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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운사(錦雲祠)

경주최씨 영덕군종친회慶州崔氏 盈德郡宗親會

32.2×91.3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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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금운사(錦雲祠)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32.2×91.3
  • 건물명 금운사(錦雲祠)
  • 공간명 경주최씨 영덕군종친회慶州崔氏 盈德郡宗親會
  • 서예가
  • 위치정보 경상북도 영덕군 강구면 금호3길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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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운사(錦雲祠)

금운사(錦雲祠)



금운사(錦雲祠)는 경주최씨(慶州崔氏) 영덕군종친회에서 소장하던 것으로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경상북도 영덕군 강구면 금호리 금호산 기슭에 건립한 사당의 편액이다. ‘금운’은 금호라는 지명에서 ‘금(錦)’ 자와 고운이라는 최치원의 호에서 ‘운(雲)’ 자를 각각 따온 것이다. 최치원은 6두품 출신으로 12세의 나이로 당에 유학하여 6년 만에 당의 빈공과에 장원으로 급제했으며, 황소(黃巢)의 난(875~884)이 일어나자 절도사 고병(高騈)의 막하에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어 당 전역에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글씨는 작자 미상의 해서체이다. 최치원은 당나라 사람들보다 당해(唐楷)를 더 잘 썼다는 평이 있을 정도이다. 그러한 고운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하는 ‘금운사’ 편액을 쓴다는 것은 어느 서가라도 부담이 컸을 것이다.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기보다는 고운의 필적을 참조하여 닮게 쓰고자 한 조심스러움이 느껴진다.(서예가 遯石 양성주)

경주최씨 영덕군종친회慶州崔氏 盈德郡宗親會 소개



경상북도 영덕군 강구면 금호3동에 위치한 금운사(錦雲祠)는 금호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사당 내에는 영정각(影幀閣)이 있고, 지난 1970년에 창건되어 문창사(文昌祠)라는 편액이 있으며, 매년 음력 3월 10일 유림 향사를 지낸다. 경주최씨(慶州崔氏)는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 857~?)의 후대에서 관가정공파와 판서공파를 비롯하여 광정공파와 계림군파·충렬공파·정랑공파·사성공파·문밀공파·문정공파·화숙공파 등 크게 26파로 분파되어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그중 관가정공파·광정공파·정랑공파·사성공파·화숙공파·충렬공파 등 6파가 주축을 이룬다.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따르면, 최씨의 원조인 소벌도리(蘇伐都利)는 사로 6촌의 하나인 돌산고허촌의 촌장이다. 그는 우물가[나정(蘿井)]에서 박혁거세를 발견하여 거두어 기른 후 알천양산촌의 촌장 알평 등과 협의하여 왕으로 추대하였다. 그 공으로 신라 유리왕에게서 32년(유리왕 9) 최씨 성을 하사받았다고 한다. 이때 돌산고허촌이 사량부로 개칭되었다. 또 516년(법흥왕 3) 대인(大人)에서 충선공(忠宣公)으로 시호되었으며, 658년(무열왕 5)에는 문열왕으로 추봉되었다. 지금도 경주 양산재(楊山齋)에서는 매년 가을 6부 대부족장들의 개국원훈에 감은하는 향사인 신라대제가 국가 문화제 행사로 봉행된다.
최씨의 대종가를 이루는 경주최씨는 소벌도리의 24대손인 최치원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한문학의 대가로 이름을 떨쳤으며, 함께 유학한 최승우(崔承祐) 등과 함께 신라 하대를 빛낸 인물이다. 857년(헌안왕 1) 사량부에서 출생했으며, 호는 고운(孤雲)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민첩하며 학문을 좋아했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13세 때 혼자 당나라에 유학하여 18세가 되는 해에 빈공과에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그 후 당나라에서 선주율수현위를 시작으로 승무랑시어사내공봉에 오르고,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879년(헌강왕 5)에는 황소(黃巢)가 반란을 일으키자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어 이름을 떨쳤다. 황소가 이 격문을 읽다가 혼비백산하여 자기도 모르게 의자에서 굴러떨어졌다는 일화가 전해지기도 한다. 그는 28세가 되던 해 당나라 희종의 조서를 들고 귀국하여 시독 겸 한림학사가 되었다. 그러나 국정이 문란하고 기강이 어지러움을 개탄하여 외직을 자청하여 태산[지금의 태인]·함양·부성[지금의 서산] 등지의 태수로 나갔다. 894년(진성여왕 8) 진성여왕에게 「시무10여조」를 상소하여 도탄에 빠진 민생을 구하려 했으나 6두품이라는 골품제도에 막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산천을 떠돌았다. 그 후 가족을 데리고 가야산에 은거하다가 죽었다고 알려졌으며, 구체적인 생몰연대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는 신라의 천재였으나, 6두품 출신으로 아찬 이상의 벼슬을 할 수 없었다. 시문학에 뛰어나 「토황소격문」뿐 아니라 『계원필경(桂苑筆耕)』 등 수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산천을 떠돌면서 쌍계사 ‘진감선사비문’ 등 국보급의 금석문을 남겼다. 사상적으로는 유교·불교·선교 통합을 시도했고, 그의 사상은 증손인 최승로(崔承老, 927~989)를 통해 고려 건국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와 종형제간인 최승우도 최치원과 함께 유학한 뒤 890년(진성여왕 4)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최언위(崔彦撝, 868~944) 역시 885년(헌강왕 11) 급제한 뒤 집사성시랑을 지냈다. 고려 개국에 공을 세워 태자사부·문한·평장사를 역임했으며, 삼한벽상공신에 올랐다. 이들 3명을 가리켜 ‘신라 3최’라고 일컫는다. 이들 외에도 최씨는 신라인으로는 당나라의 과거에 가장 많은 급제자를 낸 가문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신라 하대에 많은 인재를 배출한 최씨 가문은 고려에 들어와서 맹위를 떨쳤다. 선·후 안동김씨가 맹위를 떨친 조선을 ‘안동김씨의 나라’라고 별칭하는 것처럼 고려시대를 ‘최씨의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경주최씨나 경주최씨로부터 분적한 최씨 가문에서 수많은 인물이 나왔다. 고운 최치원의 증손인 최승로는 재능이 특출하여 왕건으로부터 지극한 총애를 받았다. 그는 12세에 태조 앞에서 논어를 암송하였으며, 태조는 그를 원봉성의 학사로 보냈다. 그 후 최승로는 태조의 뒤를 이은 혜종을 비롯하여 정종·광종·경종을 거쳐 6대 성종에 이르기까지 다섯 임금을 모셨다. 그 과정에서 새로 창업한 고려의 각종 문물제도를 마련하고 군제를 개편하는 내용의 「시무28조」를 상소하여 시행케 했다. 이를 통해 고려의 국가 기틀을 정비하였다. 이는 조선의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하고 국가의 기틀을 정비한 정도전의 역할에 비견될 만한 일이다. 이렇듯 경주최씨는 고려시대 들어와서 가문이 크게 흥하면서 각 파가 형성되었는데, 각 분파별로 가문을 빛낸 인물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화숙공파에서는 최치원의 9세손으로 충숙왕 때 서해도 안렴사를 지냈던 화숙공 최현우(崔玄祐)는 명망이 두터웠고 벼슬이 문하시중에 이르러 가문을 더욱 빛냈다. 그의 자손으로 6세손인 최형손(崔亨孫)은 장흥부사를 지내고 적개공신에 올라 병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그의 아들 최한홍(崔漢洪)은 병마절도사를 지낸 후 정국공신에 올랐다. 그의 종질인 최호(崔湖)는 무과에 장원하고 충청도수군절도사에 올라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평정했고, 정유재란 때 칠천량해전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여 청난2등공신으로 계성군에 추봉되었다. 최현우의 8세손인 최숙생(崔淑生)은 성종 때 장원급제를 하고, 벼슬이 대사간과 대사헌을 거쳐 우찬성에 이르렀으며, 1594년(선조 27) 무과에 급제했던 최진립(崔震立)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우 최계종(崔繼宗)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켰고 정유재란 때는 결사대를 인솔하여 서생포에서 적을 대파했으나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순절하였다. 관가정파의 파조는 최청(崔淸)이다. 그는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제자로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했다. 그는 권신 신돈의 전횡을 탄핵하기 위하여 상소를 올린 것이 화근이 되어 신주감무관으로 좌천되었다. 1374년(공민왕 23) 첨의중찬을 제수받았으며, 우왕 때 사복시정이 되어 명나라 황제로부터 자금어대를 하사받았다. 조선 개국 이후 은거하자 태조 이성계가 좌찬성을 제수하였으나 끝내 거절하였다. 이에 태조는 그의 절의를 높이 기려 송산을 어래산으로 봉하고 그가 살던 가옥에 관가정(觀稼亭)이란 제호를 내렸기 때문에 관가정파가 생겨났다. 계림군파의 파조 최탁(崔倬)은 문하시중이었던 최제안(崔齊顔)의 증손이다. 그는 고려 말에 벼슬이 문하시중평장사에 이르렀으며, 충열공파조 최광위(崔光位)는 최제안의 손자로 고려 명종 때 왜적을 토평하는 데 공을 세웠다. 그의 원래 이름[초명(初名)]은 최광훈(崔光勳)이었으나, 왕이 그의 공을 높이 사 광위로 지어줬고, 벽상삼한삼중대광으로 내사령에 이르러 계림부원군에 봉해졌다. 정랑공파조 최호(崔灝)는 고려 정종 때 왕명을 받아 『전후한서(前後漢書)』와 『예기정의(禮記正義)』, 『모시정의(毛詩正義)』 등을 저술하였다. 사성공파 최예(崔汭)는 이조정랑과 성균관사성을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문밀공 최제(崔堤)는 충선왕 때 합문지후를 지내고 밀성군에 봉해졌다. 문정공 최해(崔瀣)는 원나라에서 제과에 급제한 후 요양로개주판관을 지냈다. 그 후 귀국하여 성균관대사성에 이르렀으며, 『동인명현문(東人名賢文)』과 『졸고천백(拙藁千百)』을 저술하여 문호로 이름을 떨쳤다. 그 외 경주최씨에서 분적한 것으로 알려지는 우봉최씨의 최충헌과 최우 등은 4대에 걸쳐 무인정권을 장악함으로써 60여 년간 고려를 통치하며 30년에 걸쳐 대몽항쟁을 이끌기도 했다.
이렇게 고려시대에 명성을 떨치던 경주최씨는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급격하게 쇠락했다. 경주최씨 가문에서 조선시대 전체 과거 급제자는 모두 669명이지만, 문과 급제자는 42명밖에 되지 않는다. 심지어 명문가의 기준으로 제시되는 상신과 대제학 등의 벼슬에는 1명도 배출하지 못했다. 이는 고려시대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던 거대 명문 집안의 위상에 비해 많이 쇠락한 것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와 현대에 들어와 경주최씨 가문은 새롭게 등장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천도교인 동학을 일으켰던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1824∼1864)가 있다. 그는 경주 귀미산 용담에서 득도하여 동학을 창설했고,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기반으로 인본주의를 실천하였다. 그의 제자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 1827~1898)은 동학의 2대 교주가 되었다. 구한말에는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의 제자로 위정척사를 주장한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이 유명하다. 최익현은 흥선대원군의 정책을 탄핵하였으며, 항일구국 항쟁의 선봉에 나섰던 유학자였다. 그는 1855년(철종 6) 문과에 급제하고, 고종 때 호조 및 공조판서와 궁내부특진관을 지내고,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팔도사민(八道士民)에게 포고문을 보내어 왜적으로부터 조국을 지키기 위하여 궐기와 투쟁을 촉구했다. 일제가 그를 대마도에 귀양 보내고 단발을 강요하자 단식으로 순절하였다. 그 외 한글 발전에 큰 공헌을 한 외솔 최현배(崔鉉培, 1894~1970)가 있으며, 경주 최부잣집도 유명하다. 경주 최부잣집은 12대 만석꾼, 10대 진사의 벼슬을 했다고 한다.

참고문헌
  • 세계일보-[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 한국의 성씨 이야기 <33> 경주최씨
  • (http://m.segye.com/view/20120703022683)
    한국고전종합DB(http://db.itkc.or.kr/)
    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1』, 한국국학진흥원, 2016
  • 유교넷(http://www.ugy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