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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행사(景行祠)

한산이씨 대산종가韓山李氏 大山宗家

54.0×115.0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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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경행사(景行祠)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54.0×115.0
  • 건물명 경행사(景行祠)
  • 공간명 한산이씨 대산종가(韓山李氏 大山宗家)
  • 서예가
  • 위치정보 안동시 남후면 암산1길 5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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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행사(景行祠)

경행사(景行祠)



경행사(景行祠)는 경상북도 안동시 남후면 광음리 34에 위치한 고산서원(高山書院) 사당의 편액이다. 이 편액은 한산이씨 대산종가에서 기탁한 것으로, 편액의 크기는 가로 115㎝, 세로 54㎝이다. ‘경행(景行)’은 『시경(詩經)』 「소아(小雅)_거할(車轄)」의 “높은 산을 우러러보고 큰길을 향해 나아가다[高山仰止 景行行止]”라고 한 데서 취한 말인데, 공자가 “시에서 인을 좋아함이 이와 같다. 사람들은 큰길을 걸어가다가 힘이 다해서 계속 걸을 수 없을 때에야 중도에 그만둔다. 마찬가지로 몸이 이미 늙은 것도 잊고서 앞으로 남은 세월이 얼마 되지 않는 것도 염두에 두지 않은 채 날마다 열심히 노력하다가 죽은 뒤에야 그만두어야 한다[詩之好仁也如此 鄕道而行 中道而廢 忘身之老也 不知年數之不足 俛焉日有孶孶 斃而後已]”라고 평한 말이 『예기(禮記)』 「표기(表記)」에 나온다. 사당의 편액 명칭을 이렇게 명명한 것은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1711~1781)의 학문과 덕행을 높이 기리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고산서원은 1789년(정조 13)에 사림의 공의로 이상정의 덕행과 학문을 기리기 위해 창건되었다. 그 후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1868년(고종 5)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뒤 1977년 고산정사(高山精舍)와 백승각(百勝閣)을 보수하고, 1984년과 1985년에 강당인 호인당(好仁堂), 사당인 경행사를 중수하였다. 또 1985년 유림의 공의로 이상정의 아우인 소산(小山) 이광정(李光靖, 1714~1789)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현재 경상북도 기념물 제5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향사는 3월 초정일(初丁日)에 거행하고 있다.

글씨는 작자 미상의 해서체이다.

화려한 기교를 배제하고 쓴 글씨가 편안한 안정감을 준다.(서예가 遯石 양성주)

한산이씨 대산종가(韓山李氏 大山宗家) 소개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1711~1781)은 본관이 한산(韓山), 자가 경문(景文), 호가 대산(大山)이다. 증조는 이효제(李孝濟)이고, 조부는 이석관(李碩觀)이며, 아버지는 관가재(觀稼齋) 이태화(李泰和)이고, 어머니 재령이씨(載寧李氏)는 밀암(密菴) 이재(李栽, 1657~1730)의 딸이다. 이상정은 7세에 『십구사략(十九史略)』을 배웠는데 지칠 줄 모르고 글을 읽었으며 12, 3세에 벌써 사서(四書)를 다 읽었다. 『연보』에 의하면, 14세 때 외조부인 밀암 이재 밑에서 『소학(小學)』과 『맹자(孟子)』를 수업하였다. 1730년(영조 6) 외조부가 세상을 떠나자 어느 날 홀연히 탄식하여 말하기를, “문장은 한낱 조그마한 재주일 뿐이니, 기수(器數) 예기(禮器)와 예수(禮數) 등의 의문(儀文)의 말단이요, 도(道)의 지극한 바가 아니다” 하고는 「병명팔첩(屛銘八帖)」을 지었는데, 독서(讀書), 독지(篤志), 신사(愼思), 사고(師古), 근독(謹獨), 성신(省身), 일신(日新), 역행(力行) 여덟 가지였다. 그 뒤 『심경(心經)』과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읽으면서 성리학의 깊이를 더해 갔다. 1735년(영조 11) 진사시에 합격하고 같은 해 문과에 급제하였다. 다음 해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에 보임되었다. 1737년(영조 13) 집 오른쪽에 대산서당(大山書堂)을 지어 후학들을 양성하였다. 1738년(영조 14) 연원찰방(連原察訪)에 제수되었으나 이듬해 관직을 버리고 돌아왔다. 1741년(영조 17)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모방하여 『퇴도서절요(退陶書節要)』 10권을 편찬하여 완성하였다. 1744년(영조 20)에 부사과(副司果)로 승진하였으며, 같은 해 구사당(九思堂) 김낙행(金樂行)과 더불어 일직 귀미리에 있었던 귀담서당(龜潭書堂)에서 『심경』을 강론하고 7월에는 「이기동정설(理氣動靜說)」과 「이기선후설(理氣先後說)」을 지었다. 1751년(영조 27)에 예조낭관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1753년(영조 29)에 연일현감(延日縣監)에 제수되었는데 1년이 못 되어서 치적이 크게 드러났다. 그런데 1755년(영조 31)에 옥사(獄事)에 연좌되어 파직되어 돌아왔다. 1758년(영조 34)에는 상이 특별히 명하여 사간원정언에 제수되었으며, 1762년(영조 38)에는 다시 사헌부감찰에 제수되었다. 이상정은 조령(鳥嶺) 밑에 이르러서 병을 이유로 정장(呈狀)하고는, “갈매기는 사람의 일에 관심이 없고, 일만 리 물결 위를 자유로이 노니는구나[白鷗不關人間事 萬里波長自在遊]”라는 시를 남겼다. 그 뒤 1771년(영조 47)에 강령현감(康翎縣監)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였으며, 1777년(정조 1)에 정언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1780년(정조 4)에는 병조낭관에 제수되었다. 이때 상이 대산에 대해 관심을 갖고 등용하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대신들이 합사(合辭)하여 대산을 천거하였으므로 대산을 통정대부의 품계로 승진시켜서 병조참지(兵曹參知)에 제수하였다. 대산이 상소하여 이를 사양하자 다시 예조참의(禮曹參議)로 옮기었으며, 이듬해인 1781년(정조 5)에는 형조참의(刑曹參議)에 전보되었다. 정조는 기필코 대산을 불러들이고자 하여, 대신(大臣)의 논계(論啓)를 따라서 대산을 무겁게 추고(推考)할 것을 명하였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길을 나서게 되었는데, 충주에 이르러서 글을 올리고 돌아가고자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다시 풍기까지 가서 병을 이유로 사퇴하였으나 역시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임금의 덕(德)에 대해서 진달하는 9가지 소를 올렸는데, 뜻을 세우고[立志], 이치를 밝히고[明理], 공경을 생활화하고[居敬], 하늘의 도리를 체득하고[體天], 간언을 받아들이고[納諫], 학문을 일으키고[興學], 사람을 잘 쓰고[用人], 백성을 사랑하고[愛民], 검박을 숭상하는 것[尙儉]이었다. 이상정은 1781년(정조 5) 10월에 병이 들어서 자리에 누웠다. 이때 대산에게 글을 배우러 온 선비들로 인해 문밖에는 항상 신발이 가득하였으며, 대산은 이때에도 여전히 이들에 대한 응대를 게을리하는 일이 없었다. 대산 이상정이 운명할 당시의 상황은 김종섭(金宗燮)과 류범휴(柳範休)가 기록한 『고종일기(考終日記)』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병이 심해지자 대산의 아우 소산(小山) 이광정(李光靖, 1714~1789)이 울면서 가르침을 청하였다. 그러자 대산이 말하기를, “분수에 따라서 장례를 치르도록 하라. 그리고 후학들의 향상에 노력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그러고는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서 웃옷을 입히고 띠를 두르게 한 다음에 말하기를, “평소에 강의하여 논의한 것들을 부디 착실히 공부하여 연마하기 바란다”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이와 같은 일들은 다만 일상적인 것들일 뿐이다. 그러나 본래 이와 같은 일상적인 생활 속에 오묘한 이치가 들어 있는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 시자(侍者)에게 명하여 요와 이불을 깨끗이 새로 깔게 하고는 붙들어 일으켜서 자리를 바꾸어 눕히게 하였다. 그런 뒤 이튿날 조용히 숨을 거두니, 12월 9일(정축)이었다. 이듬해 3월 을축일에 안동부 북쪽에 있는 학가산의 사향 언덕에 안장하였다.

이상정은 18세기 영남 남인을 대표하는 성리학자로, 백불암(百弗庵) 최흥원(崔興遠, 1705~1786), 남야(南野) 박손경(朴孫慶, 1713~1782)과 함께 ‘영남삼로(嶺南三老)’로 일컬어진 인물이다. 이상정은 퇴계(退溪) 이황(李滉)→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밀암(密菴) 이재(李栽)로 이어지는 퇴계학을 집대성하여 소퇴계(小退溪)로 일컬어졌다. 이상정에 의해 집대성된 퇴계학은 손재(損齋) 남한조(南漢朝)→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으로 이어지는 계통과, 성리학적 사유체계에 있어서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으로 이어진다.

이광정은 자가 휴문(休文)이고, 호가 소산(小山)으로 대산 이상정의 아우이다. 외조부인 밀암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1735년(영조 11)에 증광향시, 1740년(영조 16)에 동당향시에 합격하였으나 전시에 불리하여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그 뒤 1753년(영조 29) 어사가 영남 인재 세 사람을 추천하였는데 그중 한 사람으로 뽑혔고, 1783년(정조 7) 국왕이 “이상정의 아우 광정이 학문과 행검으로 도내에 알려져 그 형의 풍도를 지녔다 하니, 가상한 일이다”라고 하며 이조에 명해 기용토록 분부했다. 온릉참봉, 동문교관, 사과, 별제등 직에 임명하였으나 모두 사양했다. 비범한 재질로 평생 학문과 행검(行檢)에 힘을 쏟았다. 문집 13권 7책이 있다.

경행사(景行祠)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풍판(風板)이 설치되어 있다. 공포(栱包)는 이익공(二翼工) 양식을 사용하였으며 겹처마로 단청이 되어 있다. 내부에는 대산 이상정의 위패가 왼쪽에 모셔져 있고 오른쪽에 소산 이광정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사당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동·서쪽에 3단으로 설치되어 있으며 사당 뜰에는 정요대(庭燎臺) 2개가 설치되어 있다. 이 정요대는 일명 ‘불받침대’라고도 하는데, 서원에 행사가 있을 때 관솔불을 지펴 그 위에 올려 주위를 밝힐 때 사용하였다.

참고문헌
  • 이상정(李象靖), 『대산선생문집(大山先生文集)』
  • 이광정(李光靖), 『소산선생문집(小山先生文集)』
  • 안동문화원, 『안동오면 뵈줄게』
  • 안동문화원, 『안동의 문화유산』
  • 안동민속박물관, 『안동의 지명유래』
  • 안동민속박물관, 『안동의 현판』 상권
  •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1』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 http://www.ugy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