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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인재(輔仁齋)

고성이씨 보인재固城李氏 輔仁齋

32.5×63.5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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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보인재(輔仁齋)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32.5×63.5
  • 건물명 보인재(輔仁齋)
  • 공간명
  • 서예가
  • 위치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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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인재(輔仁齋)

보인재(輔仁齋)



보인재(輔仁齋)는 평담(平潭) 이전(李銓, 1832∼1886)이 1885년(고종 22) 경상북도 안동시 동부동의 곡천서실(谷泉書室) 아래에 건립한 재(齋)의 편액이다. 곡천서실은 이전의 증조부인 하암(下庵) 이종휴(李宗休, 1761~1832)와 종증조부인 제암(霽庵) 이종유(李宗儒, 1749~1811)가 만년에 도를 강학하기 위해서 지은 건물로, 산 아래에 샘물이 나오는 형상을 보고 명명한 것이다. 이후 곡천서실은 그의 아들 침천(枕泉) 이면수(李冕秀)와 손자 이정악(李庭岳)을 거쳐 증손인 이전에게 전수되었다. 이 편액은 고성이씨(固城李氏) 문중에서 기탁한 것으로, 크기는 가로 63.5㎝, 세로 32.5㎝이다. ‘보인’은 『논어』 「안연(顔淵)」에서 증자가 말하기를 “군자는 글로써 벗을 모으고 벗으로써 인을 돕는다.[君子 以文會友 以友輔仁]”라고 한 데서 취한 말이다.

글씨는 금전(琴田) 최종응(崔鍾應, 1873~1943)의 해서체로 추정된다. 굵은 획으로 반듯하게 마무리한 ‘보(報)’ 자에서 호(毫)가 긴 붓이 구사해낸 리듬감을 본다. 가늘고 가벼운 획과 굵고 무거운 획을 다소 과장되게 보여주는 ‘인(仁)’ 자는 어진 덕성을 함양함에 있어서 배움을 함께하는 벗의 사귐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서예가 遯石 양성주)

소개



이전(李銓, 1832∼1886)은 자가 가진(可振), 호가 평담(平潭)이다.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의 문인으로, 두 번이나 초시에 합격하였으나 대과에 실패한 후 병을 얻어 과거를 단념하였다. 3세 때 부친을 여의고 모친 봉양에 효성이 지극하였는데, 안동부사 김상현(金尙鉉)이 쌀과 고기를 보내 효행을 기렸고 전임되어 갈 때는 시와 부채를 보내왔다고 한다. 그는 뜻이 고상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항상 의관을 정제하고 고요히 앉아 『심경(心經)』·『근사록(近思錄)』 등을 탐독하였다.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일춘(日春) 김호영(金浩永)·용산(龍山) 이만인(李晩寅)·졸수(拙修) 류정호(柳廷鎬) 등과 도의(道義)를 강마하였다. 문장은 절실하고 명백하여 금방 베틀에서 꺼낸 비단처럼 빛났다. 일찍이 말하기를 “옛사람들의 글은 질박하게 성정을 묘사함에 혼연히 저절로 이루어져서 사람들이 사랑하며 감상하게 하는데, 지금 사람들의 문장은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데 힘쓰니 이것은 곧 사사로운 뜻에서 나온 것이라, 가증스러운 것이다.”라고 하였다. 저술로는 『효경연의(孝經衍義)』·『의앵언록(義鸚言錄)』·『독서규반(讀書窺班)』·『몽양록(蒙養錄)』 등이 있다.
보인재(輔仁齋)에는 보인재를 건립한 평담 이전의 시판이 걸려 있었는데, 이 시는 그의 문집인 『평담문집(平潭文集)』에도 수록되어 있다.

조상들이 지내던 곳에 先子枕漱地
부끄럽게도 내가 가업을 이었네 吾慚肯構人
다행히 제현들의 힘을 입어 幸賴諸賢力
하루아침에 띠 집을 이루었네 茅廬一朝新
몇 권의 책을 꽂아두니 排置數卷書
칠 척의 몸이 한가롭네 偃仰七尺身
편하게 지내기 위함이 아니고 匪爲便起居
벗을 구하여 인을 돕기 위함이네 求友以輔仁
점차 벗과 사귀는 맛을 아니 漸知麗澤味
고량진미로도 바꾸지 않으리라 不換膏粱珍
내 집이 작다고 말하지 말라 勿謂吾屋小
원근의 벗들이 기쁘게 찾아온다네 遠邇來翩繽
다만 성의가 부족한 걸 걱정해야지 但恐誠意薄
어찌 가난함을 한스럽게 여기랴 肯恨環堵貧
골짝 입구에 우물이 하나 있어 谷口有一井
맑은 물이 손님 머무르게 하네 淸水可留賓
또 보이는 건, 숲 밖의 又見平林外
두 물줄기 먼지 없이 맑음이네 雙流瀅不塵
바라노니, 함께 머리 감으며(지내면서) 願言同濯髮
봄날에 무우에서 시 읊으며 돌아오기를 以詠舞雩春
그립구나, 학문의 범주 속에 懷哉宮墻裏
문물이 정히 빛나고 빛남이 文物正彬彬
고금이 멀다고 말하지 말라 莫謂今古遠
천 년이 어제처럼 느껴진다네 千載如隔晨
산하가 험하다고 말하지 말라 莫謂山河阻
만 리가 이웃처럼 느껴진다네 萬里如比隣
원하는 것은 선비들을 뒤따르며 願隨群彦後
노력하여 현묘한 경지에 다다름이네 努力妙境臻

이전은 운명하기 1년 전인 1885년(고종 22) 보인재를 짓고서 문하생과 더불어 날마다 이곳에서 지내면서 밝은 창 아래 고요히 책상에 앉아 경사(經史)를 강론하였다. 그 옆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이 문을 바라보면 반드시 경의를 표하며 말하기를 “군자가 사시는 곳이다.”라고 하였다. 안동부사 조병호(趙秉鎬)가 시로 지어 이르기를 “추로(鄒魯)의 고장에 고상한 선비가 남아, 낙관(洛關)의 학문을 후인들에게 보여주네.[鄒魯餘高士 洛關見後人]”라고 하였다. ‘추로’는 맹자의 출생지인 추(鄒)와 공자의 출생지인 노(魯)를 합칭한 말로, 유학적인 예의와 문명이 성대한 지역을 가리키는데, 흔히들 안동을 가리켜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고도 한다. ‘낙관’은 염락관민(濂洛關閩)을 줄인 말인데, 염은 주돈이(周敦頤)가 강학하던 염계(濂溪), 낙은 정호(程顥)와 정이(程頤)가 강학하던 낙수(洛水), 관은 장재(張載)가 강학하던 관중(關中), 민은 주희(朱熹)가 강학하던 민중(閩中)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들은 모두 송나라 때의 대학자로서 송대 신유학의 비조(鼻祖)들이다. 후대에는 성리학을 뜻하는 말로 대신 쓰이기도 한다.

참고문헌
  • 이전(李銓), 『평담문집(平潭文集)』
  •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1』, 한국국학진흥원, 2016
  • 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
  • 유교넷(http://www.ugy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