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주메뉴 바로가기
  • 편액
  • 서체별 보기

유경당(幽敬堂)

풍산김씨 경남재(豐山金氏 敬楠齋)

64.0x91.0x6.9 / 해서(楷書)MORE

의견달기 URL
목록 이전 기사 다음 기사
  • 자료명 유경당(幽敬堂)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64.0x91.0x6.9
  • 건물명 유경당(幽敬堂)
  • 공간명 풍산김씨 경남재(豐山金氏 敬楠齋)
  • 서예가
  • 위치정보 안동시 풍산면 오미동
  •  
r0090_1.jpg
유경당(幽敬堂)

유경당(幽敬堂)


유경당(幽敬堂)은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에 있는 김의정(金義貞, 1495~1547)의 종택의 사랑채 당호이다. ‘유경’은 현실정치에 물러나 심신을 수양하며 그윽하게 지낸다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김의정의 별호이기도 하다. 흔히 쓰는 잠암(潛庵)은 『주역周易』, 「건괘 초구 효사乾卦 初九 爻辭」의 “잠겨 있는 용이니 쓰지 말라.〔潛龍勿用〕”에서 취하였다. 공자는 『주역』, 「건괘 문언乾卦 文言」에서 잠룡(潛龍)을 설명하면서 “세상을 피해 숨어 살면서도 근심이 없고, 남의 인정을 받지 못해도 근심이 없다. 즐거우면 행하고 걱정되면 떠난다. 그의 뜻이 확고해서 동요시킬 수가 없다. 이것이 숨은 용이다.〔遯世無悶 不見是而無悶 樂則行之 憂則違之 確乎其不可拔 潛龍也〕”라고 말하였다. 편액 글씨는 몽중몽인(夢中夢人) 정학교(丁鶴喬, 1832~1914)가 쓴 것으로, 해서체지만 예서체처럼 넓게 쓴 점이 특이하다.

필획의 상하간 공간을 촘촘하게 배치하여 자형은 납작한 형세다. 그 원인으로 글자의 좌우 관계는 긴밀하게 배치된다. 해서체로서는 독특한 형식이 되었다. 그러나 가로 납작한 형태의 서체는 그 근원이 오래되었다. 해서의 처음이라 할 수 있는 후한 말의 종요(鍾繇, 151~230)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가로획이 경사지지 않고 수평이며 시원하게 펼쳐지는 것은 당시 대세를 이룬 예서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편액의 자형과 기세의 연원이 사실은 이와 같이 깊다. 연원 깊은 고법을 따르고자 하였으리라. 웅크리고 있는 듯한 기세에 응축된 에너지가 있다. 기세는 품고 있을 때 더욱 빛나는 듯하다.

(서예가 恒白 박덕준)

풍산김씨 경남재(豐山金氏 敬楠齋) 소개


김의정(金義貞, 1495~1547)의 본관은 풍산(豐山), 자(字)는 공직(公直), 호는 잠암(潛庵), 또는 유경당(幽敬堂)이다. 아버지는 허백당(虛白堂) 김양진(金楊震)이고 어머니는 양천허씨(陽川許氏)로 서울 장의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책을 읽기 좋아하여 『심경』, 『근사록』 등을 즐겨 읽었으며 특히 『소학』을 신명으로 받들었는데 뒷날 대윤(大尹)과 소윤(少尹)의 일파와 맞서 사림성향의 행동을 보인 것도 이때 비롯된 학문적 영향에서 기인한 듯하다. 1501년 7세의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는 충격이 있었으나 독서를 게을리하지 않아 8~9세에 이미 글을 지을 줄 알았다. 1516년(중종 11)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서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용재(容齋) 이행(李荇) 등과 교유하였다. 1526년(중종 21)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정자에 임용되었으며 이듬해 저작, 박사, 수찬을 거쳐 1529년 6월 사간원정언이 되었다. 1531년 홍문관수찬으로 있으면서 올린 차자(箚子) 때문에 파직되어 풍산 별서로 돌아왔다가 1539년에 공조좌랑으로 복직되었다가 그해 겨울 예조정랑으로 보임되었다. 1541년에 군기시첨정이 되었고 1543년에 홍문관수찬, 승문원교감이 되었으며, 1544년에 훈련원부정이 되었다가 1545년 종부시첨정 겸 춘추관편수관이 되었다. 1545년 7월에 인종이 갑자기 승하하자 병을 핑계로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다가 1547년 인종의 종제(終制)에 곡을 하다 병을 얻었지만 치료를 거부하여 10월 13일 운명하였다. 1859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1863년에 정간(靖簡)의 시호를 받았다가 1864년 문정(文靖)으로 개시하였다. 김의정은 절의와 문장으로 이름이 났는데, 퇴계 이황은 그의 시에 대해서 높이 평가하였고, 지정(止亭) 남곤(南袞)은 평소 타인의 문장에 대해서 인정하는 바가 없었으나, 김의정에 대해서 “김 아무개의 뛰어난 재주는 마땅히 후진의 제일이다.”라고 칭송하였다. 동고(東皐) 이준경(李浚慶)은 십여 년을 같은 방을 사용하였는데, 늘 “이 사람은 매우 청백(淸白)하고 성품 또한 강직하며 환란을 당했을 때는 옛날 절의를 세운 사람에 뒤지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은 “잠암의 문장과 절의는 모두 세상에서 불후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안동읍지』와 『영가지』에도 절의와 행실이 세상에 이름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그의 문집에는 23편의 부(賦)가 있을 정도로 부(賦)에 특장을 지니고 있는데, 이 중에 「천형부踐形賦」에 대해서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는 “문장과 논리가 모두 지극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감탄하였고,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은 그의 「기강부紀綱賦」를 읽고서 “이와 같은 작품은 논리가 매우 훌륭하니, 평소 실천의 독실함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작품은 백 년 이래에 거의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오미동의 풍산김씨(豊山金氏)는 고려 중기 인물인 김문적(金文迪)을 시조로 하고 있으며, 안동에서 지주적 기반을 형성하게 된 배경은 김안정(金安鼎)의 둘째 아들인 김자순(金子純)이 안동 풍산 오릉동(지금의 오미동)에 살기를 정한 데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자순의 후손들은 이후에도 사환으로 서울에 거주하였는데, 허백당 김양진이 오릉동을 자주 출입하였다가 그의 아들 잠암 김의정이 을사사화 이후 안동으로 완전히 낙향하여 오릉동을 오무동으로 바꾸어 정착함으로 인해 명망세족으로 성장하는 기초를 닦았다. 그런데 정치적 환멸을 느낀 그는 아들에겐 벼슬하지 말고 농사나 지으면서 살라는 의미로 이름조차 ‘농(農)’으로 바꾸었다. 손자인 유연당(悠然堂) 김대현(金大賢)은 도연명(陶淵明)의 「음주飮酒」 시의 “동쪽 울타리 아래에서 국화를 캐노니 저 멀리 아득히 남산이 보이네. [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에서 취하여 이웃 마을에 사는 김윤안(金允安)과 서로 호를 나누어서 김윤안은 동리(東籬)라 하고 김대현은 유연당이라 자호하기도 하였다. 김대현은 아홉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이 중에 여덟째 김술조(金述祖)는 요절하였고 나머지 여덟 명은 학호(鶴湖) 김봉조(金奉祖, 1572~1630)·망와(忘窩) 김영조(金榮祖, 1577∼1648)·장암(藏庵) 김창조(金昌祖, 1581~1637)·심곡(深谷) 김경조(金慶祖, 1583~1645)·광록(廣麓) 김연조(金延祖, 1585~1613)·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 1587~1667)·학음(鶴陰) 김염조(金念祖, 1589~1652)·설송(雪松) 김숭조(金崇祖, 1598~1632)이다. 특이하게도 8형제 모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이들 중 5형제(봉조·영조·연조·응조·숭조)는 문과에 급제하자 인조 임금이 팔련오계지미(八蓮五桂之美)라 칭찬하고 마을 이름을 오무동에서 오미동으로 고치게 하고 마을 앞에 봉황려라는 문을 세우게 하였다. 이때부터 오미동의 풍산김씨는 미김(美金)으로 불리며 명망 있는 재지사족으로의 기반을 확고히 다지게 되었다. 8형제는 모두 현달하여 학호파·망와파·장암파·심곡파·광록파·학사파·학음파·설송파 등으로 분파되어 각기 파조를 이루었다. 8형제 가운데 김봉조·김경조·김숭조는 그대로 오미리에 세거하였고, 김영조·김창조·김응조는 영주에 살다가 그 후손들 중 제주목사를 지낸 노봉(蘆峯) 김정(金伯政, 1670∼1737)이 1696년(숙종22) 오전리에 살고 있던 삼종형(三從兄) 김성(金伯星, 1661~1724)에게 인사차 들렀다가 풍수가 너무 좋아서 오록에 터를 잡아 후손들이 세거하였다. 김연조의 후손들은 예천 벌방리에 터전을 잡았으며 김염조는 재종숙 둔곡(遁谷) 김수현(金壽賢, 1565∼1653)에게 출계(出系)하여 경기도 파주로 이거하였다.

유경당종택은 임진왜란 때에 소실되었다가 김대현의 장자인 김봉조가 1600년 다시 건립한 것으로 오미동 풍산김씨의 큰 종가이다. 오미동 앞산의 이름은 검무산이고 뒷산은 독지미 또는 구을산이라고도 한다. 종택은 마을의 동북쪽 제일 위, 바로 산기슭 아래에 자리를 잡고 있다. 건물의 구성은 대문채와 몸채인 ㅁ자집, 그 좌측에 있는 아랫 사랑채와 ㅁ자집 뒤에 있는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문채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중앙에 쌍여닫이널문으로 대문을 달고, 그 좌우에는 방과 광을 꾸몄다. ㅁ자집은 정면 8칸, 측면 7칸의 규모로 1m 50cm의 기단을 쌓아 안채와 바깥채를 구성하고 지붕을 팔작기와로 연결하였다.

참고문헌
  • 성백효 『국역잠암선생일고』 해제, 한국국학진흥원, 2008.
  •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문화박물관, 『민심을 보듬고 나라를 생각하며』, 제10회 기탁문중 특별전(풍산김씨 허백당 문중), 2013.
  •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 유교역사관(http://www.ugyo.net) 『서소선생문집』 상세해제
  •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 Ⅱ,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