(金震陽) 등과 함께 그 일당으로 몰려 안준은 경남 의령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즉 1392년(공양왕 4) 6월에 도평의사사에서 안준을 잡아 먼 지방으로 귀양 보내고는 경력이라는 벼슬에 있던 장지화(張至和)를 시켜 왕에게 아뢰기를 “안준이 난을 일으키려 하여 시간이 급박하므로 미처 아뢰지 못하고 시골로 귀양 보내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조선 건국 후 태조 이성계가 안준에게 사람을 보내어 함께 일하자고 권하였으나, 안준이 완강히 거절하므로 안준의 고려에 대한 충절을 가상히 여겨 소원에 따라 예천 노포리 옥동으로 귀향 장소를 옮겨주었다. 안준은 노포리에서 고려의 운명을 붙잡지 못한 부끄러움 때문에 항상 삿갓을 쓰고 다니다 세상을 마쳤다. 호명면 백송리 행솔이 마을 서쪽 건지산의 동쪽 언덕에 묻혔다. 용궁면 오월리의 기천서원에 제향되었고, 후손은 용궁면 월오리, 풍양면 우망리 등 군내에 흩어져 살고 있다.
이문흥(李文興, 1415~1495)은 용궁면 월오리 나산 출신으로, 본관은 성주(星州)이다. 자는 질보(質甫), 호는 나암(蘿菴)이고, 이국생(李菊生)의 아들이다. 1469년(예종 1)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요직을 거치면서 청렴하고 근검하기로 유명했고, 성균관대사성에 오른 뒤에는 제자를 가르치는 데만 전념하여 16년간 성균관을 떠나지 않았다. 1493년(성종 24) 79세의 늙은 몸으로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왕에게 청하니, 왕이 이문흥의 재질이 아까워 허락하지 않았다. 이로써 이문흥이 당시 제1의 스승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다시 물러나기를 원하여 아뢰기를 “저는 고향으로 내려가 조상의 묘소도 돌보고 농사도 짓고 싶습니다.”라고 하니 왕이 그제야 허락하였다. 조정에서 높은 벼슬하는 이들이 이문흥의 물러감을 애석히 여겨 송별시를 지었는데, 홍귀달(洪貴達) 등 17명이나 되었다. 이문흥은 고향인 나산과 기천의 아름다움에 깊이 취하여 글쓰기에 힘쓰다 향년 81세로 죽으니, 개포면 입암리 방터 장화산에 묻혔다. 1665년(현종 6) 후손들이 무덤 가까이에 나암정(蘿庵亭)을 세우고, 1669년(현종 10)에는 용궁면 월오리의 기천서원에 제향하였다. 이 무덤과 나암정은 입암리 선바우마을과 함께 1981년 군용지로 들어가 근처로 모두 옮겼다. 무덤은 용궁면 덕계리 평장산으로 옮기고, 나암정은 방터 앞산으로 옮겨 세웠다. 그 후 1985년 나암정 옆에 후손들이 이문흥의 신도비를 세웠다. 대사간 이성동(李成童)이 이르기를 “우리 선생님은 오경을 깊이 연구하고, 고정을 좋아하고, 세상에 이름이 널리 드러남을 좋아하지 않아 임금님이 그 행실을 좋게 여겨 대사성 벼슬을 주었다.”라고 하였다. 이문흥은 9가지 계율[誡九勿思]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첫째, 글을 배울 때 서두르지 말라. 둘째, 친척을 박대하지 말라. 셋째, 약속을 쉽게 하지 말라. 넷째, 벼슬을 오래 하려 하지 말라. 다섯째, 재물에 욕심내지 말라. 여섯째, 여자를 희롱하지 말라. 일곱째, 낮고 천한 이를 누르지 말라. 여덟째, 높고 귀하다고 자랑하지 말라. 아홉째, 홀로 있을 때 오만하지 말라.
문근(文瑾, 1471~?)은 용궁면 덕계리 달계마을 출신으로, 본관은 감천(甘泉)이다. 자는 사휘(士輝), 호는 매계(梅溪) 또는 쌍괴당(雙槐堂), 문걸(文傑)의 아들이다. 용모가 위인답고 성격이 강직하며 도량이 넓어 효도와 신의가 천부적이더니 1492년(성종 23)에 전사가 되고, 1496년(연산군 1)에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예승관검열이 되고, 춘추관기사관을 겸하여 『성종실록(成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승정원주서, 병조좌랑·예조좌랑·이조좌랑, 사간원헌납을 거쳐 김해주사로 나가 선정을 하였다. 1508년(중종 3)에는 금산[지금의 김천]군수로서 도적을 잘 잡았기에 상을 받았다. 그 후 수원부사, 김해부사, 사간원사간, 사헌부지평을 거쳐 사간원대사간, 초조참의, 승정원동부승지에 오르고 경연참찬관을 겸하였으며, 승정원도승지에 기용되었다. 용궁인 이문흥의 외손인 조광조(趙光祖)와 더불어 신진사류로 중종의 신임을 받아 종2품 형조참판이 되었다. 그러나 남곤 등 훈구파들의 무고를 받아 1519년(중종 14) 3월에 경상도관찰사로 내려왔다. 경상도가 팔도에서 가장 크니 관찰사 2명을 두어야 한다고 임금께 건의하여 그해 11월 경상우도관찰사에 상주목사를 겸직하였다. 이때 경상좌도관찰사 이항(李沆)이 찾아왔다. 마침 기묘사화가 일어났다는 말을 듣자 문근은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방으로 들어가 밤을 새워 통탄하였다. 한편 이항은 밤새도록 잔치를 즐기면서 문근이 조광조의 편임을 정탐하였다. 이항이 곧 대사헌이 되어 문근을 논박하자 문근은 조광조의 처형을 맹렬히 공박하다가 1521년(중종 16)에 파직되었다. 그해 다시 참판에 기용되었으나 신사무옥으로 곧 벼슬이 삭탈된 후 용궁 달계에 와서 여생을 마쳤다. 무덤은 유천면 수심리에 있고, 1669년 용궁면 월오리의 기천서원에 제향되었으며, 영조 때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조광조가 이르기를, “문근은 순박하고, 곧아서 옛 위인답다.”라고 하였다.
문관(文瓘, 1475~1519)은 용궁면 덕계리 달계마을 출신으로, 본관은 감천(甘泉)이다. 자는 백옥(伯玉), 호는 죽계(竹溪)이고, 문걸(文傑)의 아들이다. 24세에 진사가 되었고, 1507년(중종 2)에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예문관에 들어가 검열, 봉교가 되어 사관이 되었다. 안음현감이 되어, 그 전임 정여창처럼 잘 다스렸으므로 주민들이 ‘전정후문(前鄭後文)’이라고 찬양하였다. 사간원헌납, 사헌부장령 등으로 있으면서 많은 일을 왕에게 건의하였다. 즉 단종에게 제사 지내줄 후손을 세우자고 하였고, 중종을 추대한 공신을 너무 남발하였기에 이를 개정하자고 하였다. 그리고 죄인에게 벌을 줄 때는 조사를 엄격히 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 외에도 정승을 임명할 때 지켜야 할 사항, 노인법의 시행, 인사행정의 신중, 왕의 정책을 교정하는 직책 존중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항을 왕에게 건의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건의들이 기득권을 가진 훈구파들에게는 눈엣가시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문관은 개혁의 선두에 서서 성실히 직책을 수행하였다. 무덤은 예천군 유천면 수심리 지만산에 있고, 당시 유명한 송시열(宋時烈)이 묘비를 지었으며, 조광조가 시로써 애도하였다. 중종은 장례비를 보내왔고, 매우 슬퍼하면서 쌍괴(雙槐)라는 호를 내렸다.
이구(李構, 1484~1536)는 용궁면 월오리 나산 출신으로, 본관은 성주(星州)이다. 자는 성지(成之), 호는 연경당(燕敬堂)이고, 이세준(李世俊)의 아들이다. 1510년(중종 5)에 진사가 되고, 1519년(중종 14) 식년문과에 용문면 하학리 사람 권장(權檣)과 더불어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기묘사화(1519년) 때 궁궐에서 숙직을 하다 투옥된 지 하루 만에 석방되어 임금께 아뢰기를, “어찌하여 이렇게까지 되었습니까? 사초(史草)에 쓰려고 해도 그 원인을 알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구는 반대당 훈구파들이 자기 인척인 조광조 등을 몰아내기 위해 일으킨 정변인지도 몰랐다. 과연 훈구파들이 이르기를 “저번에 이구가 향약을 실시하면 도둑이 없어진다고 건의하여 이를 실시케 했는데, 도둑이 여전히 횡행하고 있습니다.”라고 공박하여 1521년에 파직되었다. 이후 귀향하고 연경당(燕敬堂)을 짓고 후진 양성에 힘쓰며 여생을 보냈다. 1533년(중종 28) 4월 13일에 풍양 출신의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이 임금께 아뢰기를 “이구는 처음 지방의 훈도나 교수를 제수했다가 나중에 중앙의 전적에 제수하는 것도 무방할 듯합니다.”라고 하였으나, 왕이 허락하기 전에 타계하였다. 타계한 후 1537년(중종 32)에 이구를 복직시키려고 조정에서 찾기도 하였고, 1746년(영조 22)에는 직제학에 증직되었다. 용궁면 덕계리 평장산에 무덤이 있고, 월오리의 기천서원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 유교넷(http://www.ugyo.net/)
  • 디지털안동문화대전(http://andong.grandculture.net/)
  •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2』, 한국국학진흥원,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