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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앙문(山仰門)

경주이씨 표암화수회慶州李氏 瓢巖花樹會

74.0×176.0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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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산앙문(山仰門)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74.0×176.0
  • 건물명 산앙문(山仰門)
  • 공간명 경주이씨 표암화수회慶州李氏 瓢巖花樹會
  • 서예가
  • 위치정보 경상북도 경주시 산업로 4152-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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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앙문(山仰門)

산앙문(山仰門)



산앙문(山仰門)은 경주이씨(慶州李氏) 시조인 이알평(李謁平)을 기리기 위해 경상북도 경주시 동천에 건립한 표암재(瓢巖齋) 정문의 편액이다. 이 편액은 경주이씨 표암화수회에서 기탁한 것으로, 크기는 가로 176㎝, 세로 74㎝이다. ‘산앙’은 ‘고인의 큰 덕행을 흠모한다’라는 뜻으로, 『시경(詩經)』 「소아(小雅) 거할(車轄)」의 “높은 산을 우러러보고 큰길을 향해 나아가다.[高山仰止 景行行止]”라고 한 데서 취한 말이다. 이 구절에 대해서 공자가 “시에서 인을 좋아함이 이와 같다. 사람들은 큰길을 걸어가다가 힘이 다해서 계속 걸을 수 없을 때에야 중도에 그만둔다. 마찬가지로 몸이 이미 늙은 것도 잊고서 앞으로 남은 세월이 얼마 되지 않는 것도 염두에 두지 않은 채 날마다 열심히 노력하다가 죽은 뒤에야 그만둔다.[詩之好仁也如此 鄕道而行 中道而廢 忘身之老也 不知年數之不足 俛焉日有孶孶 斃而後已]”라고 평한 말이 『예기(禮記)』 「표기(表記」에 나온다.
이알평은 신라 초기의 문신으로, 신라 개국 전에는 사로의 알천양산촌 촌장이었다. 신라 유리왕에게서 32년(유리왕 9) 이씨 성을 하사받은 이알평은 경주이씨의 시조가 되었으며, 536년(법흥왕 23)에 문선(文宣)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글씨는 작자 미상의 해서체이다. 언제나 변함없이 항상 그대로인 의지에 차 있으나 꾸밈없는 ‘산(山)’ 자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 산을 우러러보는 사람인 듯 다소곳하게 서 있는 ‘앙(仰)’ 자가 이어진다. ‘문(門)’ 자는 외부와의 경계이자 내부를 지키는 기능을 하기에 튼튼하게 쓰기 마련이지만 이 편액에서는 누구라도 받아주려는 듯 친근하다.(서예가 遯石 양성주)

경주이씨 표암화수회慶州李氏 瓢巖花樹會 소개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기원전 117년, 경주이씨의 시조인 알평(謁平)이 하늘에서 신라의 4대 영산(靈山)의 하나인 경주 서북 금강산의 표암봉으로 내려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로 6촌은 알천양산촌·돌산고허촌·무산대수촌·취산진지촌·금산가리촌·명활산고야촌이다. 그런데 『삼국사기(三國史記)』를 보면 진한 6부는 신라 때 경주의 행정구역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新羅本紀)」에 의하면 신라 건국 이전부터 있던 6촌을 32년(유리왕 9) 개칭하여 6부로 하였는데, 알천양산촌을 양부 혹은 급량부, 돌산고허촌을 사량부, 취산진지촌을 본피부, 무산대수촌을 점량부 혹은 모량부, 금산가리촌을 한지부 혹은 한기부, 명활산고야촌을 습비부라 하고 각각 6부에 이(李)·최(崔)·정(鄭)·손(孫)·배(裵)·설(薛)의 6성을 주었다고 하였다. 시조의 영지인 알천양산촌은 뒤에 급량부가 되는 뿌리의 마을로 6촌의 모체이고 급량부의 촌장인 알평은 6촌의 부족사회를 영도하는 수장이었다.
경주이씨의 시조는 알평이지만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이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의 묘지(墓誌)를 지으면서 신라 말에 소판에 이른 이거명(李居明) 이후의 세계(世系)를 자세하게 적은 것이 계기가 되어 이거명을 중시조 곧 기세조로 하고 있다. 본적 경주를 비롯하여 8개 분적하였는데, 이거명의 18세손 이영재(李永梓)·이군재(李君梓)를 시조로 하는 진주이씨(晉州李氏), 이거명의 19세손 이반계(李攀桂)를 시조로 하는 원주이씨(原州李氏), 이주복(李周復)의 아들 이우칭(李禹偁)을 시조로 하는 재령이씨(載寧李氏), 이거명의 6세손인 이주좌(李周佐)를 시조로 하는 아산이씨(牙山李氏), 이거명의 15세손 이편(李翩)의 아들 이임간(李林幹)을 시조로 하는 장수이씨(長水李氏), 이구(李球)를 시조로 하는 우계이씨(羽溪李氏), 이위(李渭)를 시조로 하는 차성이씨(車城李氏), 이개(李開)를 시조로 하는 합천이씨(陜川李氏) 등으로 구분하였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기원전 69년 3월 1일 6촌의 촌장들이 각기 그의 자제들을 이끌고 알천의 안상에 모여 나라를 세울 것을 의논하였다. 이때 이 회의를 주재한 사람이 알평 시조였다. 알평은 사로국의 수장으로 13년간 다스린 후 13세 된 혁거세에게 ‘밝[朴]’의 성을 주어 기원전 57년 왕으로 추대하니 이분이 박혁거세이다. 이때 회의를 하면서 준수해오던 ‘논의와 결의의 방법’이 바로 화백이라는 것이다. 이 화백제도는 중국에까지 소문이 나서 중국 사서(史書)에 기록이 보인다. 『수서(隋書)』 「신라전(新羅傳)」에 “공공의 큰일에는 많은 관리를 모아놓고 자상하게 의논하여 완결 짓는다.[共有大事 則聚群官 詳議完之]”라고 하였고 『당서(唐書)』 「신라전」에는 “일은 반드시 많은 사람과 더불어 의논하는데 이를 ‘화백’이라고 부른다. 한 사람이 의견을 달리하면 그만둔다.[事必與衆議 號和白 一人異則罷]”라고 하였다. 이 화백제도는 기원전 69년의 알천 안상의 6촌 회의에서 유래했는데, 어떤 이는 이 화백제도를 민주주의 회의의 발상이라고 한다.
표암의 높이는 약 20여m이고, 북천과의 거리는 약 700여m이며, 동쪽의 경사도는 약 34° 내외, 서쪽의 경사도는 약 40° 내외이고, 남쪽은 약 24°이며, 남쪽 끝부분은 절벽처럼 되어 있고 그 아래에 표암재(瓢巖齋) 등의 건물이 있다. 정상부에는 광림대(光臨臺)라는 비각이 있고 이 안에는 평면에 홈이 파진 가로 111㎝, 세로 67㎝, 깊이 23㎝ 되는 석조물이 있으며, 그 속에는 몇 가지 인위적인 부분이 눈에 띈다. 정상부에서 남쪽으로 41m 지점에 돌로 쌓은 제단이 있다. 가로 140㎝, 세로 221㎝, 높이 79㎝의 규모이다. 정상부를 중심으로 동쪽·서쪽·남쪽에는 약 20여 개에 달하는 2종류의 구멍돌과 성혈이 있으며, 탈해왕릉 뒷부분에서도 관찰된다. 북쪽으로 능선을 따라가다 보면 고분들이 산재해 있다. 표암 아래의 남쪽과 서쪽에 산앙문(山卬門)과 조동문(肇東門)이 있는데 표암재 뜰에는 신라정(新羅井)이 있다. 이 우물의 깊이는 8∼9m 정도이고, 자연석으로 쌓아 올린 부분의 지름은 60㎝ 정도이며, 위에는 최근 화강암으로 높이 60㎝, 가로·세로 79㎝의 육각형 모형에 구멍지름 45.5㎝ 크기로 장식했고, 전기로 펌프를 작동시켜 우물물을 사용할 수 있도록 시설했다. 신라정 옆에는 가로 60㎝, 세로 46㎝ 정도 크기의 자연석이 있는데 작은 구멍이 7개 관찰된다. 뒤편에는 육합대(六合臺)가 있다. 이것은 가로 52㎝, 세로 53㎝, 높이 약 12㎝ 크기로 석조물 중앙부에 크기 21㎝에 깊이 12㎝의 구멍이 있다. 이곳에서 7m 우측에는 화강암을 연마한 평편한 면에 나무 모양을 새겨놓은 것이 있다. 그리고 신라정 좌우에도 각각 1개씩 비슷한 모양의 것을 새겨놓은 석조물이 있다. 그 밖에도 몇 개의 초석도 관찰할 수 있고, 안내판 위 바위에는 조선시대에 새겨넣은 ‘표암(瓢巖)’이 있다.
경상북도 경주시 효현동은 ‘소태’라 하는 별칭으로 불리고 있는데 이곳은 선도동·서현동·솟티·소티 등으로도 지칭된다. 마을에서 약 500여m 거리의 낮은 산에는 고분군이 있고, 형산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대천이 약 300m 거리에 흐른다. 마을로부터 서북 방향 약 3㎞ 거리에 선도산 정상이 있으며, 여기에는 산성지와 마애석불, 삼층석탑 등이 있고 태종무열왕릉이 선도산 동쪽 야지에 있다. 이어 다시 마을로부터 동남쪽 약 3㎞ 거리에 남산이 있다.

참고문헌
  •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1』, 한국국학진흥원, 2016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
  • 유교넷(http://www.ugy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