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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산재(兼山齋)

경주최씨 만회당종택慶州崔氏 晩悔堂宗宅

21.0×55.0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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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겸산재(兼山齋)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21.0×55.0
  • 건물명 겸산재(兼山齋)
  • 공간명 경주최씨 만회당종택慶州崔氏 晩悔堂宗宅
  • 서예가
  • 위치정보 경북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 478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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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산재(兼山齋)

겸산재(兼山齋)



겸산재(兼山齋)는 경주최씨(慶州崔氏) 만회당종택에서 소장하던 편액이다. ‘겸산(兼山)’은 ‘겸손한 자세로 일관하며 자신의 분수를 넘지 말라’는 의미로, 『주역(周易)』 「간괘(艮卦) 상(象)」에 “산이 중첩한 것이 산이니, 군자가 그것을 본받아 생각을 지위에서 벗어나지 않게 한다.[兼山艮 君子以思 不出其位]”라고 한 데서 취한 것이다.

글씨는 작자 미상의 해서체이다. 왼쪽 아래로 삐친 획이 굳은 의지를 보여주는 양 굳세다. 그 강한 점획을 안아주는 듯 후덕한 점획이 오른쪽 상부에서 넉넉한 품으로 다가온다. 빈틈없는 짜임새로 마치 목가구를 짜듯 집을 지어 올린 모양이다. 엄격한 짜임으로 다소 경직되어 보이는 분위기를 하부의 네 점획의 경쾌한 율동감으로 해소하며 ‘겸(兼)’ 자를 구성하고 있다. 이어지는 ‘산(山)’ 자의 묵직한 필획에서는 뒷산의 듬직한 자태와 글쓴이의 산과 같은 높은 이상이 짐작된다. 굵직한 획이 돋보이도록 씀으로써 산처럼 웅장하면서도 차분함을 잃지 않았다.(서예가 遯石 양성주)

경주최씨 만회당종택慶州崔氏 晩悔堂宗宅 소개



경주최씨(慶州崔氏)는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 857~?)의 후대에서 관가정공파와 판서공파를 비롯하여 광정공파와 계림군파·충렬공파·정랑공파·사성공파·문밀공파·문정공파·화숙공파 등 크게 26파로 분파되어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그중 관가정공파·광정공파·정랑공파·사성공파·화숙공파·충렬공파 등 6파가 주축을 이룬다.
은진(恩津)이 본관인 고헌(觚軒) 송호문(宋鎬文, 1862~1907)과 이재(履齋) 송호언(宋鎬彦, 1865~1907)의 시문집 『유하련방집(柳下聯芳集)』 권1에 ‘차겸산재운(次兼山齋韻)’이라는 제목으로 겸산재(兼山齋)와 경주최씨의 시조인 문창후 최치원에 대한 시문이 실려 있다.

淸齋深密最宜山 청재심밀최의산
人物文昌昔此間 인물문창석차간
秋風桂樹懷高調 추풍계수회고조
淺水梅花喜破顔 천수매화희파안
丈夫事業須因學 장부사업수인학
勝地修藏不出閒 승지수장불출한
認取機緘楣字妙 인취기함미자묘
貞元一理好相還 정원일리호상환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따르면, 최씨의 원조인 소벌도리(蘇伐都利)는 사로 6촌의 하나인 돌산고허촌의 촌장이다. 그는 우물가[나정(蘿井)]에서 박혁거세를 발견하여 거두어 기른 후 알천양산촌의 촌장 알평 등과 협의하여 왕으로 추대하였다. 그 공으로 신라 유리왕에게서 32년(유리왕 9) 최씨 성을 하사받았다고 한다. 이때 돌산고허촌이 사량부로 개칭되었다. 또 516년(법흥왕 3) 대인(大人)에서 충선공(忠宣公)으로 시호되었으며, 658년(무열왕 5)에는 문열왕으로 추봉되었다. 지금도 경주 양산재(楊山齋)에서는 매년 가을 6부 대부족장들의 개국원훈에 감은하는 향사인 신라대제가 국가 문화제 행사로 봉행된다.
최씨의 대종가를 이루는 경주최씨는 소벌도리의 24대손인 최치원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한문학의 대가로 이름을 떨쳤으며, 함께 유학한 최승우(崔承祐) 등과 함께 신라 하대를 빛낸 인물이다. 857년(헌안왕 1) 사량부에서 출생했으며, 호는 고운(孤雲)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민첩하며 학문을 좋아했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13세 때 혼자 당나라에 유학하여 18세가 되는 해에 빈공과에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그 후 당나라에서 선주율수현위를 시작으로 승무랑시어사내공봉에 오르고,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879년(헌강왕 5)에는 황소(黃巢)가 반란을 일으키자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어 이름을 떨쳤다. 황소가 이 격문을 읽다가 혼비백산하여 자기도 모르게 의자에서 굴러떨어졌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는 28세가 되던 해 당나라 희종의 조서를 들고 귀국하여 시독 겸 한림학사가 되었다. 그러나 국정이 문란하고 기강이 어지러움을 개탄하여 외직을 자청하여 태산[지금의 태인]·함양·부성[지금의 서산] 등지의 태수로 나갔다. 894년(진성여왕 8) 진성여왕에게 「시무10여조」를 상소하여 도탄에 빠진 민생을 구하려 했으나 6두품이라는 골품제도에 막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산천을 떠돌았다. 그 후 가족을 데리고 가야산에 은거하다가 죽었다고 알려졌으며, 구체적인 생몰연대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는 신라의 천재였으나, 6두품 출신으로 아찬 이상의 벼슬을 할 수 없었다. 시문학에 뛰어나 「토황소격문」뿐 아니라 『계원필경(桂苑筆耕)』 등 수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산천을 떠돌면서 쌍계사 ‘진감선사비문’ 등 국보급의 금석문을 남겼다. 사상적으로는 유교·불교·선교 통합을 시도했고, 그의 사상은 증손인 최승로(崔承老, 927~989)를 통해 고려 건국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와 종형제간인 최승우도 최치원과 함께 유학한 뒤 890년(진성여왕 4)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최언위(崔彦撝, 868~944) 역시 885년(헌강왕 11) 급제한 뒤 집사성시랑을 지냈다. 고려 개국에 공을 세워 태자사부·문한·평장사를 역임했으며, 삼한벽상공신에 올랐다. 이들 3명을 가리켜 ‘신라 3최’라고 일컫는다. 이들 외에도 최씨는 신라인으로는 당나라의 과거에 가장 많은 급제자를 낸 가문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신라 하대에 많은 인재를 배출한 최씨 가문은 고려에 들어와서 맹위를 떨쳤다. 선·후 안동김씨가 맹위를 떨친 조선을 ‘안동김씨의 나라’라고 별칭하는 것처럼 고려시대를 ‘최씨의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경주최씨나 경주최씨로부터 분적한 최씨 가문에서 수많은 인물이 나왔다.
이렇게 고려시대에 명성을 떨치던 경주최씨는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급격하게 쇠락했다. 경주최씨 가문에서 조선시대 전체 과거 급제자는 모두 669명이지만, 문과 급제자는 42명밖에 되지 않는다. 심지어 명문가의 기준으로 제시되는 상신과 대제학 등의 벼슬에는 1명도 배출하지 못했다. 이는 고려시대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던 거대 명문 집안의 위상에 비해 많이 쇠락한 것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와 현대에 들어와 경주최씨 가문은 새롭게 등장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천도교인 동학을 일으켰던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1824∼1864)가 있다. 그는 경주 귀미산 용담에서 득도하여 동학을 창설했고,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기반으로 인본주의를 실천하였다. 그의 제자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 1827~1898)은 동학의 2대 교주가 되었다. 구한말에는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의 제자로 위정척사를 주장한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이 유명하다. 최익현은 흥선대원군의 정책을 탄핵하였으며, 항일구국 항쟁의 선봉에 나섰던 유학자였다. 그는 1855년(철종 6) 문과에 급제하고, 고종 때 호조 및 공조판서와 궁내부특진관을 지내고,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팔도사민(八道士民)에게 포고문을 보내어 왜적으로부터 조국을 지키기 위하여 궐기와 투쟁을 촉구했다. 일제가 그를 대마도에 귀양 보내고 단발을 강요하자 단식으로 순절하였다. 그 외 한글 발전에 큰 공헌을 한 외솔 최현배(崔鉉培, 1894~1970)가 있으며, 경주 최부잣집도 유명하다. 경주 최부잣집은 12대 만석꾼, 10대 진사의 벼슬을 했다고 한다.

참고문헌
  • 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
  •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1』, 한국국학진흥원, 2016
  • 유교넷(http://www.ugyo.net/)

  • 세계일보-[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 한국의 성씨 이야기 <33> 경주최씨
  • (http://m.segye.com/view/201207030226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