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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계서원(東溪書院)

봉화금씨 관찰공파奉化琴氏 觀察公派

55.5×151.0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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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동계서원(東溪書院)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55.5×151.0
  • 건물명 동계서원(東溪書院)
  • 공간명 봉화금씨 관찰공파奉化琴氏 觀察公派
  • 서예가
  • 위치정보 경북 안동시 도산면 가송길 177-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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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계서원(東溪書院)

동계서원(東溪書院)



동계서원(東溪書院)은 성재(惺齋) 금난수(琴蘭秀, 1530~1604)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부포리에 건립한 서원의 편액이다. 동계서원은 1709년(숙종 35) 부포리 마을 남쪽에 세운 동계사(東溪祠)를 모태로 하고, 1785년(정조 9)에 성성재(惺惺齋) 서재 뒤쪽으로 이건하면서 몽재(蒙齋) 이안도(李安道, 1541~1584)를 함께 배향하였다. ‘동계’는 금난수의 정자인 성성재 앞을 흐르는 하천을 가리킨다.

글씨는 작자 미상의 해서체이다. 전체적으로 육중한 필획을 구사하면서도 적적하게 다소 가벼운 획을 섞어 쓰고 자간을 넉넉하게 띄워 여유 있게 여백을 주어 맑은 분위기를 연출해내었다. (서예가 遯石 양성주)

봉화금씨 관찰공파奉化琴氏 觀察公派 소개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부포리는 원래 예안현에 속했던 역원 부라원(浮羅院)이 있어서 부라원 또는 부라리로 불렸다. 구한말에는 예안군 동하동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청천동과 의동면의 분천동 일부를 병합하여 부포동·부포리로 예안면에 편입되었으며, 1995년 안동시와 안동군이 통합됨에 따라 안동시 예안면에 속하였다. 부포리는 예안면 북서쪽에 자리를 잡았는데, 동쪽으로 태곡리, 서쪽으로 안동호 건너 도산면 동부리, 남쪽으로 안동호 건너 귀단리, 북쪽으로 도산면 의촌리·원천리와 이웃하였다. 부포리에는 중마을·가름·월촌·원거리·역동·호소골·횃골·다래 등의 작은 마을이 있었다. 중마을·월촌·원거리 등이 들판에 붙어 있었고, 가름골과 호소골 사이에 부라원루가 있었으며, 마을에서 북동쪽으로 강가에 역동이 있었다. 낙동강 바로 건너편에 월천(月川) 조목(趙穆, 1524~1606)이 살던 다래[月川]마을이 있었다. 이렇게 동계수와 낙동강이 만나 들판을 이루는 부포에는 1935년에 99가구 583명이 살았고, 1970년대에 221가구가 살았던 매우 번성하고 넉넉한 마을이었다. 그러나 1974년 안동댐이 건설되어 이 지역이 수몰되면서 현재는 부포리의 옛 모습을 찾을 길이 없다.
부포에는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았다. 처음 확인되는 성씨는 안동권씨(安東權氏)이다. 당시 거주자인 경력(經歷) 권간(權簡)의 조상 때부터 살았다고 하며, 이어서 같은 안동권씨 권겸(權謙)이 이주해왔다. 15세기에 봉화금씨(奉化琴氏) 금숙(琴淑)이 권간의 사위가 되면서 처향으로 입향하여 부포에 세거하게 되었고, 이어서 횡성조씨(橫城趙氏) 조대춘(趙大春)이 권겸의 아들 권수익(權受益)의 사위가 되어 다래에 살고, 진성이씨(眞城李氏) 이준(李寯)이 금재(琴梓)의 사위가 되면서 부포마을을 형성하는 큰 성씨들의 입향이 완료되었다.
예안면 부포리의 봉화금씨는 고려 명종 때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고종까지 5명의 임금을 섬겼으며, 영렬공(英烈公)이라는 시호를 받은 금의(琴儀)의 후손이다. 봉화금씨는 조선 초까지 주로 개성 인근에 세거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조선 초기 금인배(琴仁排)가 태조 이성계의 4남 이방간(李芳幹)을 사위로 맞았는데, 이방간이 2차 왕자의 난에 태종 이방원에게 패퇴함으로써 봉화금씨는 정치적 위기를 맞이하여 그들 중 일부가 경상도 북부에 자리를 잡았다. 이후 금우공(琴遇工)이 봉화군 상운면에 자리를 잡고, 그 후손들이 이 일대에 세거하면서 뛰어난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금우공의 2남 금이화(琴以和)는 장남 금척(琴滌)을 영양김씨(英陽金氏)에게, 2남 금숙(琴淑)을 예안 부포리의 권간의 딸에게 장가보냈다. 금숙은 문과에 급제하여 경상도관찰사를 역임한 인물로 슬하에 7남 3녀를 두었다. 장남 금곤(琴崑)과 2남 금숭(琴嵩)이 문과에 급제하였고, 6남 금증(琴𡼳)과 7남 금준(琴峻)이 무과에 급제했으며, 3남 금륜(琴崙)이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이로써 금숙이 살던 집터를 ‘다섯 아들이 과거에 합격한 터[五子登科基]’라고 불렀다. 금숙의 6남 금증의 후손이 성재 금난수의 일가이다. 금증은 1460년(세조 6)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참군을 지냈는데, 그가 함창김씨(咸昌金氏)와 혼인하여 성재의 조부인 금치소(琴致韶, 1460~1547)를 낳았다. 금치소는 정략장군 첨지중추부사를 지냈으며, 안동권씨에게 장가들어 2남 4녀를 낳았는데, 장남 금헌(琴憲)이 성재의 아버지이다. 금헌은 첨지중추부사를 지냈으며, 영양남씨 남식(南軾)의 딸에게 장가들어 성재 금난수를 낳았다.
금난수(琴蘭秀, 1530~1604)의 자는 문원(聞遠), 호는 성재(惺齋), 본관은 봉화(奉化)이다. 1530년(중종 25) 2월 13일 예안현 부포리에서 태어났다. 7세 때 아버지로부터 『소학』을 배우기 시작했고, 12세 때 외숙부 어은(漁隱) 남신신(南藎臣)의 주선으로 청계(靑溪) 김진(金璡)의 문하에 나아가 수학하였다. 이때 김진의 아들인 김극일(金克一), 김수일(金守一)과 자연스레 친교를 맺게 되었다. 17세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20세가 되어서는 청량산 상선암에서 구봉령(具鳳齡), 이국량(李國梁) 등과 강론하는 등 더욱 학문에 매진하였다. 21세 때 횡성조씨(橫城趙氏) 조대춘(趙大春)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월천 조목의 누이였다. 이후 처남인 조목의 권유로 퇴계의 문하에 나아가 수학하였다. 금난수는 특히 『심경』을 좋아했는데, 퇴계에게 직접 전수받아 강학에 힘쓴 책이다. 1554년(명종 9) 현 성성재종택 아래쪽 동계 가에 성재를 신축하자 퇴계가 직접 편액을 써주었고, 임경대(臨鏡臺), 풍호대(風乎臺), 총춘대(總春臺), 활원당(活源塘) 등의 이름도 직접 지어주었다. 31세 때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대과를 보지 않고 학문에만 매진하였다. 35세(1564) 때 가송협에 일동정사(日洞精舍) 즉 고산정(孤山亭)을 지어 독서와 수양을 하며 자연과 벗하는 한편 36세부터 40세까지 스승을 찾아뵙고 의문을 푸는 학업을 계속하였다. 이후 50세 때 제릉참봉에, 52세 때 집경전참봉, 54세 때 경릉참봉, 58세 때 장흥고직장, 60세 때 장예원사평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향병을 모으고 예안 수성장을 맡는 등 의병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고, 정유재란 때도 다시 수성장의 직책을 맡아 군량을 모으는 등의 활동을 펼쳤다. 1599년(선조 32) 70세의 고령으로 봉화현감에 부임하여 향약을 시행하는 등 민심을 수습하여 안정시키는 데 노력하였다. 1600년(선조 33) 8월에 모든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와 스승의 『심경후론(心經後論)』을 읽으며 여생을 보냈다. 1604년(선조 37) 2월 13일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75세이다. 1605년(선조 38)에 조정에서는 금난수를 선무원종공신에 녹훈하면서 좌승지에 증직하고 공신녹권을 반포하였다. 금난수는 4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금경(琴憬), 금업(琴𢢜), 금개(琴愷), 금각(琴恪)이고, 사위는 이광욱(李光郁)이다. 저술로 4권 2책의 『성재집』이 있다.
한편 동계서원(東溪書院)은 1709년(숙종 35) 부포리 마을 남쪽에 세운 동계사(東溪祠)를 모태로 하였다. 처음에 마을의 남쪽에 지었는데, 그때 이미 묘호를 경현사(景賢祠), 당호를 입교당(立敎堂), 동재를 무자기재(毋自欺齋), 서재를 신기독재(愼其獨齋)라 하고, 정문을 도일문(道一門)이라고 하였다. 1785년(정조 9)에 성성재 서재 뒤로 이건하면서 서원으로 승격한 뒤 몽재(蒙齋) 이안도(李安道, 1541~1584)를 함께 배향하였다. 이후 1867년(고종 4)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인해 훼철되었다가 지금까지 복설되지 못하고 있다.

참고문헌
  • 김윤규, 「깨어 있는 선비의 집, 안동 성재 금난수종가」, 『경북의 종가문화』 53,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2019
  • 박미경, 『(국역) 성재선생문집』, 한국국학진흥원, 2019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1·2』, 한국국학진흥원, 2016
    유교넷-목판아카이브(http://mokpan.ugyo.net/)
  • 디지털안동문화대전(http://andong.grandculture.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