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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정사(洛東精舍)

달성서씨 낙동정사達城徐氏 洛東精舍

50.8×156.2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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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낙동정사(洛東精舍)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50.8×156.2
  • 건물명 낙동정사(洛東精舍)
  • 공간명 달성서씨 낙동정사達城徐氏 洛東精舍
  • 서예가
  • 위치정보 대구 달성군 화원읍 사문진로1길 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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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정사(洛東精舍)

낙동정사(洛東精舍)



낙동정사(洛東精舍)는 달성서씨(達城徐氏) 낙동정사에서 소장하던 것으로 임재(臨齋) 서찬규(徐贊奎, 1825~1905)가 1902년(고종 39)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에 건립한 정사의 편액이다. ‘낙동’은 정사가 낙동강 동쪽에 있어서 붙여진 이름인 듯하다. 서찬규는 조선 후기 학자로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 1776~1852)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그의 학문은 율곡(栗谷)-사계(沙溪)-우암(尤庵)-매산(梅山)으로 이어지는 기호학통을 계승하였다. 1862년(철종 13) 수동재(修洞齋)를 짓고 성리학을 연구하며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숙재(肅齋) 조병덕(趙秉悳),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을 쫓아 배우면서 경전에 대한 질의와 당시 사회·정치적 사변으로 인한 문제를 토론하기도 하였다. 1888년(고종 25) 의금부도사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저서로 『임재문집(臨齋文集)』과 『임재일기(臨齋日記)』 등이 있다.

글씨는 서찬규의 친필로 둥글둥글하고 편안한 것이 특징이며, 안진경(顏眞卿)의 글씨를 연상케 하는 해서체이다. ‘낙(洛)’ 자에서의 후덕한 점 셋이 이어져 내리는 모습이 굽이굽이 흐르고 맺힘을 반복하여 너른 대지를 적시는 낙동강을 보는 것 같다. 동녘에 솟아오르는 해처럼 환한 분위기의 ‘동(東)’ 자가 밝은 느낌이다. ‘정(精)’ 자는 정성을 들여서 거칠지 않고 매우 곱다는 뜻인데 좌측의 ‘미(米)’가 불균형적인 조형으로 다가와 당혹스럽지만 우측의 ‘청(靑)’이 넉넉히 받아주면서 균형을 이루어냄이 놀랍다. ‘사(舍)’ 자는 아담한 집에 포근하게 초가를 얹은 듯 정겹다. 좌측 하단에 임재(臨齋)라 쓰여 있어 서찬규가 정사를 짓고 편액까지 썼음을 알 수 있다.(서예가 遯石 양성주)

달성서씨 낙동정사達城徐氏 洛東精舍 소개



낙동정사(洛東精舍)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사문진로[성산리] 낙동강 변에 위치한 화원동산 사문진 나루 입구 오른쪽 언덕 비탈에 위치해 있다. 낙동정사가 있는 화원동산은 대구 3대 유원지[동촌유원지, 수성유원지, 화원유원지] 중 하나이다. 낙동정사는 조선 말 대구 지역의 큰선비 임재 서찬규(徐贊奎, 1825~1905)가 화원동산 입구에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조선이 막을 내린 19세기 말, 대구 유학자 중에 ‘임재 선생’이라 불리던 큰선비가 있었다. 선생의 이름은 서찬규, 자는 경양(景襄), 호는 임재, 본관은 달성(達城)이다. 아버지는 홍렬(洪烈)이며, 어머니는 흥해배씨(興海裵氏)이다. 달성서씨(達城徐氏) 21세인 임재 선생은 고려, 조선을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대구 역사의 주류에서 단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는 대구 최대 명문가의 후손이었다. 직계로만 따져봐도 1세 서진, 2세 서기준, 3세 서영, 3대가 달성군에 봉해졌고, 4세 서균형은 문과에 급제해 대제학을 지냈으며, 5세 서침은 조선 세종 때 세거지 달성을 국가에 양보하는 대신 대구 부민의 모곡(耗穀) 이자를 탕감받았으며, 12세 서사진은 임란의 병장으로 이름이 났다. 임재 선생은 지금의 대구 계산동에서 태어났으며, 22세(1846, 헌종 12)의 나이로 생원시에 급제해 성균관에서 수학했으며, 도천에 다섯 번 오르고 암행어사 추천도 받았으며, 26세(1850, 철종 1) 때 당시 기호학파의 거두였던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의 문하에 들어가 수제자로 인정받고, 스승의 문집 간행에 주도적으로 관여했다. 38세(1862, 철종 13) 때 고향인 계산동에 서실인 수동재(守東齋)를 지었다. 관찰사 서헌순(徐憲淳), 이근필(李根弼), 윤자승(尹滋承), 암행어사 이도재(李道宰) 등으로부터 인재로 천거를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의금부도사(64세)에 제수되었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았다. 67, 68세 때는 관찰사 이헌영(李攇永)이 마련한 향음주례에 주빈을 참여했다. 임재 선생이 조선 말 대구의 큰선비였음은 이 두 번의 향음주례에 주빈으로 초청된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향음주례는 고을 수령이 주관하여 고을 내 귀인과 선비들을 모시고 정해진 엄격한 예법에 따라 실시하는 주례이다. 향음주례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고을 수령이 아닌 ‘빈[손님]’으로 초대된 인물이다. 빈은 삼달존이라 하여 ‘벼슬, 나이, 덕’이 지역사회 최고라는 인정을 받는 자만이 선정될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이런 자리에 그것도 경상도관찰사가 주관하는 향음주례에 연거푸 두 번이나 주빈으로 초청되었다는 사실만 봐도 임재 선생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가늠해볼 수 있다.
1883년(고종 20) 의금부도사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고, 1900년(고종 37) 76세 때 후진 양성에 힘써 조정으로부터 강학공간으로 지금의 화원동산 상화대(賞花臺)의 한 구역을 하사받아 이듬해 1901년(고종 38) 77세 때 낙동정사를 지어 만년 강학소로 삼았다. 1901년 화원동산 상화대 아래에 건립된 낙동정사는 임재 선생 강학소이다. 이 터는 본래 국가 땅이었는데 낙동정사를 건립코자하는 대구 유림의 청원이 받아들여져 조정에서 상화대 한 구역을 허락함으로써 성사된 것이다. 정사를 짓는 데 들어간 돈은 달성서씨 문중을 비롯한 지역 문중, 사림 등에서 부조를 했다. 경재(景齋) 우성규(禹成圭)가 지은 「낙동정사기(洛東精舍記)」를 보면 낙동이란 이름은 낙(동)강에서 나온 것이며, 낙동정사가 도산서원을 비롯한 역동서원, 도동서원, 사양정사, 동락서원에까지 그 연원이 이어져 있음을 밝히고 있다. 또한 서쪽 방을 임연당(臨淵堂)으로 한 것은 정사 남쪽에 연암이 있기 때문이요, 동쪽 방을 방화정(訪花亭)이라 한 것은 북쪽에 상화대가 있기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 선생의 제자인 미강(渼江) 박승동(朴昇東)의 작품으로 알려진 2점의 상화대(1899, 한국국학진흥원 소장) 그림을 보면 당시의 상화대와 낙강, 연암 그리고 상화대 아래 지금의 낙동정사 자리에 2채의 초가가 있는 모습 등이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경재 우성규는 낙동정사의 기문에서 퇴계(退溪)와 서애(西厓), 한강(寒岡), 여헌(旅軒), 낙재(樂齋)의 학문이 낙동강에 흘러와 상화대에 부딪쳐 대구에 유입되는 과정을 서술하고, 임재의 강학활동을 찬미하였다. 우성규는 서찬규와 함께 ‘낙동선유’의 모임을 가졌는데, 그는 당시 사문진 나루에서 배를 띄우는 소감을 아래와 같이 읊었다.

꽃다운 물가 노닐자는 약속 3년이나 지나서 芳洲有約歲經三
오늘에야 배 오르니 흥이 더욱 솟아나네 是日登舟興轉酣
밝은 달은 천천히 뱃머리에 오르고 明月遲遲舷上待
맑은 물결 아득히 거울 속에 잠겼어라 澄波渺渺鏡中涵
비파가 증점을 바라니 누가 함께 목욕하랴 瑟希曾點誰同浴
거문고 종자기 만났으니 나는 부끄럽지 않네 琴遇種期我不慚
학문의 바다 진원을 이제부터 찾으려고 學海眞源從此覓
외로운 돛배 저어 큰 강 남쪽에 띄우네 孤棹泛彼大江南

대구의 선비들이 낙동강에 배를 띄우고 노닐자는 약속을 한 지 3년 만에 겨우 일이 성사되어 사문진 나루에서 배를 띄웠다. 밝은 달빛이 뱃전에 도도하고 맑은 강물이 거울처럼 맑을 때 임재 선생은 그처럼 맑고 도도한 도를 생각하였다. ‘비파가 증점을 바라니 누가 함께 목욕하랴’고 물은 것은 공자가 제자들에게 포부를 말해보라고 했을 때, 증점이 했던 대답과 관련이 있다. 다른 제자들이 세상에 나아가 공명 세우는 것을 목표로 삼을 때 증점은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봄바람을 쐬며 시를 읊으며 돌아오는 것이 자신의 소망이라고 하였다. 공자도 증점의 대답을 듣고 증점과 함께 하겠다고 하였으니, 증점의 경지가 바로 도의 경지인 것이다. 누가 이런 증점처럼 낙동강에서 목욕하고 시를 읊조릴 수 있는가? 도의 경지에 이른 사람만이 증점과 함께 무우에서 봄바람을 맞으며 시를 읊조릴 수 있을 것이다. 우성규는 임재 선생이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였다. 임재 선생은 자신의 거문고 소리가 종자기를 만나더라도 부끄럽지 않으리라는 선언 속에 노성한 유학자의 당당함을 느꼈으며, 이것은 저절로 만들어졌거나 완성된 것이 아니라 선현의 가르침과 위대한 훈육으로 말미암았음을 우성규는 말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학문이란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닦아가는 것이다. 임재 선생은 이렇듯 낙동강의 선유를 단순한 놀이나 유흥으로 여기지 않고, 학문의 근원을 찾아 학문적 자세를 가다듬고 선현을 만나 도를 항상 지켜가는 방편으로 여겼다. 임재 선생은 1901년(고종 38)부터 1905년(고종 42)까지 5년간 이곳 낙동정사에서 강학을 했다. 당시 낙동정사의 위상을 엿볼 수 있는 자료가 있는데, 낙동정사를 중심으로 하는 제자들의 계모임인 ‘임연당유계안’과 ‘임연당학계안’이다. 이 둘은 모두 임재 선생 생전에 작성된 것으로 ‘유계안’에는 661명, ‘학계안’에는 400여 명의 명단이 등재되어 있다. 이외에서도 선생 사후 후손들과 제자들이 낙동정사에 강학한 내용을 기록한 강록 등이 많이 남아 있다. 또한 임재 선생은 우국충정의 마음으로 일본의 잦은 침략에 대한 대비책으로 경상도 일원의 요새지에 성을 수축할 것을 제의하기도 하였으며, 조병덕(趙秉德), 최익현(崔益鉉) 등과 종유하면서 경전에 대한 질의와 구한말의 사회·정치적 문제를 토론하기도 하였다. 81세를 일기로 수동재에서 졸했다. 평생을 유자로 살았던 그는 『임재문집(臨齋文集)』, 『임재일기(臨齋日記)』, 『취정일록(就正日錄)』, 『반계수록정요(磻溪隨錄政要)』 등 많은 저술과 글을 남겼다. 임재 선생의 관련 자료들은 달성서씨 낙동정사에서 소장해오다가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하였으며, 임재 선생 관련 목판, 고서, 고문서, 현판 등은 모두 4,774점에 이른다.

참고문헌
  • 한국고전종합DB
  • 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
  •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1』, 한국국학진흥원, 2016
    유교넷(http://www.ugyo.net/)
    마의태자의 풍경산방
    (http://cafe.daum.net/3169179/Dbvq/181?q=%E6%B4%9B%E6%9D%B1%E7%B2%BE%E8%88%8D)
    대구문인협회
  • (http://cafe.daum.net/dgmunin/4cx9/10123?q=%E6%B4%9B%E6%9D%B1%E7%B2%BE%E8%88%8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