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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정(敬山亭)

경주김씨 김성규 가慶州金氏 金聖圭 家

57.8×122.0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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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경산정(敬山亭)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57.8×122.0
  • 건물명 경산정(敬山亭)
  • 공간명
  • 서예가
  • 위치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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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정(敬山亭)

경산정(敬山亭)



경산정(敬山亭)은 경주김씨(慶州金氏) 김성규(金聖圭) 집안에서 소장하던 편액이다. ‘경산(敬山)’은 정자가 위치한 산의 모양이 ‘경(敬)’ 자와 흡사한 데서 취한 것이다. ‘경’은 내면의 흔들림을 털어내는 수양 방법으로, 주자는 ‘마음에 하나의 편견도 없이 항상 경각 상태로 있으면서 어디든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는 상태[主一無適]’라고 설명하였다. 마음이 욕심에 의해 무너지면 자리를 잡지 못하고, 이로 인하여 사물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게 된다.

글씨는 작자 미상의 해서체이다. 기필(起筆)과 수필(收筆)이 둥근 원형의 필획으로 우아한 느낌이 들게 쓴 ‘경(敬)’ 자의 욕심 없이 붓 가는 대로 무심하게 쓴 글씨에서 경산정이 서 있는 산의 모습이 ‘경’ 자의 자형을 닮았다는 말이 떠오른다. 책, 글씨, 그림 등에 일정한 격식을 갖추어 찍는 도장을 도서(圖署)라고 하는데 이 편액에는 회천(晦川)이라는 도서가 찍혀 있다. 음각으로 흰 글씨가 꽉 차게 새긴 만백인(滿白印)인데 그 현대적 조형미가 흥미롭다.(서예가 遯石 양성주)

소개



경산정(敬山亭)은 경상북도 고령군 쌍림면 송림리에 위치해 있다. 쌍림면은 경상남도 합천군 야로면, 율곡면, 쌍책면, 덕곡면과 맞닿아 있다. 이후 1930년 쌍동면과 임천면을 병합하여 지금의 쌍림면이 되었다. 경산정이 위치한 송림1리는 총면적이 5214천㎥(농지: 862, 임야: 2607, 기타: 1745)이며, 인구는 96명(남: 43명, 여: 53명)이고, 65세 이상은 47명이며, 세대수는 50가구이다. 주산업은 농업이며, 마을을 대표하는 이장은 경산정의 주손인 김성규(金聖圭)이다. 송림1리는 본래 고령군 하동면의 지역으로 소나무가 울창하였는데 1914년의 행정구역의 폐합에 따라 송림동이라 하여 쌍동면에 편입되었다가, 1930년 쌍동면과 임천면이 병합되어 쌍림면에 편입되고 1988년 5월 1일 동이 리로 바뀌어 오늘에 이른다. 송림골, 송림(松林)이라는 명칭은 옛날에 소나무 숲이 우거져 마을 이름을 송림 또는 송림골이라 하여 이름 붙여진 것이다. 문화재 및 유적으로는 경산정을 비롯하여 옥계정(玉溪亭)과 고령 송림리 고분군 등이 있다. 경산정은 주손 김성규의 종조부인 송강(松江) 김성하(金聲夏)의 학덕을 기리고 추모하는 취지에서 건립되었다. 건립연도는 자세하지 않다. 송강 김성하는 동생이 2명 있는데, 김진하(金鎭夏)와 김돈하(金敦夏)이다. 옛날에는 송강 김성하의 제자들이 매년 경산정에 모여 스승인 송강 선생을 추모하였다고 하나, 현재는 옛날 제자들께서는 돌아가시거나 연락이 안 되고 있으며 매년 송강 선생 무덤에서 벌초 및 묘사(墓祀)만 지내고 있다. 다만 송림리 동네 어르신들이 음력 1월 15일 해마다 경산정에서 모임을 갖고 송강 선생을 추모한다. 경산정 근처에는 송강 선생을 위한 재실인 경산재(敬山齋)가 있었는데, 건축할 때 흙을 많이 올려서 짓다 보니 무거워져 지반이 내려앉아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현재 중건은 하지 않은 상태이다.
경주김씨(慶州金氏)는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셋째 아들 김명종(金鳴鍾)[영분공파(永芬公派)]과 넷째 아들 김은열(金殷說)[대안군파(大安君派)]을 각각 1세조로 하고 있다. 그리고 세계(世系)를 알 수 없는 파가 있는데, 장군 김순웅(金順雄)을 1세조로 한다. 그런데 경주김씨의 기원은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에서 시작한다. 알지는 65년(탈해왕 9) 금성 서쪽 시림(始林)[계림(鷄林)]의 나무 끝에 걸려 있던 금궤에서 태어났다. 탈해왕은 이를 기뻐하여 김씨 성을 하사했다. 이것이 경주김씨의 시작이라고 한다. 경주김씨는 김알지의 후손 미추(味鄒)가 조분왕의 사위로서 첨해왕이 후사 없이 승하하시니 뒤를 이어 신라 13대 왕에 오르면서부터 신라의 왕성(王姓)이 되었다. 이리하여 경순왕이 고려에 손국(遜國)할 때까지 경주김씨는 신라 56명의 왕 중에서 38명의 왕을 내어 삼한의 대표적인 성씨를 이룰 수 있었다. 경순왕에게는 아홉 아들이 있었다 하는데 마의태자로 알려진 큰아들 김일(金鎰)은 망국의 한을 안고 입산하였고, 둘째 아들 김굉(金鍠)은 나주김씨(羅州金氏)의 시조가 되었다. 이리하여 셋째 아들 김명종(金鳴鍾)과 넷째 아들 김은열(金殷說)의 후손과 김순웅(金順雄) 장군의 후손이 신라 왕성인 경주김씨를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경주는 본래 신라의 옛 수도이나 고려 태조 18년에 경순왕이 손국하자 나라는 없어지고 다만 경주라 칭하였다. 성종 때에 동경유수(東京留守)로 고쳐 영동도에 예속시켰고 현종조에는 강등시켜 경주방어사로 하였으며 신라 복귀 반란을 꾀하였다 하여 관내의 주(州), 부(府), 군(郡), 현(縣)을 빼앗아 안동, 상주에 나누어 예속시키기도 하였다. 조선 태종조에 경주라는 옛 이름을 다시 썼고 1895년에 군이 되었으며 1955년 경주시 설치와 더불어 나머지 지역은 월성군이 되었다. 주요 성씨로는 김(金)·노(盧)·가(李)·박(朴)·배(裵)·설(偰)·설(薛)·손(孫)·온(溫)·윤(尹)·전(全)·정(鄭)·풍(馮) 등이 있었다.
경주김씨 김성규 집안에서 소장하던 편액인 경산정의 의미를 좀 더 살펴보면 ‘경(敬)’ 자에 주목하게 된다. 영남 지역 유학의 시조인 퇴계 이황은 일신(一身)을 주재하는 것은 심(心)이고, 심을 주재하는 것은 ‘경’이니 경의 실천을 통해 진지(眞知)와 실천(實踐)을 겸비하여 성인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퇴계 선생은 『대학혹문(大學或問)』 전문 5장 “심성을 함양할 때는 ‘경’을 써야 하고 학문에 나아가는 것은 치지에 달렸다.[涵養須用敬 進學則在致知]”와 『대학장구(大學章句)』 전문 6장 1절 소주(小註)에 나오는 주자설(朱子說) “스스로를 속이는 것은 반은 알고 반은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自欺是半知半不知底人]”를 풀이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거경궁리(居敬窮理)’의 중요성을 언급하였으며, 그 중심에 ‘경’이 있음을 강조하였다. 『대학혹문』에 “경은 한마음의 주재이고 모든 일의 근본이다.[敬者 一心之主宰 萬事之本根]”라는 동물과 다른 사람으로서 ‘심’을 스스로 조절하고 주재하는 근원처가 바로 ‘경’에 있음을 역설한 것이다. 퇴계 선생은 “경, 1자는 성학의 처음을 이루어 주고 끝을 완성시킨다.[敬之一字 聖學所以成始成終]”라는 구절을 통해 미발과 이발의 상태에서도 불안정한 ‘심’을 단속할 방법은 오로지 ‘경’을 중심으로 한 학문적 수양만임을 강조하며, 끊임없는 ‘경’에 대한 각성을 주장하였다. 『대학(大學)』 전문 1장 2절에 보이는 “이 하늘의 밝은 명을 돌아본다.[顧諟天之明命]”에서는 일상생활에서 ‘심’을 통제할 수 있는 ‘경’ 공부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경’을 배우는 사람이 단순히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경’의 정상(情狀)만을 공부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내면 속 ‘경’에 대한 이치의 각성이 더욱 중요함을 역설하였다. 『대학혹문』에 “항상 깨어 있다.[常惺惺]”는 ‘심’을 깨어 있게 즉 단속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경’ 공부임을 강조하였다.

참고문헌
  • 서석화(徐錫華)·한국국학진흥원, 『경설유편(經說類編)』, 영남사, 2004
  • 주희(朱熹), 『대학장구(大學章句)』
  • 주희(朱熹), 『대학혹문(大學或問)』
  • 주희(朱熹), 『사서혹문(四書或問)』
  • 경상북도 고령군 쌍림면 홈페이지(http://www.goryeong.go.kr/town/index.do?sec=twn008)
  • http://www.goryeong.go.kr/doc/document.html?fn=02_송림1리_마을소개(2017).hwp&rs=2020074
  • 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
  •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2』, 한국국학진흥원, 2016
  • 유교넷(http://www.ugy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