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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극재(省克齋)

광산김씨 유일재종택(光山金氏 惟一齋宗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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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성극재(省克齋)
  • 글자체 행서(行書)
  • 크기 33.0x70.0x1.5
  • 건물명 성극재(省克齋)
  • 공간명 광산김씨 유일재종택(光山金氏 惟一齋宗宅)
  • 서예가
  • 위치정보 안동시 와룡 가야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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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극재(省克齋)

성극재(省克齋)


성극재(省克齋)는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산야동에 있는 용계서원(龍溪書院)의 편액이다. 용계서원은 유일재(惟一齋) 김언기(金彦璣, 1520~1588)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1778년(정조 2)에 창건되어 그의 조부인 담암(潭庵) 김용석(金用石, 1453~?)과 그의 벗인 인재(忍齋) 권대기(權大器) 등을 배향하였다. 서원의 이름은 서원 뒤쪽에 있는 와룡산에서 유래하였다. 용계서원의 강당 이름은 흥교당이다. 유생들이 기거하는 동재와 서재가 있었는데 성극재와 직방재가 그 이름이다. ‘성극’은 『논어』, 「헌문憲問」의 주자의 주석에 나오는 ‘성신극기(省身克己)’의 줄인 말로 ‘자신의 과실을 살피고 자기의 사욕을 이긴다’는 의미가 있다. 직방(直方)은 『주역周易』의 “경(敬)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고, 의(義)로써 행동을 반듯하게 한다.[敬以直內 義以方外]”라고 한 데서 유래한다. 편액 글씨는 작자 미상이고 행서로 쓰였다.

필획에 근골이 강하면서도 특히 육혈이 풍부하다. 살집이 많다는 뜻이다. 그런 까닭에 넉넉하고 풍부한 풍모가 있다. 종획의 마무리 부분에서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간 후 빠져나온 붓처리가 압권이다. 省의 좌 삐침에서 이미 고조된 감정에서 그 조짐이 보인다. 크지 않는 편액이지만 글씨는 웅장함이 있고 특히 齋의 넓은 품이 종으로 길게 쓴 省克 두 글자와 좋은 조화를 보인다. 

(서예가 恒白 박덕준)

광산김씨 유일재종택(光山金氏 惟一齋宗宅) 소개


용계서원(龍溪書院)이 있는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산야동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물야동·산동, 동후면 구접리·우곡리를 병합하고 산동의 ‘산’자와 물야의 ‘야’자를 따서 산야동이라 하였다. 지명과 관련한 기록으로는 『와룡면지臥龍面誌』에 “산야동(山野洞)은 옛날에 산동이라 하였고, 가구에서 5리쯤 되는 곳에 있다. 산은 높고 골은 깊다. 물야촌은 부성에서 동쪽으로 10리쯤에 있다. 동악산의 동쪽으로 산과 내로 둘러싸였으며 사족이 많이 산다. 『영가지永嘉誌』에 나와 있다.”라고 되어 있다. 안동댐 건설로 말미암아 마을 일부가 수몰되었다. 1995년 안동군이 안동시와 통합되면서 안동시 와룡면 산야리가 되었다. 산야리에 용계서원이 세워진 이유는 이곳에 김언기의 묘소가 있기 때문이다.

광산김씨는 전라도 광산(光山, 지금의 광주시)의 토성으로 고려 후기 왕경에 진출하여 관료를 배출한 명문 가문이다. 광산김씨는 문정공파(文貞公派), 문숙공파(文肅公派), 양간공파(良簡公派), 낭장동정공파(郎將同正公派), 사온직장공파(司醞直長公派)의 5개 문파로 나누어진다. 안동 광산김씨는 주로 오천, 구담, 가구 등 세 곳에 뿌리를 내려 세거하였다. 이들은 모두 고려 충렬왕 때 형부상서를 지낸 14세 양간공 퇴촌(退村) 김연(金璉, 1214~1291)의 손자 김진(金稹)이 계승한 양간공파에서 나온 분파이다. 오천에는 김진의 5남인 김천리(金天利)를 계승하는 분파가, 구담과 가야에는 김진의 차남인 김영리(金英利)를 계승하는 분파가 자리 잡았다. 그래서 오천에는 김효로(金孝盧, 1455~1534)가 예안의 오천에 입향하면서 광산김씨 예안파를 형성하였고, 구담과 가야에는 김영리 계열의 김용석(金用石)이 스승인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이 당한 무오사화를 보고 안동의 구담으로 입향한 뒤 그 손자 김언기가 처가를 따라 오천리 근처의 가야리로 이거하면서 퇴촌공파(退村公派)로 정착하게 되었다.

김언기는 자가 중온(仲昷), 호는 유일재(惟一齋),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점필재 김종직의 제자인 김용석의 손자이고, 이황과 동방 합격한 김주(金籌)가 부친이다. 모친 순흥안씨(順興安氏)는 안처정(安處貞)의 딸이다.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한 그는 풍산현 구담리에서 태어났으며 부친을 따라 안동부 와룡면 이계(지금의 이상리)로 이거하였다. 그리고 만년에 와룡의 가야에 집터를 정해 정착하였는데, 1561년(명종 16) 서당 모재를 짓고 제자를 양성하였다. 당시 문도가 수백 명에 이르렀으며, 김언기의 학덕에 대해 이광정은 “복주의 문학 흥성은 선생의 창도에 힘입은 바가 크다.[福州文學之盛 多自先生唱導云]”라고 평가했다. 1567년(명종 22) 생원시에 합격한 뒤로 다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1571년(선조 4) 영해교수로 제수되었을 때 영해 향교의 강당을 수리하고 학교의 규약을 밝히고 학생을 장려하고 인재를 배양하는 등 교육에 힘썼다. 1573년(선조 6) 여강서원을 창건하여 이황을 배향할 때 여강서원의 초대 원장이 되었다. 백담(柏潭) 구봉령(具鳳齡), 송암(松巖) 권호문(權好文), 지산(芝山) 김팔원(金八元) 등과 교유하며 강학하였다. 비지(賁趾) 남치리(南致利), 지헌(芝軒) 정사성(鄭士誠) 등의 제자들을 배출하였다. 초취부인 영양남씨 남세용의 딸 사이에 1남 2녀를 두고, 후취부인 영천이씨와는 2남 3녀를 두었다. 아들은 김득연(金得硏, 1555~1637), 김득숙(金得肅, 1561~1589), 김득의(金得礒, 1570~1625)이다. 유일재종택은 첫째 김득연의 후손이 이어가고 있다. 김언기의 묘소는 와룡산 남쪽 기슭 축좌언덕에 있다. 저술로 2권 1책의 『유일재선생실기惟一齋先生實記』가 있다.

용계서원은 1778년(정조 2) 선생의 문인들과 후손들이 보덕사를 세워 선생을 제향하고 인재 권대기를 추향하여 오던 중 대원군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된 뒤 지금까지 복설되지 못하고 있다. 서원 맞은 편 언덕 김언기의 묘소 아래에 보덕단을 세워 매년 3월 초정일(初丁日)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현재는 강당 건물 1동과 부속 건물 1동이 남아 있다. 강당은 막돌 초석 위에 사각의 주초를 놓고 각주를 세운 정면 4칸, 측면 2칸의 홑처마 맞배지붕으로 중앙에 4칸의 마루를 두고 좌우에 2칸의 온돌방을 배치한 간결한 구조의 건물이다.

참고문헌
  • 김시황, 「유일재 김언기 선생 생애와 학문 및 교육」, 『퇴계학과 유교문화』 제30집, 경북대학교 퇴계학연구소, 2001.
  • 박종천, 「조선시대 예안 광산김씨의 친족활동-계회와 성회를 중심으로」, 『국학연구』 제30집, 한국국학진흥원, 2016.
  • 한국국학진흥원, 『한국국학진흥원소장 국학자료 목록집10 광산김씨 유일재종택』, 한국국학진흥원, 2011.
  • 김미영, 『도학의 길을 걷다, 안동 유일재 김언기 종가』, 예문서원, 2017.
  •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 유교역사관(http://www.ugyo.net/)
  •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목판아카이브(http://mokpan.ugyo.net/hyunpan/)
  • 문화재청(http://www.cha.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