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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정(孤山亭)

봉화금씨 관찰공파奉化琴氏 觀察公派

60.0×125.5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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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고산정(孤山亭)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60.0×125.5
  • 건물명 고산정(孤山亭)
  • 공간명 봉화금씨 관찰공파奉化琴氏 觀察公派
  • 서예가
  • 위치정보 경북 안동시 도산면 가송길 177-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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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정(孤山亭)

고산정(孤山亭)



고산정(孤山亭)은 봉화금씨(奉化琴氏) 관찰공파에서 소장하던 것으로 경상북도 안동군 도산면 가송리 447에 있는 누정의 편액이다. ‘고산’은 고산정 건너편의 작은 산으로 주창자인 성재(惺齋) 금난수(琴蘭秀, 1530∼1604)의 자호[고산주인(孤山主人)]이기도 하다. 『송사(宋史)』 권457 「임포전(林逋傳)」에 “은사 임포(林逋)가 서호(西湖)의 고산에 집을 짓고 은거하면서 유유자적했다.”라는 고사와 소식(蘇軾)의 시 「섣달그믐날 고산에서 놀며 혜근과 혜사 두 스님을 찾아뵙다.[臘月遊孤山 訪惠勤惠思二僧]」에 “외로운 산 외롭게 떨어져 있으니 누가 집을 짓고 살기를 바라겠는가? 도인이 도를 닦으니 산은 외롭지 않네.[孤山孤絶誰肯廬, 道人有道山不孤]”라고 한 데서 나온다.

글씨는 작자 미상의 해서체이다. 큰 붓에 먹을 듬뿍 담아 호방하게 써 내린 글씨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가 압도적이다. ‘고(孤)’ 자의 빠른 붓놀림이 이루어낸 경쾌하고 정감 있는 분위기가 역설적이다. 그 화기 넘치는 분위기가 제멋대로 넘치지 않게 잡아주는 듯한 ‘산(山)’ 자의 자태가 의연하다. ‘정(亭)’ 자는 상부의 당당함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좁혀서 쓴 하부에서 집을 튼튼하게 받쳐주고 있는 주춧돌의 단단한 힘이 느껴진다.(서예가 遯石 양성주)

봉화금씨 관찰공파奉化琴氏 觀察公派 소개



지방유형문화재 제274호인 고산정(孤山亭)은 경상북도 안동군 도산면 가송리 447에 자리하고 있다. 고산정은 성재(惺齋) 금난수(琴蘭秀, 1530~1604)의 별서(別墅)이다. 금난수의 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문원(聞遠), 호는 성재(惺齋) 또는 고산주인(孤山主人)으로 예안면 부포에 본제(本第)인 성재종택에서 살았다. 근처에는 안동의 사라진 27개소의 원(院) 가운데 유일하게 원형이 보존된 부라원루(浮羅院樓)도 있다. 금난수는 강변 부라원루 주변에 소나무를 직접 심고 사평송이라 불렀다. 또한 종택 근처에 성재(惺齋)라는 정자를 짓고, 학문에 정진하였다. 성재 앞을 흐르는 시냇가에는 지금도 임경대(臨鏡臺), 활원당(活源堂) 글씨가 남아 있다. 금난수는 처음에는 청계(靑溪) 김진(金璡, 1500~1580)에게 글을 배웠고, 뒤에 이황의 문하에 들어가서 수학하였다. 1561년(명종 16)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직장·장례원사평을 지냈으나,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노모의 봉양을 위해 고향에 은거하다가 정유재란 때 안동 수성장(守城長)으로 공을 세웠다. 고향인 봉화의 현감에 임명되어 1년 만에 사임하고 집에 돌아왔다. 저서로는 『성재집(惺齋集)』이 있다.
고산정은 안동 팔경의 하나이자 도산구곡 중 제8곡인 고산곡 단애 아래에 자리 잡고 있다. 고산곡은 가송협이라고도 하는데, 안동과 봉화의 접경인 가송리에 있는 협곡이다. 이곳은 고산정을 중심으로 위쪽으로 물길이 산허리를 끊어 두 개의 절벽으로 갈라놓았다. 절벽은 내병대와 외병대이다. 고산정은 외병대 아래 엎드려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외병산과 내병산이 주위를 병풍처럼 둘렀고, 고산이 솟아 절경을 이룬다. 고산정이 있는 암벽은 가송협의 시작이자 끝으로 축융봉 아래 내취병과 고산 아래 외취병의 경관이 압권이다. 특히 두 개의 절벽을 가르며 유유히 흘러가는 큰 물결이 장관이다. ‘큰 물길은 소리 없이 흐른다’는 표현이 있듯이 이는 마치 중국의 장가계에서 본 듯한 풍경이다. 고산정의 강 건너편에서 보면 조선 후기 대표화가 호생관(毫生館) 최북(崔北, 1712~1786)의 <공산무인도(空山無人圖)>가 연상된다. 화제(畫題)인 “빈산에 사람 없고, 물이 흐르고 꽃이 피네.[空山無人 水流花開]”는 중국 송나라 대문장가 동파(東坡) 소식(蘇軾)의 시에서 따온 것으로, 선계를 옮겨놓으면 이런 광경일 것이다. 정자 안에서 보이는 강 건너 절벽이 내병대이고 마주보이는 산이 고산, 독산이다. 정자 이름은 여기서 따왔다. 고산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우물마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큰 방 하나와 작은 방 하나의 온돌방을 꾸몄고, 전면과 양 측면에는 계자난간을 두른 팔작 기와집인데, 강물이 넘어오지 못하도록 자연석 축대를 쌓아 땅을 높였다.
정자 앞으로 강이 시원하게 흘러 오미소(午尾沼)를 이루고, 맞은편 가송협 산기슭에는 송림과 함께 독산(獨山)인 고산이 있어 절경을 이룬다. 근처에 물맛 좋은 옹달샘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고산정에 오르면 강가를 향해 늘어서 있는 소나무들이 압권이다. 내취병 쪽의 소나무는 뿌리가 온 대지 위를 뻗어 나와 있어 수백 년은 족히 될 만하고, 꿋꿋하게 고산정을 지키고 있는 탱자나무도 백여 년 이상은 되었을 것이다. 정자 앞이나 내취병 쪽의 소나무들은 아름드리로 사평송(沙平松)이라 부르는데, 이것은 부포리의 성재(惺齋)와 부라원루(浮羅院樓) 주변에 금란수가 심은 소나무를 퇴계 문하에서 동문수학하던 월천(月川) 조목(趙穆, 1524~1606)이 사평송이라 불러준 것과 우연하게도 일치한다. 고산정에서는 정자의 주인뿐 아니라, 수많은 문인들이 드나들었다. 시를 남긴 문인들만 38명에 78수의 시가 정자에 걸려 있고 금란수의 저서 『성재집』에도 남아 있다. 부포의 성재(惺齋)가 제1의 별서로 본제(本第)에서 주로 사용한 별서였다면 고산정은 가끔씩 와서 쉬고 시를 논하며, 묵객들을 맞이하였던 제2의 별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정자 안에는 이황(李滉)과 금난수, 이휘응(李徽應) 등의 시판이 걸려 있다. 정자 앞에는 강 쪽으로 기운 소나무가 정취를 더해주고 정자 왼쪽에는 70년 전 조선총독부가 세운 ‘조학번식지(鳥鶴繁殖地)’라는 천연기념물비가 서 있다. 이곳은 국내 유일의 먹황새(천연기념물 제200호) 서식지인데 안동시가 다시 복원할 계획이다. 1563(명종 18) 고산정을 지을 당시는 일동정사(日東精舍)와 이름을 함께 사용했다. 금난수는 예던길을 따라 퇴계가 걷던 길을 가던 중, 이곳의 아름다움에 취해 만년에 쉴 수 있는 장구지소(杖屨之所)로 고산정을 신축하고 경전(敬典)을 가까이하였다. 금난수는 “청량산 아래 하늘에서 아끼고 땅에서 감추어둔 별천지 마을이 있고, 해와 달의 아름다움이 상존하는 정자가 있다”라고 하여 이곳 고산정을 ‘일동정사(日東精舍)’라 하였다. 금난수의 연보에는 “가을에 일동정사를 지었다. 바로 고산정이다. 치솟아 있는 절벽을 끼고 깊은 물웅덩이를 내려다보니, 수려하고 깊고 그윽하여 선성 명승 중의 하나이다. 선생은 항상 경전을 끼고 들어가 머물렀는데, 고요함 속에서 스스로 깨닫는 바가 있었다. 그곳은 푸른 절벽이 치솟아 있고, 고산과 대치하고 있으며, 가운데에는 징담(澄潭)이 있어서 작은 배를 갖추고 위아래로 노닐며 흥취를 돋울 수 있으니, 낙동강의 명승 중 한 곳이다.”라고 하였다.
고산정을 조선의 선비들에게 이름을 알린 이는 퇴계이다. 고산정에서 그는 행복했다. “내가 일찍이 금난수의 집에 간 일이 있었는데 산길이 몹시 험했다. 그래서 갈 때는 말 고삐를 잔뜩 잡고 조심하는 마음을 풀지 아니하였는데, 돌아올 때에는 술이 거나하게 취해서 갈 때의 길 험한 것을 잊고 마치 탄탄한 큰길을 가듯 즉 마음을 잡고 놓음이란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라고 하였다. 퇴계는 고산정에서 금난수를 위해 시도 지었고 글씨도 써주었다. 「서고산벽(書孤山壁)」, 「유고산(遊孤山)」, 「고산견금문원(孤山見琴聞遠)」 같은 시는 퇴계가 고산정에서 지은 것이다. 또 ‘성성재(惺惺齋)’ 편액과 ‘고산별업(孤山別業)’이라는 편액도 직접 써주었다. 퇴계와 금난수가 사제의 인연을 맺기까지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금난수는 처남인 조목(趙穆)의 권유로 퇴계의 제자가 되기를 청했으나 퇴계는 병을 이유로 거절했다. 금난수는 한 달 동안 매일 퇴계를 찾았고 마침내 퇴계가 그 뜻을 가상히 여겨 제자로 거둬들였다. 퇴계는 고산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해와 달이 아름다운 일동주인 금씨를 日洞主人琴氏子
지금 계시는지 강 건너로 물어보니 隔水呼問今在否
농부는 손 저으며 내 말 못 알아들은 듯 耕夫揮手語不問
구름 낀 산 바라보며 한참을 기다리고 앉았네 帳望雲山獨坐久

다음은 금난수의 「고산정(孤山亭)」이라는 시이다.

한 해 여섯 번을 왔건만 一歲中間六度歸
사철 풍광 어김없네. 四時佳興得無違
붉은 꽃잎 떨어지자 녹음 짙어지고 紅花落盡靑林暗
노란 낙엽 땅에 지니 흰 눈 날리네. 黃葉飄餘白雲飛
단사벽 바람이 옷깃을 헤치고 砂峽乘風披梜服
매내 긴 소에서 비가 도롱이를 적시네. 長潭逢雨荷蓑衣
이 중에 풍류 있으니 箇中別有風流在
취하여 강물 속의 달빛을 희롱하네. 醉向寒波弄月輝

금난수의 넷째 아들 금각(琴恪)은 18세에 요절한 천재였는데 16세 때 그의 『일동록(日洞錄)』에서 고산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예안 북쪽 산은 청량이요, 그 남쪽 봉은 축융이다. 축융 아래 마을이 일동이다. 마을은 그윽하고 조용하다. 산은 높지만 좁지 아니하여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함을 다 갖추었으니, 참으로 은자가 살아갈 만한 낙지 가운데 하나다. 그런 땅이지만 아직 이곳을 즐기는 사람이 없어 별천지 세계가 숲속에 버려져 있고, 또 얼마나 세월이 흘렀는지도 모른다. 그 후 아버지 금란구가 이곳을 드러나게 했으니, 이곳은 곧 하늘이 땅을 만들어 간직했다가 내어준 곳이다.” 그 외에도 선조 때 문신 심희수(沈喜壽, 1548~1622)는 고산정의 아름다움을 가리켜 “그림이나 글로서 도저히 표현하기 힘들다.[眞景難摹畵筆端]”라고 하였고,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은 고산정을 방문한 후 “깊은 산속마다 안고 사는 그대[금난수] 심히 부러워라.[羨子山居不厭深]”라고 하였다.
성재 금난수는 74년의 세월을 나라의 안위와 곧은 절개를 지키며 살았고, 고향 부포에 내려와 은일하고 고산정에서 유유자적한 삶을 살았다. 그는 부포의 본제와 고산정의 별서 사이에 있는 백운지 마을 뒷산에 묻혔다. 백운지 마을은 봉화금씨들이 대대로 살았던 마을이니 그 뒷산은 종중산이다. 고산정은 부포의 성재종택, 가송의 고산정, 백운마을의 성재 묘소와 함께 숱한 역사가 있는 도산구곡의 명승지지(名勝之地)가 되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참고문헌
  • 경북일보-굿데이 굿뉴스(http://www.kyongbuk.co.kr)
  • 이재근, 「자연과 철학을 담은 정원, 한국의 별서」:문화재청[헤리티지채널]의 「명사칼럼」에 연재된 내용 참고
    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2』, 한국국학진흥원, 2016
  • 유교넷(http://www.ugy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