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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화정(訪花亭)

달성서씨 낙동정사達城徐氏 洛東精舍

37.6×81.7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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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방화정(訪花亭)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37.6×81.7
  • 건물명 방화정(訪花亭)
  • 공간명 달성서씨 낙동정사達城徐氏 洛東精舍
  • 서예가
  • 위치정보 대구 달성군 화원읍 사문진로1길 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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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화정(訪花亭)

방화정(訪花亭)



방화정(訪花亭)은 지역 사림이 임재(臨齋) 서찬규(徐贊奎, 1825~1905)의 강학 장소를 마련하기 위해 1901년(고종 38) 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화원동산에 건립한 낙동정사(洛東精舍)의 동쪽 방 편액이다. ‘방화’는 ‘북쪽으로 상화대(賞花臺)를 바라볼 수 있다’라는 데서 취하였고, 상화대라는 이름은 신라 35대 경덕왕이 이곳에 와서 꽃을 감상했다는 데서 취하였다.

글씨는 박훈지(朴壎之)가 쓴 해서체이다. 점에서 점으로 경쾌하게 옮겨가고 또다시 잰걸음으로 짧은 횡획을 이어가다가 강한 힘으로 붓을 눕혀서 좌하로 두껍게 내리긋고 다시 붓끝을 모아 짧은 세로획에 이어 긴 호흡으로 기세 좋은 붓질에 이어 삐침으로 마무리한 ‘화(花)’ 자가 중심에 서 있다. 정자의 지붕에 걸린 구름인 듯 후덕한 점이 속도를 더하더니 힘을 모아 삼절을 구사하며 튼실한 획으로 ‘정(亭)’ 자를 써 내렸다.(서예가 遯石 양성주)

달성서씨 낙동정사達城徐氏 洛東精舍 소개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은 신라 때 화원현으로 불렸으며, 대구현 등과 함께 수창군[지금의 수성구]의 속현이었고, 고려 때는 경산부[지금의 성주군]에 편입되었다. 그러다가 조선 때인 1685년(숙종 11년) 대구부의 속현이 되었고, 1895년(고종 32) 지방 관제개정에 의하여 화원내면이 되어 신기, 성산, 명곡, 설화, 부신, 부진, 현내의 7개 동을 관할하였다. 이후 1914년 부군면 폐합에 따라 화원면이 되어 달성군에 편입되었고, 1992년 3월 화원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95년 3월 달성군 전역이 대구광역시에 편입됨에 따라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이 되었다. 낙동정사(洛東精舍)가 있는 화원동산은 금호강이 낙동강과 합류하는 지점에 자리하고 있다. 화원동산은 신라시대부터 아름다운 동산으로 손꼽혔으며, 산 정상부는 신라 35대 경덕왕이 이곳에 와서 꽃을 감상했다 해서 상화대(賞花臺)라 불렀다. 조선시대에는 봉수대를 두어 성주 덕산의 봉수를 받아 마천산 봉수에 응하게 하였다. 일제강점기 때 대구시립공원이었던 유원지를 1978년 10월에 화원동산으로 개칭하였다. 시에서 2013년 이곳에 사문진역사공원을 조성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달성서씨(達城徐氏)는 고려 때 봉익대부, 판도판서 등을 역임하고 공을 세워 달성군에 봉해진 서진(徐晉)의 후손이다. 서진의 아들 서기준(徐奇俊)이 달천군에, 손자 서영(徐穎)이 중대광 달성군에 봉해지면서 달성에 세거하게 되었다. 달성서씨는 9개 분파로 나뉘는데, 임재(臨齋) 서찬규(徐贊奎, 1825~1905)는 현감공파 서제(徐濟)의 후손이다. 서찬규의 9대조인 이재(怡齋) 서사진(徐思進, 1568~1645)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지역의 선비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당시 대구에는 읍내와 4개 속현에서 의병이 조직되었는데, 서사진은 읍내 6개 리 중 북산리 유사를 맡았다. 서사진의 아들 남계(南溪) 서율(徐慄)은 모당(慕堂) 손처눌(孫處訥, 1606~1687)의 문인이었고, 학문과 덕행이 뛰어나 지역에서 추앙받았다. 이후 서찬규의 가계는 서후태(徐後泰)→서운(徐澐)→서도관(徐道觀)→서창진(徐昌震)→서길복(徐吉復)으로 이어지며, 서정(徐柾, 1769~1822)이 서찬규의 조부이다. 서정은 평산신씨(平山申氏) 신두성(申斗星)의 딸에게 장가들어 서홍열(徐洪烈)을 낳았는데, 바로 서찬규의 아버지이다. 서홍열은 자는 내헌(乃憲), 호는 가포(稼圃)로, 산림에 은거하여 아름다운 행의가 있었다.
서찬규의 자는 경양(景襄), 호는 임재(臨齋), 본관은 달성(達城)이다. 10세 때 이미 학문에 뜻을 두었으며 일찍부터 과거를 준비하여 22세인 1846년(헌종 12) 2월에 진사에 올랐다. 그 후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도를 탐구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1850년(철종 1) 노량진에 있던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을 찾아가 배움을 청했는데, 매산과의 인연은 그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다. 그는 이때부터 여러 번 왕래하면서 출처의 의리와 천인의 운명과 본성에 대한 성현의 가르침을 탐구하였다. 이때의 강학과 토론을 바탕으로 「취정일록(就正日錄)」 한 편을 저술하고 스승의 가르침을 「어록(語錄)」으로 기록하였다. 이후 1851년(철종 2) 숙재(肅齋) 조병덕(趙秉悳), 전재(全齋) 임헌회(任憲晦), 오곡(鰲谷) 홍일순(洪一純) 등과 학문과 예설에 대해 묻고 답하였다. 1년 뒤인 1852년(철종 3) 7월 17일 스승 매산 홍직필이 세상을 떠났다. 비록 스승과의 인연은 길지 않았지만, 스승의 사후에도 스승의 문집과 저술을 수집해서 교정하고 간행하는 일을 주도하였다. 38세가 되던 1862년(철종 13) 남산에 수동재(守動齋)라는 서실을 지어 수양과 강학의 자리로 삼았으며, 조병덕(趙秉悳), 최익현(崔益鉉) 등과 어울리면서 경전에 대한 질의와 당시 혼란했던 사회·정치적 사변으로 인한 문제를 토론하기도 하였다. 또 일본의 잦은 침략에 대비해 경상도의 요새지에 성을 수축할 것을 제의하였다. 1864년(철종 14)부터 1883년(고종 20)까지 서헌순(徐憲淳), 이근필(李根弼), 윤자승(尹滋承), 경상좌도 암행어사 이도재(李道宰) 등의 4차례 천거가 있었으며, 1883년(고종 20) 4월에는 고종이 의금부도사의 벼슬을 내렸으나 끝내 사양하고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이로써 높은 학행과 더불어 청렴하고 명예를 좋아하지 않는 성품이 세상에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그는 오직 학문의 궁리와 후학 양성에만 전념하여 훗날 그의 문하에서 많은 학자와 독립운동가가 배출되었다. 67세인 1891년(고종 28) 5월에는 관찰사 이헌영(李攇永)이 관덕당에서 향음주례를 실시하자 참여했으며, 1892년(고종 29) 2월에도 이헌영의 초대를 받아 향음주례를 행하고 강회를 열었다. 1901년(고종 38)에는 상화대 아래에 낙동정사를 지어 후손과 문인들의 강학소로 삼아 만년까지 강회를 열었다. 평생 학문에 매진하고 덕행을 쌓다가 1905년(고종 42) 정월 22일 남산리 수동재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81세이다. 임종에도 정신이 맑아 자손과 문인들에게 “선비는 가난을 근심하지 말고 수신과 행실을 돈독히 해서 바른길을 잃지 말라.”라고 당부하였다. 저서로는 『임재문집(臨齋文集)』과 『임재일기(臨齋日記)』 등이 있다.
낙동정사는 지역 사림들이 임재 서찬규의 강학 장소를 마련하기 위해 1901년 화원동산 상화대 아래에 건립했는데, 서쪽 방을 임연당(臨淵堂), 동쪽 방을 방화정(訪花亭)이라 하였다. 서찬규는 말년까지 이곳에서 많은 학자와 학문을 토론하고 제자를 양성하였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후손과 제자들을 중심으로 학계를 형성하여 학문과 교류의 장소로 활용되었다.

참고문헌
  • 오현진, 『(국역)임재일기(臨齋日記)』, 한국국학진흥원, 2011
  • 한국국학진흥원, 『달성서씨 낙동정사(洛東精舍)』, 한국국학진흥원, 2019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1·2』, 한국국학진흥원, 2016
  • 디지털달성문화대전(dalseong.grandculture.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