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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정사(淸凉精舍)

도산서원 운영위원회陶山書院 運營委員會

43.5×111.6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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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청량정사(淸凉精舍)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43.5×111.6
  • 건물명 청량정사(淸凉精舍)
  • 공간명 도산서원 운영위원회陶山書院 運營委員會
  • 서예가
  • 위치정보 경상북도 봉화군 명호면 청량산길 199-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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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정사(淸凉精舍)

청량정사(淸凉精舍)



청량정사(淸凉精舍)는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이 공부하던 곳에 후학들이 강학하는 장소를 짓기 위하여 1841년(헌종 7) 경상북도 봉화군 명호면 북곡리에 건립한 정사의 편액이다. 이 편액은 도산서원운영위원회에서 기탁한 자료로, 크기는 가로 111.6㎝, 세로 43.5㎝이다. ‘청량정사’는 ‘청량산에 있는 정자’라는 의미이다. 청량정사 건립 과정에 대해서는 이중봉(李中鳳)이 지은 「오산당중건기(吾山堂重建記)」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여기에서 퇴계는 일찍이 스스로 청량산인(淸凉散人)이라 칭하면서 청량산을 유가(儒家)의 산이라 하였기에 퇴계와 청량산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밝히고 있다. 이후 건립 과정에 대해서는 순조 임진년(1832)에 정사를 건립하기로 합의하여 ‘오산당(吾山堂)’이라 편액하였는데, 이는 중국 송나라 주희의 시 “우리 유가의 어둡던 길 밝디밝게 비춰주니 부디 머나먼 병주를 고향으로 삼지 마소[明明直照吾家路 莫指幷州作故鄕]”라는 시구에서 취한 말임을 설명하면서 사람들에게 이 산에 살면서 불가에 의해 마음이 물들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그런데 병신년(1896)에 병란으로 불타 없어지고 3년 뒤인 무술년(1898)에 사림에서 회의하여 중건하기로 하였다. 이때 후손 이만유(李晩由)가 총괄책임자를 맡고 이만응(李晩鷹)이 재무를 담당하였다. 부엌 6칸은 이휘린(李彙璘)이 담당하고, 강당 10칸은 이중봉(李中鳳)과 이중우(李中祐)가 감독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기해년(1899) 겨울에 시작하여 신축년(1901)에 완공하였다. 이때 당은 오산당(吾山堂), 마루는 운서헌(雲棲軒), 부엌은 지숙료(止宿寮)라 하고 모두 합하여 청량정사라 하였다. 청량정사는 1991년 경북문화재자료 제244호로 지정되었다가 2017년 5월 15일 경북기념물 제176호로 지정되었다.

글씨는 작자 미상의 해서체이다. 일정한 크기의 글씨와 자간도 일정한 글씨임에도 불구하고 상하의 넓은 여백과 선질의 까칠함으로 인하여 편액 전체에 맑고 서늘한 기운이 가득하여 시원한 시각적 효과를 연출하고 있다. 한 점 한 획을 하나의 흐트러짐 없이 단정하게 법도에 어긋남 없이 처리하여 인쇄된 책에서나 볼 수 있는 단정함이 넘쳐서 마치 경전을 대하는 것 같다.(서예가 遯石 양성주)

도산서원 운영위원회陶山書院 運營委員會 소개



청량산은 경상북도 봉화군 명호면과 재산면, 안동시 도산면과 예안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자연경관이 수려하고 기암괴석이 장관을 이루어 예로부터 소금강으로 불린 명산이다. 청량산은 1982년 8월에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2007년 3월에 청량사 주변 지역을 중심으로 공원 일부가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23호로 지정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청량산은 고대 이래로 수산으로 불리다가 조선시대에 금탑봉에 자리 잡은 상청량암과 하청량암이 널리 알려지면서 언제부터인가 청량산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높이는 870.4m이다. 청량산은 주세붕(周世鵬)이 명명한 12봉우리가 주축을 이루며, 태백산에서 발원한 낙동강이 산의 웅장한 절벽을 끼고 유유히 흘러간다. 산 전체가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36개의 봉우리가 제각각 솟아 있는 모양이다. 동쪽 비탈면인 봉화군 재산면에는 약간의 평지가 형성되어 있고 평지 가운데로 하천이 흐른다. 서쪽 비탈면으로 낙동강의 본류가 흐르고 있다. 능선은 북쪽으로 문명산·미림산·화장산을 거쳐 태백산으로 이어지고, 남쪽으로는 도촌리 607고지·영등산·아기산으로 이어진다.
봉화군 명호면 북곡리는 중앙에 청량산을 두고, 아래쪽으로 해발 845m의 산성, 위쪽으로 해발 849m의 문명산 사이에 펼쳐져 있는 산마을이다. 서쪽 영역은 낙동강 줄기가 확정하여주고, 동쪽으로는 재산면 영역이 나누어준다. 이 북곡리 영역은 위로는 12번 군도로가 횡단하고, 남쪽으로는 14번 군도로가 횡단한다. 마을은 주로 이 두 도로 좌우편에 펼쳐져 있다. 12번 도로의 서쪽 입구 부분에는 북곡이 있다. 뒷실·뒤실이라고도 한다. 원래 안동부에 딸린 재산현 지역이었으나, 1914년 이후 명호에 편입되었다. 뒷실 바로 동편으로는 아랫뒷실이 있다. 낙동강 변 마을이고, 북곡초등학교가 있는 곳이다. 북곡리 위쪽에 산재하는 마을들은 반드시 이곳을 통해야 밖으로 나갈 수 있다. 그러므로 이곳이 북곡 본동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아랫뒷실의 남쪽으로는 절터골이 붙어 있다. 옛날에는 여기 절이 있었다고 한다. 절터골 아래로 있는 것은 갈평이다. 갈화낙지(葛花落地)의 명당이라 한다. 비교적 넓고 평평한 곳인데, 마을 뒤편에는 왜목이라는 곳이 있다. 낙동강을 굽어볼 수 있는 곳인데, 임진왜란 때 여기까지 왜병이 들어왔었다고 한다. 절터골 북쪽으로 좀 떨어진 지점에는 운산이 있다. 구름재라고도 한다. 여기에는 운산정(雲山亭)이 있다. 이곳은 임진왜란 때 청주정씨(淸州鄭氏) 정사성(鄭士誠)이 왕의 화상을 가지고 피난하여서 그 공으로 하사받은 땅이다. 절터골의 동쪽으로는 북장곡이 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북곡리는 6·25 때 격전지였지만, 이곳만은 병화를 입지 않았다. 북장곡의 동편으로는 윗뒷실이 있고 또 그 동편으로는 옥산이 있다. 윗뒷실은 문명산 남쪽 사면에 자리 잡고 있으며, 공민왕과 노국공주를 모신 사당이 있다. 월성이씨(月城李氏)가 개척한 마을인데 단종 폐위 후 밀양박씨(密陽朴氏)가 들어왔고, 그 후 영천이씨(永川李氏)·진성이씨(眞城李氏)가 들어와 제법 큰 마을을 이루었다. 옥산은 진성이씨 퇴계 이황의 증손인 이기(李岐)와 그의 아들 이극철(李克哲)을 모신 묘가 있는 곳이다. 묘를 쓸 때 ‘옥반지 서 말은 나올 명당’이라 하였고, 그리하여 옥산이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 14번 도로의 서쪽 출발 지점은 청량산 매표소이다. 이곳 앞에는 청량산박물관이 있다. 이 길의 중간 지점에 약간 못 미친 곳에서는 청량사로 오르는 길이 갈라진다. 청량사는 청량산 일원에서 가장 풍광이 좋은 지점에 자리 잡고 있는 유서 깊은 절이다. 청량산의 동편으로는 청량정사(淸凉精舍)가 자리 잡고 있다. 14번 도로의 남쪽 멀리 축융봉 아래에는 산성이 자리 잡고 있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이리로 피난하였다고 하며, 공민왕당·오마대 등이 여기에 있다. 14번 도로의 동쪽 끝으로는 윗청량골이 있다. 이곳을 벗어나며 길은 오르막으로 접어들고, 다시 심한 내리막길이 되어 재산의 남면 쪽으로 내려선다.

참고문헌
  • 청량산박물관, 『오가산지(吾家山誌)』
  • 유교넷(http://www.ugyo.net/)

  •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1』, 한국국학진흥원, 2016
  • 한국학중앙연구원-디지털안동문화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