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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청정(濯淸亭)

광산김씨 탁청정종가光山金氏 濯淸亭宗家

72.3×181.5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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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탁청정(濯淸亭)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72.3×181.5
  • 건물명 탁청정(濯淸亭)
  • 공간명 광산김씨 탁청정종가光山金氏 濯淸亭宗家
  • 서예가
  • 위치정보 경북 안동시 와룡면 오천리 산 2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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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청정(濯淸亭)

탁청정(濯淸亭)



탁청정(濯淸亭)은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오천리에 있는 광산김씨(光山金氏) 탁청정종가 정자의 편액이다. 이 편액은 광산김씨 탁청정종가에서 기탁한 자료로, 크기는 가로 181.5㎝, 세로 72.3㎝이다. 이 정자는 광산김씨 예안 오천 입향조인 김효로(金孝盧, 1454~1534)의 둘째 아들 탁청정(濯淸亭) 김유(金綏, 1491~1555)가 1541년(중종 36)에 건립하였다. 원래는 오천리 117번지에 있던 것으로 산간의 계곡수가 서에서 나와 동으로 흐르는 배산임수의 산록에 있었고, 정자의 좌향도 현재와는 조금 달랐으며, 안동댐 수몰로 인하여 1974년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탁청’은 ‘맑은 물에 갓끈을 씻는다’는 말로, 세속을 초탈하여 고결한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것을 뜻한다. 이는 초나라 굴원(屈原)이 지은 「어부사(漁父辭)」의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나의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나의 발을 씻으리라.[滄浪之水淸兮 可以濯我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我足]”라고 한 데서 취한 말이다.

글씨는 일반적으로 석봉(石峯) 한호(韓濩, 1543~1605)가 쓴 해서체로 전한다. 지나친 기교를 피하고 필법에 충실하여 반듯하다. 그러면서도 전체적으로 힘이 있고 균형미를 갖추었다. 두 개의 ‘삼 수(氵)’ 변이 뭉치고, 흐르고, 얼고, 풀리는 물의 성질을 잘 보여준다. 세찬 물살에 이어 우측을 꽉 차게 결구하여 더러움을 씻어냄을 표현한 듯한 ‘탁(濯)’ 자가 묵직하다. ‘청(淸)’ 자에서는 평행하게 중첩된 가로획 중에서 세 번째 획을 길게 늘여서 앞선 글자를 간섭하고 있음이 정겹다.(서예가 遯石 양성주)

광산김씨 탁청정종가光山金氏 濯淸亭宗家 소개



김유(金綏, 1491~1555)는 본관이 광산(光山), 자가 유지(綏之), 호가 탁청정(濯淸亭)이다. 아버지는 광산김씨(光山金氏) 예안 입향조인 농수(聾叟) 김효로(金孝盧, 1454~1534)이다. 부인은 순천김씨(順天金氏)로 김수홍(金粹洪)의 딸이다. 아들로 오천칠군자(烏川七君子)로 불리는 김부인(金富仁, 1512~1584), 김부신(金富信, 1523~1566), 김부륜(金富倫, 1531~1598)을 두었다. 일찍이 종고모부인 김만균(金萬鈞)에게 양육되는 과정에서 청렴하면서도 강직한 인품을 형성하였다. 이 때문에 김유는 거지와 같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성의를 다해 대했지만 옳지 못한 사람을 보면 고개를 숙이고 말을 하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올곧았다. 1525년(중종 20)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성품이 호방하고 의협심이 강해 무예에 흥미를 보여 무과에까지 응시하였으나 급제하지 못하였다. 이후 과거를 포기하고 집 근처에 탁청정(濯淸亭)을 짓고 예안 고을을 지나는 나그네를 정중하게 대접하였다고 한다. 또한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를 기쁘게 해드리는 일에도 정성을 다하였다. 『선성지(宣城誌)』에 의하면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타고난 재질은 빼어났는데 시골에서 헛되이 늙어가니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다.”라고 하였다. 김유가 지은 『수운잡방(需雲雜方)』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요리책으로 알려진 정부인 안동장씨(安東張氏)가 지은 『음식디미방』 즉 『규호시의방(閨壺是議方)』보다 앞서 편찬된 것이다. 『수운잡방』에는 당시 유포되던 우리나라를 비롯한 중국의 각종 요리서에 나오는 요리법이 다양하게 수록된 것으로 볼 때 각종 요리서를 참고하여 저술한 것으로 보이나, 단순히 베낀 글이 아니라 나름의 기술을 덧붙이고 속방도 수록하였다. 또한 양반 가문에서 일상적으로 활용하는 토착화된 조리법도 기록되어 있어 요리법의 변천이나 용어의 변화 그리고 우리 선조들의 음식 문화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김유의 묘소는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오천리 방잠동마을 동쪽 언덕에 있다.
탁청정이 있는 오천리는 구한말 예안군 읍내면 지역으로 외내, 오천이라 불렀다. 외내는 마을 앞을 흐르는 시내가 ‘한줄기로 맑은 개울’이었다는 의미이다. 혹은 물이 맑을 때 물 밑에 깔린 돌을 멀리서 보면 검게 보인다고 하여 오천이라 한다. 1914년 무양동 일부와 안동군 북선면의 외감애동 일부, 동후면의 나소곡리 일부를 병합하여 오천동·오천리라 하여 예안면에 편입되었다가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오천리는 3개 리로 구분되어 있다. 오천1리는 군자리와 방잠의 일부, 오천2리는 조마리, 이사, 우무실마을이고, 오천3리는 양정, 신역, 당고개, 지삼마을로 되어 있다. 군자리는 근래에 조성된 광산김씨오천유적지가 있는 곳이다. 광산김씨 예안파의 600년 전통 마을이 1974년 안동댐 건설로 수몰되자 2km 위인 현 위치로 종택, 묘우, 정자, 강당 등의 중요 건물만 이건하였다.
광산김씨는 원래 전라도 광산에서 고려 후기에 중앙에 진출하였는데, 그 한 파가 경상도 안동으로 와서 풍천의 구담, 와룡의 가구, 예안의 오천 등 3곳에 뿌리를 내렸다. 오천의 입향 시조는 농수(聾叟) 김효로(金孝盧, 1454~1534)로 풍산 도양골에 살다가 연산군 때 이곳으로 옮겨 정착하였다. 그의 아들 운암(雲巖) 김연(金緣, 1487~1544)과 탁청정 김유는 중종 때 명신으로 가문이 융성해지는 데 기틀을 마련하였다. 군자리로 불리게 된 것은 안동부사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가 “오천마을은 주민 모두가 군자 아닌 사람이 없구나.”라고 말한 데서 유래하였다. 특히 오천칠군자는 김연의 아들인 후조당(後彫堂) 김부필(金富弼), 읍청정(挹淸亭) 김부의(金富儀), 김유의 아들인 산남(山南) 김부인(金富仁), 양정당(養正堂) 김부신(金富信), 설월당(雪月堂) 김부륜(金富倫), 김효로의 외손인 봉화금씨(奉化琴氏) 일휴당(日休堂) 금응협(琴應夾), 면진재(勉進齋) 금응훈(琴應壎) 7인을 가리키는 말로, 모두 김효로의 친손과 외손이다.
탁청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정자로 측면의 간살을 정면보다 60㎝ 정도씩 길게 잡고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정방형에 가깝다. 우측 칸은 앞뒤 2칸이 온돌방으로 하방 밑을 고맥이로 돌려 막았으나 우측의 4칸 대청은 누마루를 꾸미고 계자각 난간을 돌렸다. 하부 기둥을 받친 주초석이 약간 높은 편이다. 난간마루는 온돌방의 전면과 측면으로 연장되었으나 연장부의 난간은 누 부분과는 달리 평난간이다. 외부 기둥은 배흘림이 있는 원주를 세웠고, 내부 기둥은 각주이다. 기둥머리는 사가에서는 보기 힘든 주심포계의 이익공(二翼工)으로 꾸몄다. 대청 상부는 복엽(複葉)의 연화각 포대공(包臺工)을 받쳐 5량으로 구성하였으며, 처마 부분은 겹처마로 하였다. 앞뒤 온돌방 사이에는 간벽을 치고 외여닫이 장지문을 달았으며, 뒷방 후벽 위에는 벽감(壁龕)을 설치하였다. 뒷방과 대청과의 경계는 두 짝의 대소(大小) 들장지로 구획하였는데, 안쪽의 큰 것에는 외여닫이 세살문이 달려 있고 바깥쪽에는 가운데에 외여닫이 세살창을 내었다. 앞방과 대청과의 경계는 세 짝의 들장지로 구획하였는데, 가운데 것은 폭이 넓고 바깥 것은 좁다. 온돌방의 정면에는 세살영쌍창이 설치되어 있는데 머름 없이 하방 위에 창틀을 얹어 놓았다. 이 창문의 가운데 설주 앞부분이 창문 두께만큼 잘라낸 형태를 취하고 있어 창문을 닫으면 외부에서는 가운데 설주가 보이지 않게 된다.

참고문헌
  • 『안동의 명현당호』, 안동민속박물관, 2000
  • 안병결 외, 『그 문화사적 성격』, 토우, 2001
    유교넷(http://www.ugyo.net/)
    디지털안동문화대전(http://andong.grandculture.net/)
  •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2』, 한국국학진흥원,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