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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물당(觀物堂)

안동권씨 송암종가(安東權氏 松巖宗家)

60.5x108.8x6.2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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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관물당(觀物堂)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60.5x108.8x6.2
  • 건물명 관물당(觀物堂)
  • 공간명 안동권씨 송암종가(安東權氏 松巖宗家)
  • 서예가
  • 위치정보 안동시 서후면 교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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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물당(觀物堂)

관물당(觀物堂)


관물당(觀物堂)은 송암(松巖) 권호문(權好文, 1532~1587)이 1570년 봄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교리에 세운 당호 편액이다. 권호문이 집을 짓고 온돌방의 서재 이름을 관아재(觀我齋)라고 부르고 시원한 마루 이름은 집경당(執競堂)이라 하였다. 그런데 퇴계 이황이 ‘관물’로 바꿔주어 그대로 이름으로 삼았다. 관물은 ‘개인의 편협한 마음으로 사물을 보지 말고 만물에 구비되는 이치로써 사물을 바라보라’는 의미를 지닌다. 권호문이 지은 「관물당기觀物堂記」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아! 관물의 뜻은 크다. 천지 사이에 가득한 것이 온갖 종류를 사물일 뿐이다. 사물은 스스로 사물이 되지 못하고 천지가 낳아서 생긴 것이고, 천지는 스스로 생성하지 못하고 사물의 이치가 생성시킨 것이다. 이에 이치가 천지의 근본이고 천지가 만물의 근본임을 알아 천지로 만물을 보면 만물은 각각 하나의 사물이고, 이치로써 천지를 보면 천지 또한 하나의 사물이다. 사람이 천지만물을 살펴 그 이치를 궁구할 수 있으며 세상에서 가장 신령스러운 존재가 됨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천지만물을 살피지 못하고 그 유래에 대하여 어둡다면 박학하고 단아한 군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이 마루에서 보는 바가 어찌 다만 외물(外物)에 눈길을 빼앗기고 연구하는 실질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한가로이 지내며 두루 바라보면 물이 흐르고, 산이 우뚝하고, 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뛰놀고, 하늘빛과 구름 그림자가 오가고 맑은 바람에 갠 달이 떠오른다. 나는 새와 물속의 물고기와 동식물과 초목과 화훼들이 형형색색으로 제각기 그 천진(天眞)을 얻었으니, 하나의 사물을 살펴보면 한 가지 사물의 이치가 있고, 만 가지 사물을 살펴보면 만 가지 사물의 이치가 있다. 하나의 근본에서 나와 만 갈래로 나뉘고, 만 갈래를 미루어 하나의 근본에 이르게 되니 만물이 유행하는 오묘함이 어찌 그리 지극한가. 이 때문에 사물을 자기 눈으로 보는 것은 마음으로 보는 것만 못하고, 마음으로 보는 것은 이치로 보는 것만 못하다. 만약 이치로써 관찰할 수 있으면 만물을 훤히 통찰하는 것이 모두 나에게 갖추어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편액의 글씨는 퇴계 이황의 친필로 전해진다.

굳센 필획, 치밀한 내부 공간구성이 우선 눈에 띈다. 필획은 굳세고 자형은 반듯하다. 觀, 物 두 글자의 배치는 원만한 관계를 이루었다. 마지막 堂을 위로 높게 시작한 점은 재미있다. 내심 物자의 위치에 대한 보완적 심리가 있었던가? 세 글자의 관계가 엇박자를 이루었다. 觀物이 좀 더 있었다면 다른 위치를 선택했을까? 위치를 선정하는 일 즉, 포치(布置)는 쓰기의 중요한 한 부분이고, 순간순간의 판단은 쓰기에 대한 서사자의 반응이다. 

(서예가 恒白 박덕준)

안동권씨 송암종가(安東權氏 松巖宗家) 소개


권호문은 본관이 안동(安東), 자가 장중(章仲), 호가 송암(松巖)이다.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1532년(중종 27) 6월 19일(음) 오시(午時)에 안동시 서쪽 송야리 집에서 태어났다. 그는 8세에 “해가 뜨자 창가가 붉어지고, 구름 일어 산속이 희어지네. [窓明知日上 山白見雲生]”라는 시를 지을 정도로 시에 대한 안목이 남달랐다. 또 동학들과 각자의 이상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는데, 다른 동학들은 모두 일찍 높은 관직에 오르는 것을 기약했으나 권호문은 홀로 “나의 뜻은 여러분들과 다릅니다. 새로 지은 비단 옷을 입고 백 척의 누각에 올라 팔방의 창문을 활짝 열어 놓고 안석에 기대 누워서 한 점의 속세 티끌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 곧 나의 뜻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는 공자가 제자들에게 자신의 뜻을 말하라고 할 때 증점(曾點)이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 쐬며 시를 읊조리며 돌아오겠다.”는 기상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약관의 나이에 퇴계의 문하에서 배웠는데, 퇴계는 매번 유자(儒者)의 기상이 있다고 칭찬하였으며 “시원스럽고 얽매임이 없어 산림의 풍모를 지녔다.”라고 하였다.

한편 집의 남쪽에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었기 때문에 이를 ‘송암’이라 부르고는 자호로 삼았고, 산꼭대기에 ‘한서재’라는 집을 짓고서 기문을 지어 자신의 뜻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그의 나이 30세 되던 해인 1561년(명종 16)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33세에 어머니상을 당한 이후로는 과거를 그만두고 처사로서의 삶을 영위하였다. 특히 어머니 상을 당했을 때는 죽만 먹으면서 상을 치렀기에 몸이 많이 상하였다. 이에 퇴계가 편지를 보내어 경계하였다. 상례를 치른 뒤 권호문이 탄식하기를 “애당초 내가 과거에 뜻을 둔 것은 어머니께서 살아계셨기 때문이었지만 지금 비록 과거에 급제한들 누가 영광스럽게 생각하겠으며 과거 공부는 해서 어디에 쓰겠는가?”라고 하였다. 퇴계가 이 소식을 듣고 기뻐하면서 “과거 공부를 이미 억지로 할 수 없다면 일찍 판단하여 스스로 좋아하는 바를 따라 즐기는 것만 못하다. 다만 좋아하는 것도 갈림길이 많기 때문에 살피고 선택하여 공을 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하였다.

권호문은 이때부터 청성산 아래 낙동강 강가에 집을 지었다. 강물이 내려다보이게 마루를 내고 매화와 대나무를 옮겨 심고서 비로소 이곳에서 노년을 마칠 뜻이 있었다. 1568년(선조 1)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과 산사에서 학업을 익혔으며 서로 약속하기를 “두 사람이 올해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청성산 주인이 되기로 하세.”라고 하였다. 이 해 학봉은 급제하였으나 권호문은 급제하지 못하여 마침내 이곳에서 살았다. 정사가 완성되고 나서는 날마다 그 속에 지내면서 송조(宋朝) 군현(群賢)들의 초상을 서책 위에 모사해 놓고 그 아래쪽에 찬(贊)을 덧붙였다. 새벽에 일어나 단정히 앉아서 책을 펼쳐 읽으며 한 번 훑어 지나가다가 “고요함 속에 고금을 넘나들고, 취한 가운데 건곤을 보았네. [閑中今古 醉裡乾坤]”에 이르면 여러 차례 반복하여 뜻을 집중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또 안동부사에게 글을 올려 폐허가 된 성산의 사찰을 서당으로 만들 것을 청하였으며, 금계에 경광서당을 지어 스스로 지은 글로 교화시키고 힘쓰게 하였다.

권호문은 집 안에 있을 때는 앉거나 누울 때 정해진 곳이 있었고 음식을 먹을 때도 정해진 음식이 있었으며, 잠잘 때는 다만 하나의 해진 대자리와 목상 뿐이었다. 그의 부인이 시장에서 비단옷을 사오는 것을 보고 만류하기를 “가난한 선비의 아내가 비단옷을 입으면 편안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남이 선물을 보내오면 거절하면서 “나의 선친께서는 산과일이나 들나물일지라도 의리에 합당한 뒤에야 받았으니, 내 어찌 감히 가법을 무너뜨릴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집이 가난하여 쌀독이 자주 비어도 담담하게 개의치 않았으며 손님이나 친구를 대접할 때는 신분의 귀천이나 관계의 친소(親疏)를 묻지 않고 반드시 술과 안주를 갖추어 정성을 다해 대접하였다. 좋은 때와 좋은 철에는 매번 산골 친구를 맞이하여 질펀히 술을 마시며 담소를 나누다가 송단에 오르거나 뱃놀이를 하였고, 시를 짓는 벗이 때맞추어 오면 더불어 끊임없이 시가나 문장을 지어 서로 주고받으며 마음속에 쌓인 시름을 마음껏 풀었다. 그러나 강론하거나 친목을 도모하는 공적인 모임이 아니면 비록 동사(洞社 마을 제사)라도 일찍이 가지 않았다. 지주도 함부로 굴복시켜 오게 하지 못하고 반드시 공의 집을 찾아가 방문하였으며 고을의 무서운 아전을 만나더라도 일찍이 일을 부탁한 적이 없었다. 해마다 향리의 인재 선발에 비정(比定)되어 여러 번 추천서를 올렸는데, 학행이 뛰어나다고 칭송하기도 하고 겸손하고 조용하면서 욕심이 적다고 칭송하기도 하였다. 그는 평소 벼슬에 대한 욕심이 없었기에 초간(草澗) 권문해(權文海), 약포(藥圃) 정탁(鄭琢), 백담(栢潭) 구봉령(具鳳齡) 등의 천거에도 불구하고 초지일관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도 평소 권호문의 뜻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를 강호고사(江湖高士)라고 칭할 뿐 관로를 권유하거나 천거하지 않았다.

만년에는 학문이 더 증진되고 행실이 높았으며 성품이 차분하고 신중하였으며 기량이 화평하고 순수하였다. 학봉 김성일이 일찍이 배우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퇴계 선생의 조용하고 온화한 기상은 오직 이 사람만이 닮았다.”라고 하였다. 권호문은 광주안씨(廣州安氏)와 문화류씨(文化柳氏) 두 명의 부인을 두었으나 모두 후사가 없어서 형 권선문(權善文)의 아들 권행가(權行可)를 아들로 삼았다. 권행가는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참봉에 제수되었다. 2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중정(中正)과 수정(守正)이고 딸은 생원 김시강(金是杠)에게 출가하였다. 경기체가 형식인 「독락팔곡獨樂八曲」과 자연 속의 한가한 삶을 노래한 「한거십팔곡閑居十八曲」은 그의 시가문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청성서원에 제향되었고 저서로는 『송암집松巖集』이 있다.

송암종택은 정침과 대문채 그리고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3호로 지정된 관물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침은 口자형으로 안채, 사랑채, 대문채로 이루어져 있다. 안채는 가운데 2칸의 마루를 두고 좌측에 2칸의 온돌방을 두었으며 우측에는 마루와 직교하게 2칸의 방을 배치하였다. 사랑채는 본채의 동편에 위치하는데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이다. 전면에 반칸의 퇴를 내어 난간을 둘렀고 누마루를 설치하였다. 관물당은 지상 1m 정도의 막돌 허튼층쌓기 기단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방형의 각주를 세웠다.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누마루나 난간은 설치하지 않았으며 좌측에 2칸의 온돌방을 두고 우측에는 4칸의 마루로 꾸몄다. 사방에 판벽을 만들고 문을 달았다. 건물의 평면은 一자형인데 비해 지반의 이음새는 丁자형으로 되어 있고 지붕 좌측은 남북으로 맞배지붕이며 우측은 팔작지붕이다.

관물당이 위치한 교리는 고려시대에 향교가 있었으므로 향교골, 행겟골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평촌리와 대석동을 통합하면서 교리로 개칭하였다. 안동권씨 복야공파(僕射公派)인 권인(權靷)이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입향하여 숨어 지낸 것이 계기가 되어 안동권씨 집성촌이 형성되었다. 권인은 조선 개국을 부정하고 고려의 옛 수도인 송도를 잊지 못해 호를 송파(松坡)라 하였는데, 이후 송파는 마을 이름이 되었다. 교리는 솟밤, 평촌, 한석골, 시묘골, 운곡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교리에 거주하는 200여 가구 중 안동권씨는 16가구로 솟밤에 모여 살고 있다. 그 밖에 진주하씨 8가구를 비롯하여 여러 성씨들이 살고 있다. 관련 유적으로는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1호로 권호문이 학문을 강론하던 관물당,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26호인 안동권씨 송파재사, 입향조 권인의 신도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