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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교당(明敎堂)

기천서원箕川書院

50.6×140.3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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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명교당(明敎堂)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50.6×140.3
  • 건물명 명교당(明敎堂)
  • 공간명 기천서원箕川書院
  • 서예가
  • 위치정보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나산길 3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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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교당(明敎堂)

명교당(明敎堂)



명교당(明敎堂)은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월오리에 건립된 기천서원(箕川書院)에 딸린 부속 건물의 편액이다. ‘명교’는 유교의 기본 덕목인 ‘오교(五敎)’ 즉 ‘오륜(五倫)’을 밝힌다는 뜻이다. 오륜은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을 말한다. 기천서원은 안준(安俊), 이문흥(李文興), 문근(文瑾), 문관(文瓘), 이구(李構) 등 다섯 사람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글씨는 작자 미상의 해서체이다. ‘일(日)’과 ‘월(月)’이 손 맞잡고 반듯하게 서서 환한 빛을 비추는 듯 힘차게 거두어들인 붓의 흔적에서 오륜을 분명하게 밝히겠다는 의지가 느껴진다. 세상을 조화롭게 이끌어갈 오교는 물샐 틈 없이 치밀하게 해나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듯한 튼튼한 결구의 ‘교(敎)’ 자가 믿음직하다. 당당함이 ‘당(堂)’ 자에 가득하다.(서예가 遯石 양성주)

기천서원箕川書院 소개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은 예천군 서쪽에 위치하고, 북으로 소백산맥의 지류인 왕의산이 둘러싸여 있고, 동쪽과 서쪽으로 내성천과 금천이 흐르고 남쪽으로는 비룡산이 있다. 용궁면은 신라시대에는 축산군으로 불렸으며, 고려시대에는 용주로 고쳐 부르고 자사를 두었다. 조선시대에는 다시 용궁현으로 고쳐 부르며 안동부에 편입시켰다.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 때는 현을 군으로 부르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는 예천군에 병합시켜 용궁면이 되었다.
기천서원이 있는 월오리는 약 500여 년 전 이 마을이 개척된 뒤에 마을의 모양이 반월형이고 마을 주위에 오동나무가 많이 있어 월오(月梧)라고 불렀으며, 또 순흥안씨(順興安氏)가 정착하여 산다고 달안(達安)이라고도 한다. 아랫마을은 순흥안씨(順興安氏)가 윗마을에는 중화양씨(中和楊氏)와 울진임씨(蔚珍林氏)가 살고 있다. 한편 기천서원은 원래 고려조의 인물인 안준을 비롯하여 이문흥, 문근, 문관, 이구 등 다섯 사람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해 기천정사(箕川精舍)로 건립되었다. 이후 1692년(숙종 18)에는 용궁면 월오리로 1차 이건했으며, 1703년(숙종 29)에는 향내 유림의 합의에 의해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1712년(숙종 38)에 다시 현 위치인 용궁면 월오리 오룡곡으로 이거했으나,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인해 훼철되었다. 그러다가 1928년에 재건되었고 여러 번 보수를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서원의 전체적인 배치는 좌측에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팔작기와집인 명교당을 두고, 우측에 서원의 공간인 강당과 사당을 두었다. 서원의 공간은 일각문, 강당, 내삼문, 상절사를 동일축선 위에 두었으며 주위에는 토석담장을 둘렀다. 기천서원의 배향 인물 5명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➀ 안준(安俊, 생몰년 미상): 경상북도 예천군 개포면 경진리 옥동 사람으로, 본관은 순흥(順興), 호는 노포(蘆圃),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중랑장 안손주(安孫柱)의 아들이고,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제자다. 고려 말 문과에 급제하여 우왕 때 남양부사와 판봉상시사를 거쳐 1385년(우왕 11)에 전라·충청·경상 삼도체찰사가 되었다. 1392년(공양왕 4) 정몽주가 살해되자 그 일당으로 몰려 우현보(禹玄寶)·김진양(金震陽) 등과 함께 의령으로 유배되었다. 같은 해 조선이 개국되자 안준의 충절을 가상히 여긴 태조에 의해 유배지를 예천으로 옮기게 되었고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호명면 백송리 행솔이 마을 서쪽 건지산의 동쪽 언덕에 묻혔으며 기천서원에 배향되었다. 후손들은 예천군 용궁면 월오리, 풍양면 우망리 등의 군내에 흩어져 세거하였다.

➁ 이문흥(李文興, 1415~1495): 자는 질보(質甫), 호는 나암(羅菴), 본관은 성주(星州)이며, 이국(李菊)의 아들이다. 1462년(세조 8) 진사에 합격하고, 1469년(예종 1) 교수로서 문과에 급제하였다. 1472년(성종 3)에 『예종실록(睿宗實錄)』을 수찬하는 데 참여했으며, 1482년(성종 13) 사옹원첨정에서 성균관사성으로 전임된 이후 20년간 유생들의 교육에만 몰두하였다. 1493년(성종 24) 성균관 유생 박광영(朴光榮) 등이 그의 인재 육성 공로를 포상하라는 소를 올렸는데, 왕의 특명으로 한 품계 올려 포상을 받았다. 성균관대사성에 이르러 79세에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향년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묘는 예천군 개포면 입암리 장화산에 있으며, 기천서원에 배향되었다.

➂ 문근(文瑾, 1471~?): 자는 사휘(士輝), 호는 쌍괴(雙槐), 본관은 감천(甘泉)이며, 아버지는 문걸(文傑), 어머니는 대사성 이문흥(李文興)의 딸이다. 사헌부 장령 문관의 형이다. 1492년(성종 23) 사마시에 합격하고, 1496년(연산군 2)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수원 부사·도승지·형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1514년(중종 9)부터 사간, 대사간 등을 역임하면서 노산군과 연산군의 입후(立後) 문제, 내수사장리(內需司長利)의 혁파와 같은 개혁을 주청하는 등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등과 함께 훈구파에 맞서 적극적인 언론활동을 전개하였다. 1516년(중종 11) 동부승지를 거쳐 이듬해 도승지가 되었고, 중종의 총애를 받아 형조참판으로 승진하였다. 그러나 남곤(南袞)·심정(沈貞) 등의 무고로 경상도관찰사로 전직되었다.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의 처형을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파직되었다. 1521년(중종 16) 다시 참판으로 기용되었으나, 안처겸(安處謙)의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도의(道義)를 가장하여 이름을 도둑질했다는 죄목으로 관직을 삭탈당하고 용궁에서 살다가 죽었다. 같은 영남 출신인 권벌(權橃) 등과 함께 조광조 등의 기호 사림파와 연결되어 훈구파와 사림파 사이를 조절하는 완충작용을 했던 인물로 평가받는다. 사후에 아우 문관과 함께 기천서원에 배향되었다.

➃ 문관(文瓘, 1475~1519): 자는 백옥(伯玉), 호는 죽계(竹溪)이며, 아버지는 문걸(文傑), 어머니는 대사성 이문흥(李文興)의 딸이다. 사헌부 장령 문근의 아우이다. 1498년(연산군 4)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507년(중종 2) 증광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좌랑·안음현감·사헌부지평·사헌부장령 등을 역임하였다. 검열에 부임했을 때 충재 권벌과 함께 무오사화 때 화를 입은 사림의 원통함을 씻으려 노력하였다. 1515년(중종 10) 지평이 되어서는 박상(朴祥)·김정(金淨)을 탄핵하다가 사림의 미움을 받기도 하였다. 장악원 첨정으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종부시첨정을 거쳐 사헌부장령에 임명되었으나 갑자기 병사하였다. 사후에 형 문근과 함께 기천서원에 배향되었다.

➄ 이구(李構, 1484~1536): 자는 성지(成之), 호는 연경당(燕敬堂), 본관은 성주(星州)이며, 이세준(李世俊)의 아들이다. 1510년(중종 5)에 진사가 되고, 1519년(중종 14)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이 되었으나 기묘사화로 투옥되었다가 하루 만에 석방되었다. 향약(鄕約)을 시행하면 도둑이 없어질 것이라고 건의하여 실시했으나 도둑이 여전히 횡행하고 있다 하여 1521년(중종 16)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사후에 직제학에 추증되었고, 기천서원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 송시열(宋時烈), 「형조참판문공장령문공묘갈명(刑曹參判文公掌令文公墓碣銘)」, 『송자대전(宋子大全)』
  • 유교넷 유교역사관-유적정보, 기천서원
    (http://www.ugyo.net/tu/rin/ruins.jsp?sSiteCode=ycnb018&sMenuType=0#)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1·2』, 한국국학진흥원, 2016
    한국서원연합회, 기천서원 소개
    (http://www.seowonstay.com/bbs/board.php?bo_table=slist&wr_id=1130)
    예천군 용궁면 마을소개
  • (http://www.ycg.kr/open.content/yonggung/tour/pla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