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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산서원(屛山書院)

풍산류씨 충효당豊山柳氏 忠孝堂

47.0×172.5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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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병산서원(屛山書院)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47.0×172.5
  • 건물명 병산서원(屛山書院)
  • 공간명 풍산류씨 충효당(豊山柳氏 忠孝堂)
  • 서예가
  • 위치정보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광덕리 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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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산서원(屛山書院)

병산서원(屛山書院)



병산서원(屛山書院)은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에 위치한 병산서원의 편액이다. 이 편액은 풍산류씨 충효당에서 기탁한 것으로, 편액의 크기는 가로 172.5㎝, 세로 47㎝이다. ‘병산(屛山)’은 지명에서 취한 것이다. 서원에서 바라보이는 벼랑이 병풍처럼 보인다고 해서 산 이름을 병산이라 불렀고, 마을 이름도 이를 따서 병산리가 된 것이다. 병산서원은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과 그의 3남 수암(修巖) 류진(柳袗, 1582~1635)의 학문과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서원이다. 병산서원은 풍산현에 있던 풍악서당(豊岳書堂)이 그 전신이다. 풍악서당은 고려 때부터 있던 서당으로, 지방 유림의 자제들이 이곳에서 학업을 익혔다. 이후 고려 말, 공민왕 때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 왕의 행차가 풍산을 지날 무렵, 그곳 풍악서당에서 유생들이 난리 중에서도 학문에 열중하는 것을 보고 크게 감동하였다고 한다. 이때 많은 서책과 사패지(賜牌地, 호패와 땅)를 주어 유생들을 더욱 학문에 열중하도록 격려하였다. 이후 약 200년이 지나면서 서당 가까이 집이 많이 들어서고 길이 생기자 차츰 시끄러워져서 유림들이 서당을 옮길 것을 물색하고 있었다. 이때, 마침 류성룡이 부친상을 당하여 하회에 와 있을 때였기에 유림들은 그 일을 류성룡에게 문의하였다. 이에 류성룡은 시를 지어 병산이 가장 적당한 곳임을 깨우쳤고 유림들은 류성룡의 뜻에 따라 서당을 병산으로 옮긴 후 ‘병산서당’이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다. 이 일을 주관한 사람은 사인(士人) 남연록(南延祿)이고, 때는 1572년(선조 5)이다. 이름을 바꾼 병산서당은 20년 만에 전란의 소용돌이에서 왜병에 의해 불태워지는 운명을 맞게 된다. 이후 1607년(선조 4)에 류성룡은 불귀의 객이 되고 그의 제자인 제독(提督) 안담수(安聃壽), 찰방(察訪) 김윤사(金允思) 등이 1610년(광해 2) 8월부터 존덕사(尊德祠)를 건립하기 시작하여 1614년(광해 6)에 완공하여 4월에 류성룡의 위패를 봉안하고 병산서원으로 개칭하였다. 1620년(광해 12) 11월에 서애는 학봉 김성일과 함께 퇴계 이황의 적전(嫡傳)이기 때문에 호계서원의 전신인 여강서원에 위패를 천향(遷享)해야 한다는 향중의 의론이 있었다. 이때 동리(東籬) 김윤안(金允安), 송음(松陰) 김윤사(金允思) 등은 천향을 반대하였으나,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의 설득이 있어 결국 이봉에 합의하였다. 김윤안은 김윤사와 함께 이듬해 10월에 다시 우복 정경세에게 편지를 보내어 류성룡의 위패를 다시 병산서원에 제향하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622년(광해 14)에 운명을 맞게 된다. 김윤안에 의해 제기된 복향 문제는 1628년(인조 6)에 김봉조(金奉祖)·김영조(金榮祖) 형제가 우복 정경세와 창석(蒼石) 이준(李埈),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등에게 복향을 건의하여 1629년(인조 7) 3월에 다시 이곳으로 옮겨오게 되었다. 그리고 1662년(현종 3) 12월에 사림에서 수암 류진을 종향하였다. 이후 병산서원은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며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고 1863년(철종 14)에 사액(賜額)을 받았으며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살아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2019년 7월에 도산서원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는 쾌거를 이루었다.

글씨는 작자 미상의 해서체이다.

‘屛’ 자의 꽉 채워 두른 느낌과 ‘山’ 자의 우뚝한 위용과 넉넉함 그리고 ‘書’ 자의 차곡차곡 눌려 쌓임과 ‘院’ 자에서의 차분한 안정감이 서로 충돌하지 않고 공존하며 조화됨이 아름답다.(서예가 遯石 양성주)

풍산류씨 충효당(豊山柳氏 忠孝堂) 소개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은 본관이 풍산(豐山), 자가 이현(而見), 호가 서애(西厓)이다. 그는 1542년(중종 37) 음력 10월 1일 아버지 입암(立巖) 류중영(柳仲郢)과 어머니 안동김씨 김광수(金光粹)의 딸 사이에서 외가인 의성 사촌에서 출생하였다. 1564년(명종 19)에 생원·진사가 되었고, 이듬해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한 다음 1566년(명종 21)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가 되었다. 1567년(명종 22) 정자를 거쳐 예문관검열로 춘추관기사관을 겸직하였다. 1569년(선종 2) 성균관전적과 공조좌랑을 거쳐 사헌부감찰로서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왔다. 이어 홍문관부수찬·지제교로 경연검토관과 춘추관기사관을 겸한 뒤 홍문관수찬에 제수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1588년(선조 21)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에 올랐으며, 이듬해 사헌부대사헌·병조판서·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으로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여러 차례 벼슬을 사직했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자 소(疏)를 올려 스스로 탄핵하였다. 1590년(선조 23) 우의정에 올랐고, 1591년(선조 24) 건저문제(建儲問題)로 서인 정철(鄭澈)에 대한 처벌이 논의될 때 온건파인 남인에 속해 같은 강경파인 북인의 이산해(李山海)와 대립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조판서로서 도체찰사를 겸하여 군무(軍務)를 총괄하였다. 이어 영의정에 올라 왕을 호종(扈從)하여 평양에 이르러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면직되었다. 의주에 이르러 평안도도체찰사가 되었고, 이듬해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평양성을 수복한 뒤 충청도·경상도·전라도 3도의 도체찰사가 되어 파주까지 진격하였다. 이해 다시 영의정에 올라 4도의 도체찰사를 겸해 군사를 총지휘했으며, 이여송이 벽제관(碧蹄館)에서 대패해 서로(西路)로 퇴각하는 것을 극구 만류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594년(선조 27) 훈련도감이 설치되자 제조(提調)가 되어 병서인 『기효신서(紀效新書)』를 강해(講解)하였다. 또한 호서의 사사위전(寺社位田)을 훈련도감에 소속시켜 군량미를 보충하고 조령(鳥嶺)에 관둔전(官屯田) 설치를 요청하는 등 명나라 및 일본과 화의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군비를 보완하기 위해 계속 노력하였다. 선조가 이순신이 군기(軍機)를 놓쳤다는 이유로 군법으로 처단한 다음, 원균으로 하여금 대신 맡게 하고자 하였다. 이에 아뢰기를, “통제사의 직임은 이순신이 아니면 안 됩니다. 지금 일이 급박한데 장수를 바꾸었다가 한산도를 지켜내지 못하게 될 경우, 호남의 안전을 보장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1598년(선조 31) 명나라 경략(經略) 정응태(丁應泰)가 조선이 일본과 연합하여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본국에 무고한 사건이 일어나자, 사건의 진상을 알리러 가지 않는다는 북인들의 탄핵을 받아 삭탈관작 되었다가 1600년(선조 33) 복관되었으나 다시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은거하면서 『징비록(懲毖錄)』을 집필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류진(柳袗, 1582~1635)의 본관은 풍산, 자는 계화(季華), 호는 수암(修巖)이다. 아버지 류성룡과 어머니 전주이씨 경(坰)의 딸 사이에서 3남으로 태어났다. 8세에 어머니를 여의었고, 11세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자형 이문영(李文英)을 따라 난을 피하였다가 이듬해 다시 돌아와 부친을 봉양하였다. 16세에 현감 권채(權采)의 딸에게 장가든 후 부친의 명에 따라 노경임(盧景任)에게 사서(四書)를 배웠다. 26세(1607년)에 부친을 여의었으며, 1610년(광해 2)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612년(광해 4) 해서지방에서 김직재(金直哉)의 옥(獄)이 일어났을 때 무고를 당하여 5개월간 옥고를 치르다가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과 일송(一松) 심희수(沈喜壽) 등의 구원으로 풀려났다. 1616년(광해 8) 유일로 천거되어 세자익위사세마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623년(인조 1) 여러 추종을 받아 봉화현감(奉化縣監)이 되어 백성들을 편안케 했으며, 9월에는 부인 권씨가 죽었다. 이듬해 1624년(인조 2) 형조정랑에 배임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626년(인조 4)에 다시 형조정랑이 되었는데, 공주 사람 중에 향직(鄕職)이 된 자가 황씨 성을 가진 사람과 서로 미워하다가 황씨를 무고함으로 인해 몇 년 동안 해결하지 못하였는데, 원옥(寃獄)을 해결함으로써 형조판서(刑曹判書) 이서(李曙)에게 칭찬을 받았다. 겨울에 영천군수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아 체직되었다. 1627년(인조 5) 청도군수가 되어 유생들을 깨우치는 글을 지어 주었다. 1628년(인조 6) 익위사익위에 제수되었다가 곧바로 사복시첨정이 되었다. 1629년(인조 7) 1월에 예천군수가 되었다가 겨울에 그만두고 돌아오자 읍민들이 추송(追頌)하였다. 1631년(인조 9)에 전라도사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으며 3월에 합천현감에 배임되었다가 1633년(인조 11) 여름에 그만두었다. 1634년(인조 12) 사헌부지평으로 있을 때 장령 강학년(姜鶴年)을 두둔하다가 대간들로부터 공격을 당하였다. 1635년(인조 13) 정월 13일에 향년 54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후일 이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병산서원에 제향되었다.

병산서원(屛山書院) 건축의 특징으로는 경사지 아래쪽 정문인 외삼문 복례문(復禮門)을 들어서면 왼쪽에 연못이 있고 건너편 높은 석축 계단을 오르면 보기 드물게 큰 만대루가 동서로 길게 놓여 있다. 누각 밑을 지나 계단을 다시 오르면 마당 건너편에 강당과 그 앞 양측에 동재와 서재가 마주 보는 교육 공간이 마련되어 있고, 동재 뒤편 담장 밖에는 주소(廚所)인 뜰집 ‘口’자형 주택이 자리 잡고 있다. 강당 뒤편에는 사당인 존덕사(尊德祠)를 앉힌 사당 공간이 전체 중심축에서 약간 벗어난 오른쪽 높은 곳에 별도로 한 구역을 이루고 있는데 전면 담장 가운데에 내삼문이 나 있다. 사당 영역 왼쪽에는 장판각을, 오른쪽에는 전사청을 두었다. 만대루는 향사나 서원의 행사 시에 큰 모임이 열리는 곳으로 사용되며 정면 7칸, 측면 2칸 규모에 팔작지붕으로 꾸민 누각이다. 2층 누마루 주위에는 계자각난간을 돌렸고, 그 밖에 만대루와 복례문 사이에는 물길을 끌어 만든 ‘천원지방(天圓地方)’ 형태의 연못이 조성되어 있다. 강당인 입교당은 팔작지붕인데,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중앙 3칸에 대청을 두고 그 좌우에 각 1칸씩 온돌방을 두었다. 동재와 서재는 구조가 크게 다르지 않은 대칭적 구성의 건물로 각기 정면 5칸, 측면 1칸 반 크기의 맞배지붕으로 이루어져 있다.

참고문헌
  • 류성룡(柳成龍), 『서애선생문집(西厓先生文集)』
  • 류진, 『수암선생문집(修巖先生文集)』
  • 안동문화원, 『안동오면 뵈줄게』
  • 안동민속박물관, 『안동의 현판』 상권
  •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1』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 http://www.ugyo.net/