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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경재(居敬齋)

영천 벽진이씨 명암고택(永川 碧珍李氏 冥菴古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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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거경재(居敬齋)
  • 글자체 행서(行書)
  • 크기 25.0x78.5x2.4
  • 건물명 거경재(居敬齋)
  • 공간명 영천 벽진이씨 명암고택(永川 碧珍李氏 冥菴古宅)
  • 서예가
  • 위치정보 영천시 자양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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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경재(居敬齋)

거경재(居敬齋)


거경재(居敬齋)는 명암(明庵) 이태일(李泰一, 1860~1944)이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용산리에 세운 용산정사(龍山精舍) 서쪽 방에 걸려 있는 편액이다. ‘거경’은 주자학의 공부법 가운데 하나로, 항상 몸과 마음을 경건하고 신중히 하여 모든 일에 조심하는 내적 수양법이다. 『논어』, 「옹야雍也」에 “스스로 처하기를 경으로써 하고 행하기를 간략히 함으로써 백성에게 임한다면 그 또한 괜찮지 않겠습니까. [居敬而行簡 以臨其民 不亦可乎]”라고 한 데서 취하였다. 곧 스스로 처하기를 경으로써 하면 마음속에 주관이 있어서 자신을 다스리는 것이 엄격할 것이라는 뜻이다. 편액의 글씨는 아석(我石) 김종대(金鍾大, 1873~1949)의 친필이다.

크지 않는 편액에 가득 찬 글씨가 웅장하다. 시작과 마무리에 모가 없어 부드럽지만 필획은 굳세고 강하다. 서체 또한 행서의 리듬으로 유려하면서도 구성은 치밀하다. 반듯하고 강직하며 내적으로 성찰하고 절제하는 모습이다. 편액에서 공간의 운용은 일반 서예 작품에서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 편액이 걸리는 위치와 관계 때문이다. 작은 공간이라도 허전하게 보일 수 있고 그 때문에 글씨의 기세가 위축될 수 있다. 따라서 글자 내부공간을 치밀하게 하고자 하려는 것은 일종의 법이다. 이 편액 역시 이러한 공간의 구성에 집중하여 성공적으로 마무리 하였다. 첫 글자 ‘거’를 居의 古字로 쓰면서 古보다 立으로 그 공간을 더 효과적으로 처리할 수 있었고, 居에서 좌측 획을 끝을 걷어 올리고 敬에서 파책을 수렴하여 처리한 점도 기세의 발산 보다는 절제임을 알 수 있다. 그 결과 주변 공간을 압도하는 장중함이 더 돋보이게 되었다.

(서예가 恒白 박덕준)

영천 벽진이씨 명암고택(永川 碧珍李氏 冥菴古宅) 소개


벽진이씨(碧珍李氏) 세거지는 고려시대에는 성주군 초전면 월곡리 홈실이었으나, 1400년대에 자연재해로 홈실이 폐허가 되었다. 이에 산화공파 5형제 중에 첫째 이건지(李建之)와 셋째 이수지(李粹之)는 칠곡으로, 둘째 이심지(李審之)는 선산, 넷째 이신지(李愼之)는 창녕, 다섯째 이사지(李思之)는 밀양으로 흩어져 살게 되었다. 영천 벽진이씨 명암고택(明庵古宅)은 고려 삼중대광 개국원훈 벽진장군 이총언(李忩言, 858~938)의 후손으로, 고려 충선·충숙왕 때의 문안공(文安公) 산화(山花) 이견간(李堅幹, 1259~1330)과 조선 초기 생육신의 한 사람인 경은(耕隱) 이맹전(李孟專, 1392~1480)이 모두 현조가 된다.

산화 이견간은 덕행이 높고 학문이 넓어 “선진의 예악이요, 성당의 문장이다.”라는 칭송을 받았으며 20년 동안 외교 사신으로서 중국을 오가던 그의 풍채를 중국의 사대부들도 그리워하였다. 특히 원나라에 끌려가는 고려 동녀들의 한 맺힌 심정을 전국시대 촉나라 망제(望帝)의 원혼이 화한 두견새의 울음에 비유하여 형상화한 시는 인구에 회자되었다. 이 시가 중국에 알려지자 중국인들은 구법의 절묘함을 탄복하며 “산화의 시구는 천지와 공존하여 강남 지역 곳곳마다 흔하게 전송될 것임을 알겠다.”라고 하였다.

경은 이맹전의 자는 백순(伯純),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그는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과 정언 등을 지냈으며 거창현감으로 재직할 때는 청백리로 칭송이 자자하였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난으로 집권한 세조가 마침내 단종을 폐위하자 선산에 은거하며 눈멀고 귀먹었다는 핑계로 벼슬에 나가지 않은 채 김종직(金宗直)의 부친인 김숙자(金叔滋)와만 교분을 유지하였다. 훗날 단종을 위해 절개를 지켰다는 사실이 알려져 생육신에 추대되었다.

이맹전의 손자 이배원(李培源)은 영천 자양에 입향하여 영천 벽진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이배원의 아들 이의(李椅)는 명산(明山) 김응생(金應生) 등이 자양서당을 지을 때 서당 터를 제공했는데, 이태일의 12대조이다. 11대조인 장계(獐溪) 이수겸(李守謙)은 지산(芝山) 조호익(曺好益)과 도의지교를 맺었다. 10대조 독락당(獨樂堂) 이지백(李知白)은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도학을 닦았는데, 출사보다 은거하여 유유자적하며 후학을 양성하였다. 6대조 소와(塑窩) 이석화(李錫華)와 5대조 이희룡(李羲龍7)은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의 문하에 나아가 수학하면서 퇴계학맥을 계승하였다. 요컨대 벽진이씨 명암 집안은 13대조 이배원이 영천에 입향한 이래로 이지백·이석화·이희룡을 거쳐 명암 이태일에 와서 퇴계학맥의 중요한 가문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태일의 자는 삼수(三叟), 호는 명암(明庵), 본관은 벽진(碧珍)이며 부친은 이승원(李承源), 모친은 달성서씨(達成徐氏) 서상호(徐相鎬)의 딸이다. 이태일은 고려 삼중대광 개국원훈 벽진장군 이총언의 후손으로, 조부 이진현(李鎭鉉)에게 가학을 전수받고 부친 이승원과 인척 관계인 권재동(權載東)에게 『대학』과 『중용』을 배워 학문의 기초를 닦았다. 1888년(고종 25)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상경했지만, 매관매직이 성행하는 세태를 보고 탄식하며 과거 공부를 포기하였다. 이후 고향에 은거하여 성리학 공부에 매진하는 한편,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 석호(石湖) 류도성(柳道性), 척암(拓庵) 김도화(金道和) 등과 교유하면서 퇴계학통을 계승하였다. 한편 1913년 일제가 한일합병 기념 훈패를 제작하여 국내의 저명한 인사들에게 나누어 주자 이태일은 크게 분노하며 유명한 「육산시六山詩」를 지어 거절의 뜻을 분명히 했다.

굶는다면 수양산을 본받겠고
먹는다면 사첩산을 본받겠다
숨는다면 정우산을 본받겠고
피한다면 서비산을 본받겠다
살아서는 홍냉산을 본받겠고
죽어서는 문문산을 본받겠다
만남에 따라 육산을 본받으면
낮은 구릉도 산을 배울 수 있네

餓則效西山
食則效疊山
隱則效盂山
避則效鼻山
生則效冷山
死則效文山
隨遇效六山
邱陵可學山

또 1926년 순종의 국상(國喪) 때 옛 신하들이 만장에 ‘신(臣)’자를 쓰지 않자 이태일은 분개하여 “부(父) 전에 자(子) 자를 쓰지 않으면 이는 역자이고, 군(君) 전에 신(臣) 자를 쓰지 않는 것은 역신이다. 이 역신의 만장을 어찌 우리 임금 앞에 세울 수 있느냐? 빨리 만장을 땅에 눕혀라.”라고 호통을 쳤다. 그 사건 이후 배우러 오는 사람들을 위해 용산정사를 건립하고 강학과 저술에 전념하며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다. 저서로는 『명암집明庵集』, 『주역회의周易會疑』, 『대학회의大學會疑』, 『용산답문록龍山答問錄』 등이 있다.

참고문헌
  • 「옹야」, 『논어』.
  • 김주부, 「벽진이씨 명암고택의 가계와 고전적 현황」, 『벽진이씨 명암고택』, 한국국학진흥원,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