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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대헌(晩對軒)

도계서원道溪書院

80.5×165.0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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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만대헌(晩對軒)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80.5×165.0
  • 건물명 만대헌(晩對軒)
  • 공간명 도계서원道溪書院
  • 서예가
  • 위치정보 경상북도 안동시 북후면 모산미길 1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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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대헌(晩對軒)

만대헌(晩對軒)



만대헌(晩對軒)은 옥봉(玉峯) 권위(權暐, 1552~1630)가 학문에 매진하고 후학을 기르기 위해 1587년(선조 20) 경상북도 안동시 북후면 도촌리에 건립한 건물의 편액이다. ‘만대’는 중국 당나라 때 시인 두보(杜甫)의 「백제성루(白帝城樓)」 시에 “푸른 절벽 저물녘에 마주하기 좋고, 백제성 골짝 오래 노닐기 알맞네[翠屛宜晩對 白谷會深遊]”라고 한 데서 취하였다.

글씨는 굵고 무거운 듯하나 가볍게 처리한 부분도 보이는 묵직한 해서체로 명필인 아우 연어정(鳶魚亭) 권오(權晤)가 썼다고 한다. 강한 기필과 굳센 운필과 전절(轉折)의 눈에 띄는 예리한 각 그리고 묵직하면서도 분명하고 빠른 수필(收筆)에 느긋한 붓질이 만들어낸 안정적인 가로획과 빠른 붓질로 비백(飛白)을 동반한 시원한 세로획이 어울려 큰 글씨로 채운 편액이 보는 이의 시선을 압도한다.(서예가 遯石 양성주)

도계서원道溪書院 소개



경상북도 안동시 북후면은 고려 말과 조선 초에 부북[지금의 와룡면 서부와 북후면 일대]이라 하였고, 숙종 때 북선면에서 분리되면서 나중에 생겼다고 해서 북후면이라 하였다. 도촌리는 학가산과 더불어 안동의 진산(鎭山)인 천등산 동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천등산의 연봉인 대곡산에서 동쪽으로 뻗어 내린 지맥이 나지막이 휘어 두른 구릉에 기대어 섰으며, 마을 앞 반월산을 안산(案山)으로 하고 있다. 마을 뒤로는 수려한 봉우리와 천석이 아름다운 계곡이 있고, 앞으로는 천등산의 여러 골짜기에서 흐르는 실개천이 어울려 마을 앞으로 굽이치는 도계천이 흐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 지형이다. 마을이 남향으로 터를 잡아 전체적으로 밝고 포근하다. 마을을 중심으로 남쪽은 광포천과 광포들이 있고, 서쪽은 천등산과 대곡산·사곡산이 병풍과 같이 둘러 있다. 또 이 산들로부터 동쪽으로 흐르는 옥계천이 어울려 도(道)를 닦을 만한 좋은 곳이라 하여 도계촌이라 하였다고 한다. 도촌리는 1리와 2리로 되어 있는데, 도촌1리는 도계촌·모살미, 도촌2리는 서당골·부루골·옥산골·장골 4개 마을이다.
안동시 북후면 도촌리에 세거하는 안동권씨(安東權氏)는 김선평(金宣平), 장길(張吉)과 함께 고려 태조를 도와 후백제군을 격퇴한 공로로 권씨 성을 하사받고 삼한벽상공신삼중대광태사아보에 봉해졌으며 후삼국 통일 후 태사의 작위를 받은 권행(權幸)의 후손이다. 이후 고려 말에 판서공 권인(權靷)이 고려가 멸망하자 안동 소야촌[지금의 서후면 교리]에 은거하여 청절을 지키며 호를 송파(松坡)라고 했는데, 송파는 송도(松都)를 잊지 못한다는 의미이고, 마을 이름 소야도 송파로 고치게 되었다. 권인의 현손 권사빈(權士彬, 1449~1535)이 외가인 북후면 도촌리로 이거하여 정착하였다. 권사빈은 파평윤씨(坡平尹氏) 윤당(尹塘)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 1녀를 두었다. 네 아들은 모두 출중하여 맏아들 권의(權檥, 1475~1558)는 현감, 둘째 아들 충재(冲齋) 권벌(權橃, 1478~1548)은 우찬성, 셋째 아들 권예(權欚)는 찰방, 넷째 아들 권장(權檣)은 부제학을 지냈다. 이 가운데 둘째 권벌은 봉화로 옮겨 닭실파[酉谷派]를 이루고 넷째 권장은 예천 은풍에 옮겨 살았다. 권의의 맏아들 권심기(權審己)와 여섯째 아들 권심행(權審行)이 도촌을 지켜 지금까지 세거하고 있는데, 권심행이 바로 권위(權暐, 1552~1630)의 아버지이다.
권위의 자는 숙회(叔晦), 호는 옥산야옹(玉山野翁)·옥봉(玉峯),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아버지는 권심행, 어머니는 신천강씨(信川康氏)로 강희철(康希哲)의 딸이다. 권위는 어려서부터 독서와 문사에 힘써, 약관에 동당별시에 나아가 한꺼번에 삼장(三場)에 모두 합격했으나 예시(禮試)에는 합격하지 못하였다. 일찍이 월천(月川) 조목(趙穆),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유일재(惟一齋) 김언기(金彦璣)를 사사하여 군자의 위기지학에 대해 배웠고, 송소(松巢) 권우(權宇)와 낙교(洛郊) 김해(金垓) 등과는 도의지교를 맺어 서로 절차탁마하였다. 그가 사사했거나 교육했던 인사들은 모두 퇴계의 문도들이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진장군(陳將軍)이 안동에 진을 쳤는데, 그 막부에 있던 학림(鶴林) 주원조(朱元兆)가 그를 한 번 보고 마음에 들어 친교를 맺으니 휘하 장수들이 그를 존경하였다. 그러다가 뒤늦게 50세의 나이로 어머님을 위해 과거에 응시하여 1601년(선조 34) 문과에 급제하였다. 곧바로 전적에 임명되었다가 겨울에 공조좌랑에 제수되었다. 이때 중국의 사신 고천준(顧天俊)이 조선에 왔는데, 심희수(沈喜壽)가 공조판서로서 관반(館伴)을 맡게 되어 사신을 맞이하는 예법을 공에게 의지하였다. 심희수는 공의 인품을 높이 평가하고, 매양 “지위가 덕에 못 미친다.”라고 탄식하였다. 이후 해미현감, 형조좌랑, 예조좌랑 등을 역임한 뒤에 1609년(광해군 1) 수성찰방에 임명되었으나 질병으로 사임하였다. 그 뒤 광해군의 혼정이 시작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작은 서재를 짓고 산수를 벗하며 학문에 매진하였다. 그러다가 1616년(광해군 8) 동도(경주) 교수에 임명되자 부임하여 후진을 열심히 양성하였고, 틈틈이 산에 올라 바다를 바라보며 회포를 풀었다. 이때 남긴 것이 곧 「동경일록(東京日錄)」이다. 체직되어 돌아온 뒤 다시 예조좌랑, 형조좌랑에 임명되었지만 나아가지 않았고, 결국 1630년(인조 8)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79세이다. 저서로는 4권 2책의 『옥봉집』이 전한다.
한편 만대헌(晩對軒)은 옥봉 권위가 학문을 익히고 후학을 기르기 위해 36세이던 1587년(선조 20) 안동시 북후면 도촌리에 세운 건물이다. 이 건물은 1992년 7월 18일에 경북유형문화재 제267호로 지정되었다. 집은 ‘ㄱ’ 자형 평면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좌측으로는 방이 있고, 우측은 우물마루를 깔았다. 마루 부분에도 문을 달아 외부로는 매우 폐쇄적인 형식을 취하였다. 지붕의 모양도 전면에서 보면 우측은 팔작지붕, 돌출된 누마루 부분은 맞배지붕으로 만들었다. 집의 기단을 매우 높게 조성했으며, 방의 전면으로는 누마루 형식의 공간을 구성하고 아래에 아궁이를 놓았다. 집의 평면이 ‘ㄱ’ 자 모양으로 된 것이 바로 방 앞으로 돌출된 누마루 때문이다. 구조수법과 가운데 설주 등이 건립 당시의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다.
만대헌 앞에는 도계서원(道溪書院)이 자리하고 있는데, 도계서원은 1687년(숙종 13) 옥봉 권위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지방 유림의 공동 결의에 따라 건립되었다. 처음에는 도촌리에서 서쪽으로 얼마쯤 떨어진 곳에 건립되었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28년 만대헌 옛터인 지금의 장소에 다시 세웠다. 그 후 여러 번 중수를 거쳐 1991년 후손들이 사당인 모현사(慕賢祠)와 강당인 명륜당(明倫堂)을 새로이 수리하고, 동재인 상의재(尙毅齋)와 홍도문(弘道門), 주사 등을 새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참고문헌
  • 이종호, 「옥봉집(玉峯集) 해제」, 『퇴계학자료총서(退溪學資料叢書)』 권15, 안동대 퇴계학연구소, 1998
  • 김충희, 「옥봉집(玉峯集) 해제」, 『문집해제2』, 한국국학진흥원, 2004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1·2』, 한국국학진흥원, 2016
    유교넷 유교역사관-유적정보 도계서원
    (http://www.ugyo.net/tu/rin/ruins.jsp?sSiteCode=ansb010#)
    디지털안동문화대전(http://andong.grandculture.net/)
    대경일보-한국정신문화의 원류, 書院을 찾아서, 도계서원편
  • (http://www.dk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108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